살았다! 비도 그쳤다!

웨스트하이랜드 웨이 다섯쨋날

by nelly park


살았다. 밤 동안 텐트는 무너지지 않았다. 밤새 바람소리와 흔들리는 텐트 때문에 잠 못 이룰 것 같았지만 피곤했는지 생각보다 잘 잤다. 그것보다 추워서 몇 번 깼다. 폰을 보니 6도다. 오늘은 많이 걷지 않아도 돼서 포근한 침낭속에 좀더 누워있었다.


텐트 밖을 열어보니 날씨가 맑다. 비가 안 오는 게 신기하다. 처음으로 비 맞지 않고 천천히 짐을 싸고 텐트를 정리했다. 텐트는 바람이 많이 불어서 물기가 말라 있다. 오늘은 젖은 텐트를 가방에 안 넣어도 된다. 가방을 들고 식당으로 가서 커피 한잔을 시켰다. 아침은 비싸다. 14파운드다. 오늘은 많이 안 걸어도 되니 커피에 에너지바 하나로 때우기로 했다. 우비를 안 쓰고 길을 나섰다. 날씨가 차가워져서 옅은 입김이 나오고 손이 시리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놓고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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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음악을 들으면서 걸었다. 오랜만에 파랗게 열린 풍경을 보며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니 기분 좋다. 비가 오면 모자를 뒤집어쓰고 땅만보고 가야 하는데 옆을 둘러보니 정말 장관이다. 지난 4일동안도 이런 풍경이었을까. 높은 산들이 옆으로 펼쳐지고 꼭대기에는 신비한 구름들이 걸려있다. 5일만에 진짜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를 걷는 것 같다. 지난 5일동안 고생했던 것은 오늘을 위한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멋진 것도 계속보면 똑같고 질릴 텐데 오늘 하루를 보여주려고 그렇게 혹독하게 굴었나 보다.



길을 걷는 다른 사람들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리고 풍경을 보느라 자주 멈춰 선다. 나도 마찬가지다. 멈춰선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그들도 내 사진을 찍어주며 즐겁게 걸었다. 걷다가 미국인 할머니 할아버지 그룹을 만났는데 일본인이냐고 물어봐서 한국인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하시며 웨인 할아버지는 85년까지 문산에서 군생활을 하셨다고 하신다. 그리고 76년에 판문점 사건에서 토막난 나무 조각도 집에 보관하고 계신다고 하신다. 살아 계신 역사시다.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의 하이라이트 데빌스 스테어 (Devil's Stair)를 걸어 올라갔다. 이름만 듣고는 엄청난 오르막길일줄 알았는데 그 정도는 아니고 엄청난 뷰만 있다. 연신 감탄하며 걷는데 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한다. 그렇게 뷰를 보며 잘 만들어진 길을 따라 걸어서 마을에 도착했다. 1시가 조금 안되었다. 구글맵으로 슈퍼를 검색해서 맥주와 점심거리로 빵과 햄과 치즈를 사서 시냇물이 흐르는 경치 좋은 곳 옆 벤치에 앉아서 맛있게 먹었다.



오늘의 캠프사이트인 맥도날드 호텔에 갔다. (맥도날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너무 일찍 도착하니 메니저가 3시 체크인이라고 일단 온라인으로 예약하고 기다리라고 한다. 사이트에 들어가서 아무리 찾아봐도 호텔방과 오두막방만 있고 캠프사이트를 예약하는 칸은 없다. 그렇게 쉴 겸 기다리다 메니저에게 다시 물어보니 오늘 캠프사이트은 풀이란다. 이미 2시반이다. 다음 캠핑장까지는 4시간 이상 걸어야한다. 지도를 보니 텐트 칠만한 곳이 몇 개 나온다. 여기서 2.5키로 정도 떨어진 산에 있다. 방법이 없다. 일단 걷기로 했다. 가방을 메고 밖을 나와서 걷는데 다시 비가 쏟아진다. 그리고 지도에 표시된 곳까지는 계속 오르막길이다. 다왔다고 생각했다가 오르막길을 다시 연속으로 오르니 죽을 맛이다. 비까지 온다. 45분쯤 걸어 도착한곳을 보니 나무 뒤에 텐트 딱 하나 칠 공간이 있다. 방법이 없다. 오늘은 이 산에서 자자.



텐트를 치고 잠자리를 세팅하고 아까 슈퍼에서 사온 맥주를 마셨다. 여유롭다. 시간은 4시밖에 안됐다. 텐트 밖을 나가면 밋지들이 괴롭히니 아늑한 텐트안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쉬었다. 어제만큼은 아니지만 저녁이 되니 바람이 꽤 분다. 무서워서 밖으로 나가 가이라인을 설치하고 스틱으로 텐트를 고정시켰다. 내일이 마지막날이다. 오늘만 잘 버티면 된다. 그런데 보조배터리가 얼마 안 남았다. 내일 도착할 때까지 과연 폰은 안 꺼지고 버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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