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서점일기.
납품 차 인근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은 즐겁다. 소량이니 배낭¹ 꾸려 나서면 그대로 산책이자 소풍.
거창하게 이르면 자본化의 정도를 내쪽에서 (먼저) 조율, 그 자본화를 (일정 정도) 거부함으로써 (다시) 찾은 '나의 시간'('오롯하다'라는 표현을 나는 이렇게 일상 중 체험으로 비로소 조금 실감)이렸다.
여기서 잠깐.
다소 간 비약을 무릅쓰고 이르면, 코로나19 이전까지 그야말로 터진 봇물처럼 쏟아진 퇴사記 등에 독자 일부가 호소하는 피로의 정체라면 아마도, 태반이 변죽만 울리다 만다는 느낌이지 않을까. 그러니까 자기 삶의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결심은 물론이거니와 그 배경에 자리한 구조의 문제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는 것. '공감'도 쉽지 않은 독자 입장에서 '위로' 내지 '치유'를 이르는 저자를, 외려 구매로 위로해줘야 할 판이라면 응원 연속하는 팬심도 물릴 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탄생'을 계속해서 견인하는 듯한 인상은 바로 저 위로 내지 치유를 '베푸는 자'라는 '지위'를 퍼블리싱 과정 통해 (선)점하는 듯싶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지 싶고(이를 구현하는데 일조하는 퍼블리셔의 반성이 있어야겠지만, 글쎄올시다 ~ 기대하기 어려울 듯;;). 해서 기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독립'의 영역조차 정작 라벨링 된 독립과 따로 노는 내용들로 양산 형국에 이르는 듯도 하고. 하긴 이런 현상 또한 비록 무늬에 그칠지언정 '생산자'로서의 '작가/작자/저자'─이르는 바가 무엇이든 그 이름을 취함으로써 그─'지위'에 이르고픈 열망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일 테지만. 한편 그만큼 자기 삶은 어떤 '완벽한 순간'들로만 채워져야 하리라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겠고. 하지만 대개의 열망이 (작자의 성별이 어떠하든 간에) '전혜린'²을 미분한 '전혜린 키드'로, 21세기라는 사실을 제하면 새로울 것 없는(어쩌면 퇴보일지 모를) '내방가사內房歌辭'에 그칠 뿐. 차라리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어버렸다'³던 미니멀리스트(굳이 앞서 인용한 문장으로 제한하자면 그렇단 얘기지, YOLO족과는 차라리 대척이지 싶고) '김수영'을 적분, '자기만의 방'에서 혁명을 프로듀싱해야 마땅하겠지만(이게 한류를 자처하는 연예계에서만 이는 것처럼 주목인 게 나로서는 아, 그래 불편하다. 'BTS'가 전부는 아니잖아?! 갑x답하고만;;). 대체 '완벽한 순간'이란 무엇이라 여기는 걸까. 소위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것, 그야말로 '제대로' 된 삶을 어찌 가늠하기에 이리 되고 마는 것일까. 명名과 실實이 상부相符 하지 못하는 이산離散이야, 자기-소외를 일상으로 경험하는 '보이지 않는 손'바닥 안에서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당초 '독립'이란, 숨거나 배제되는 지경에 처하게 마련인 그 자아의 면면에 따르는 유명무실 혐의를 벗기고 하나의 실체로 봉합/복원에 있을 텐데.. '지친 나머지 퇴사한 마당에 그 무슨 사회학적 의미 같은 걸 설명해야 하냐'는 반문反問, 할 수 있다. 그럴 수 있지, 아무렴. 다만 제 속에서 일던 '좀 살자'라는, 목소리 이전의 그 미세한 떨림, 그 일으킴이 번져 지은 파문, 그것이 가리키는 바를 가늠, 바람직하다 싶은 쪽으로 기어코 내디뎠으니 퇴사.etc에 이르렀을 터. 하면 부러 애를 쓰지 않아도 절로 드러나게 마련. 만일 이게 분명치 않다면 밖으로 향하는 반문보다 안으로 자문自問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서점주에 불과한 내 생각을 감히 덧붙여 본다. 아무튼,
금전 아쉬운 편에서 제 시간 일부와 맞바꾸려는 목적으로 계약. 그런데 길들여지는 건지 벌써 진작 레디-메이드로 코딩된 상태인지. 초超자아야말로 자본의 슈퍼바이저인가 어느 순간 머리 꼭대기에 올라 생각의 상투를 조이스틱마냥 쥐고 이리저리 몰아대니 '내가 자본인지 자본이 나인지 싸구려 커피를 홀짝여 보아도 머릿속은 희끄무르죽죽, 홀/짝 가늠조차 불투명한 미래는 너무 낮게 머리카락에 거의 닿게 정수리에 내려앉은 듯싶은 느낌에 어우 놀라 매번 놀라'(feat.장기하 <싸구려 커피> 가사 중 일부), 벗어둔 '어제'는 전장의 시체처럼 즐비하건만 당장 갈아입을 '오늘'이 죄다 사라진 것처럼 버거울 때. '벽장 속 제습제'(예의 <싸구려 커피> 중)처럼 자본 소용에만 닿는 쓸모를 다하고 굳어갈 뿐인 처지에서 마침내 탈주 결심!! 이게 결심인 이유?! 어지간한 각오 아니면 결국 문턱 넘지 못하고 매월 따박따박 들어오는 급여 생활자라는 안전지대(이 접경지에서 경계인으로 버티다 결국 투항. 'latte is horse'의 참상은, 저마다 자신이 자신을 설득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게 아닌지)로 자발적 재영토화하기 때문(이탈 거듭하며 부단히 미끄러지면야 그나마 괜찮겠지만 대개 그렇진 못하니).
그러니까 자본의 속도와 리듬에 부합하는 형태로 개조, 신체는 물론 정신까지 트랜스폼, 자본제에 조립되어 부품으로 기능하던 상태를 멈추고 다시금 자연 접속 생체 기계로서의 인간으로 복원 시도. 그런데 이 몸부림, 만만치 않은 대가 치러야만 하는 작업. 우선 자본제 접속 기계로 기능할 적 일정 부분 보상으로 따르던 화폐라는 윤활유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을 감당해야. 물론 이 공급 체계에서의 독립, 아주 불가능하달 수는 없으니 완벽한 자급자족이 그 한 예. 그러나 이러한 극단은 무리 이전 의미 퇴색. 부품 실격이거나 말거나 인간을 주장하는 매니페스토가 반드시 원시에로의 소급을 전제로 이뤄야 하는 건 아니니. 그저 전적 의존 탈피, 구성비를 달리하여 자본제 의존 비율을 떨어뜨리는 형태로 전환이면 유효. 동물계 지위에 처한 운명을 인간種으로의 숙명으로 소조塑造 위한 사유의 천리행군을 감행 하면 그만. 그러면 되는 것. 이게 그나마 삶을 자기 시간으로 누리는 방편이지 싶지만.. 소돔과 고모라를 향수鄕愁하던 롯의 아내⁴처럼 이전 삶, 소위 BG(부르주아) 취향을 욕망하는 상태로 여전如前이면 복원 곤란, 반박 불가. '_' 인간미를 박탈하고 번-아웃에 이르게 하는 인과의 율이 세간을 장악한 자본제라는 인식, 제가 누리는 풍요의 실체야말로 누군가의 불편/부당/불리에 기댄 편리/편의에 불과함을 인지한 감수성이면 편리/편의를 책임과 맞바꾸어 불편/부당/불리를 함께 짊어지려 할 것. 이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 따라서 이러한 데에 미온적이라면 아직은 제 육신의 안녕이 우선인 동물계. 와닿지 않을지 몰라 덧붙이면, 일례로 자기 심연에 오두막 짓고 나홀로 칩거를, 고독을 즐겨 감당하는 이라야 소로우의『월든』이 제 값 한 것. 꾸미는 말로 가장해본들 유리된 상태로 꾸준하긴 어렵다. 역으로 입신양명 서사 바깥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려는 자세야말로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흉내로 눈속임, 모면에 급급해봐야 정체 탄로는 시간 문제 ~
그러니 요는, 저마다 제 시간을 찾아 누리며 사는 것 말고는 없겠다. 자본을 척도로 균일한 분포를 보이는 것처럼 착시를 불러 일으키는 24H-our에서 대문자 'H'를 빠따-로 쳐날리고(뭐 이 정돈 해줘야 '우아하고 감상적인 OO야구'가 될 듯) -our의 안뜰로 끌어와 누리는 것이지. 아무렴. '_'
이 삶이라는 타임라인에 놓이는 찰나들. 순간이라는 프레임 안으로 들어차는 key.
이것들로 이루니 마음에 별무늬들로 성좌星座.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니 맞바꾸려 해도 바꾸어지지 않는.
'나만의' 유일무이, 소유를 드러내는 아포스트로피apostrophe 호격 가능한. 그러나 어느 누구'의 것'도 빼앗는 바 없는.
이날 오후 우리는 종種을 건너 생명체로 하나 됨.
생명 간 '위치' 이동은 감感이라는 '에너지'를 동動하게 하는 자연계의 발전소發電所
건널목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는 데 바람이 쥐어준 생명의 흔적. 신기하게 닿은 연, 마음에 간직.
¹그나저나 배낭背囊, 순 우리말 아니긴 백팩backpack과 매일반. 하여도 내 정서는 역시 백팩보단 배낭이다. 친근하니까,라고 생각다 그럼 이즈음을 제 유년으로 경험하는 세대의 장래는 어떨까를 잠시 떠올린다. 제 놀이터를 손에 든 액정 안에서 마주하는 요즘 아이들이 자라며 구축하는 미래상은 과연 어떨지.. 활자가 잠든 지면紙面 매만지며 씨-잌ㅋㅋ 읽는 순간 부활! 그럼 그럼 알다마다. 어 그래요, 끄덕끄덕. 그날이 오기까지 자모字母 여러분에게 지면紙面이란 지면地面과 다름없을 터. 서점주主인 나로서는 그때까지 이 공동 묘墓-지기를 성실히 수행할밖에. 아- 아- 알겠어요, 알았다고. 묘-지기로서의 임무 성실히 수행할 것을 여러 자모 앞에서 다짐!! '_'
한편 장년 세대의 책무란 어쩌면 이 '놀이터'를 좀 제대로 마련해주는 것일 텐데.. 툭하면, '모든 시도는 장려되어야 마땅하다'라는 식의 발언만 한겨울에도 죽지 않고 오히려 무성한 지경;; 입 속 옥수수 탈곡은 그만. 놀이터, 그래 뭐 플레이-그라운드니 뭐니 이름이야 아무래도 좋고, 뭐 그런 장場부터 마련해주고 나서 말 옮겨도 되지 않나 싶을 따름. 갓물주 아재아줌의 호사스러운 취미로나 기능할 뿐인 무늬만 서점/카페 등은 좀 자발적으로 지양들 하시고, 차라리 임대 조건의 문턱 낮추어 임차하는 후세가 날개 펼치기까지 둥지로나 내어주시기를. 잘하지도 못할 걸 왜 쥐고서 저만 그렇게 주목받으려 아등바등인가 말이지~~;;
² 故전혜린, 유작『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³ 김수영,詩 「그 방을 생각하며」中
⁴ 개신교 성경 <창세기> 19장 2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