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코로나19가 당긴 뉴노멀. 바야흐로 접속의 시대. 그러니 특정은 어렵겠다. 외려 무상無常인 제행諸行의 사이사이 그 프레임 가운데 뜻을 새겨두려는 행위를 일관하는, 이 흐름으로만 비로소 드러나니 ‘주체’라면 더더욱.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짓는 제법諸法의 실상이 무아無我라면, 법신法身 접속에 일로매진하려는 실천 속에서만 유아독존唯我獨尊이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자귀의自歸依 법귀의法歸依 역시 구별 지은 것처럼 보이나 실은 귀의歸依 중 이미 자自와 법法이 다르지 않음을 실감하니 절로 ‘정말이지 유아唯我로구나’ 하게 되는지도. 보통 독립된 개체로 아我를 주장하나 오히려 그야말로 지엽枝葉일뿐이면. 예컨대 손/발가락이 느끼는 바가 고스란히 집중되는 실체는 모르고 그 가락 저마다 오롯함만 주장하는 형국이라면. 만일 앎이 손으로 옮아가 손을 매만진다면, 내 이웃이라는 약지와 나라는 중지가 다르다는 인식은 자연 여의게 마련. 어쩌면 예수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사도임을 주장하던 바울이 성도 간 지체임을 강조하던 배경엔 이처럼 참 유아唯我의 실체에 대한 확신이 자리했기 때문 아닐까. 지금은 몰라 그렇지 알고 보면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때문에 바울이 남긴 고린도전서 13장10절 이하는 의미심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빠지고 헤매길 거듭하니, 이것이야말로 인생. 어쩌면 최승자 시인의 시 「어떤 아침에는」의 다음과 같은 시구처럼(도돌이표 찍기를 거듭하는 나부터 거듭 새기며 반성하자 싶어 아예 서점 전면 유리창에 달아둔 것).
어떤 아침에는,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또 어떤 아침에는, 내가 이 세계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최승자)
바람직한 상에서 어긋나는 내가 뜬소문 같다가, 뜬세상과 어긋나 ‘편위’ 긋는 내가 바람직한 듯싶은 일상. 그리고 이 사이를 ‘회전하는 기호’로써의 말글. 『광장』 66년판 서문의 최인훈 선생 말마따나 ‘광장’은 물론 ‘밀실’ 또한 당초 불완전한 존재인 사람에게는 모두 필요. 오가는 자유가 허락된 환경이야말로 천부인권인 것은, 누구든 회전하는 기호에 올라타 전인全人으로의 도약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 그런데 자본주의는 이 ‘광장’과 ‘밀실’을 양 극단으로 벌려놓아 인간으로 하여금 오가는 자유를 제한, 박탈 지경에 처하도록 하는 듯싶다. 갑을甲乙 간 관계의 스위칭을 경험하는 일상. 사이를 오가는 존재 전환에서 오는 피로는 낙차와 빈도에 비례. 때문에 이를 줄이고자 갑의 지위를 열망하는 한편에서 양산되는 루저. 이를 문명이라 일컫는 당장의 현실에 성찰을 촉구하는 인류의 유산이야말로 책. 이의 접속을 돕는 것이 서점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비약하자면 21세기의 성역聖域이랄까. 단순 흉내 아닌 자기 내면에 ‘짜라투스트라’ 소환하여 한바탕 역할극을 시연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데 자꾸 ‘10,000원 팔아서 2,500원 남겨 월세는 어찌 감당하나’ 등을 고민하니 답은 더더욱 요원해지지 싶다. 그러니 사즉생死卽生이라는 것. 어차피於此彼 빈번한 거래去來로 부富를 취한들 피차彼此 빈손[空手]으로 돌아가고 말 삶/죽음 아닌가. 죽고자 하면 살 길이 열린다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어야 이어지니 삶이지 싶고.
그래서 동네서점 사각공간은 무엇을 제공하고 싶은가 하면, 제공까진 아니고 인류의 유산을 전하는 데 일조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그에 접속 후 특이점 생성한 독자 몇몇이 그때까지 연속된 제 삶에 불연속점 찍고 도약, 썩어질 밀알 원정대에 투신을 주저 않는 성원으로 화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이런 공상을 설계하는 재미도 쏠쏠하건만 함께 구현하는 재미라면 이에 비하랴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