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서점일기
■ On Season 【동네서점(동네책방) 오디션】계속
- 아, 오디션. 국민 혈세가 재원인 만큼 허투루 쓰이는 바 없도록 심사 통해 지원 대상을 선별. 이는 불가피하긴 하다. '허투루'를 사전 단속하기 위한 필터링이라면, 수차례 남긴 그대로 내쪽에선 대환영이다. 기왕 쓴 신경 조금 더 가닿길 바라는 마음에서 남겨둔 것이 '도서구입비' 허용 정도? 자사 매출이 문제의 소지라면 해당 지출 범위를 예산 총액의 일정 %로 제한하면 될 일. 가능하다 싶었다. 어지간한 규모가 아니면 대개 꽉 들어차야 10명 내외인 동네서점에서 회차 당 10권? 예산 바탕으로 매출 일으켜봐야 권당 1만이면 정가 판매로 남기는 이문이래봐야 3천이 평균일 텐데 3만 벌자고 10권 지역민에 제공하자 역설, 하겠나? ㅡ.ㅡ 그렇게라도 들여가서 읽으면 된다. 그이가 아닌 가족 중 누구에게라도, 오늘 이때 아닌 내일 훗날 어느 때 닿아 읽히게 되면, 책은 물론이거니와 서점주主인 나 또한 소임 다한 것. 너무 더디니 보이지 않아 당장 가시적 성과를 기대하는 입장이라면 아쉬울 테지만. 그러나 가꾸고 바꾸는 진면목은 대개 이렇다. 이 후자에 무게를 두고 민간/공공기관 그리고 최종 독자의 마음이 움직이길 바랄 따름. 어쨌든 이런 생각은 꼭 내게만 속하여 인 것은 아니니 반영되는 추세인 듯싶다. 다행이라면 다행.
- 그러나 여전히 길은 멀다. 앞서 인용한 헬렌 니어링의 책 가운데 실린 내용 일부(정확히는 재인용) 발췌, 이곳에 다시 옮겨 심는다.
캐나다의 교육자 데이비드 스즈키(D. Suzuki)는 1987년에 쓴 책 《변형 Metamophosi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강연에는 친밀감이 없다. 생각을 나눈다기보다는 일종의 공연이다. …… 사상을 주고받는 것, 열린 토론과 관용은 대학 생활의 초석이다. …… 대학 과정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가르치는 사람의 인격을 구체화한다. 그 속에는 교수의 학식, 연구성과와 성찰의 정수가 들어 있다. 강의실에서 교수를 만날 때마다 학생들은 순수하게 개인의 선물이라 할 사상을 나누어 받는다."
_헬렌 니어링,『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보리
- 사각공간(思覺空間)은 작가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지양하는 편이다. 가급적 책과 직접! 만날 기회 마련에 무게를 두는 편. 지향하고 권장하느니 책으로 만나는 쪽이란 얘기. 왜냐하면 1:多의 강연식 행사(이것도 중하다. 중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이미 여러 곳에서 하고 있으니 굳이 사각공간까지 나서서 보탤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로는 저자와는 직접 대면할지 몰라도 사고 활동은 수동적이기 십상이다. 유명세가 빚은 권위에 짓눌린 청중으로 박수-기계로나 화할 뿐. 일방으로 흐르는 정보 전달 체계에 대화가 끼어들 틈은 없다. 물론 대화를 할 요량되지 않으니 우선 들어야 하지 않겠나 할 수 있다. 그도 옳다. 그러니 직접 만나 사고 회로를 적극 돌리며 대화하시라는 것!! 독서야말로 '대화'이며 '끝까지 듣는 훈련'이라 여러 차례 이곳에도 남긴 바 있는데 이게 뭐 별스러운 게 아니다. 시선이 축자逐字 하는 동시에 자기 내면에서 그리고 머릿속에서 재생되느니 저자의 목소리(물론 실제 목소리는 아니다). 직·간접 경험으로 안다고 여기는 것들이 이 목소리에 반응, 불려 나와 함께 어우러지며 논다(이렇게 놀이터가 들어서는 때에라야 '호모 루덴스' 됨이고). 그러다 생경한 녀석과 맞닥뜨리기도 하고. 그놈 알고파 호구 조사하듯 탐색探索하니 갖가지 자기만의 주석이 주렁주렁. 이런 일 거듭하니 DB로 확장 구축되고. 이렇게 밝히어 그 면면面面을 트니 무지無知에서 모르는 제 처지를 가늠하면서부터 무엇을 모르는지를 구분은 하게 되는 부지不知로 시프트. 그러면서 점점 가닿아 거머쥐니 확연確然. 습관 되니 대화 그러니까 읽기를 잠시 멈추고, 사색思索(≒ 구축한 제 DB 검색檢索)으로 알아가니 굳이 '인지+감수성' 운운하지 않아도 절로 자라게 마련. 이 모든 프로세스, 누가 주도하나? 읽는 이 본인이 주도한다. 이런 게 '자기 주도'의 실체!! 이게 뭐 학원 등에서 전수받아 장착하는 테크닉이 아닌 것. 저희들도 모르고 경험한 바 없어, 막연하게 어림할 뿐인 걸 상품처럼 팔아치우는 데에 현혹되니 이 나라 사교육이 시장으로 이처럼 비대해진 것(정말이지 도처에 '외식外飾' 일삼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일세 그랴 ~~; 고마 하소, 마이 드셨다 아입니까?!). 독서+문화 장려이든 문화 활성화이든 요는 창발적 주체가 자발적으로 제 꼴에 부합하는 값 이상으로 노느냐가 관건!! 하면 가성비로도 이편이 백번 낫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데 치중하니 귀한 혈세를 재원으로 하는 사업비가 엄한 곳으로 흐른다. 대체로 소위 PR이라는 포장 관련 업종만 배를 불리는 기奇현상을 초래하고 마는 것. 기획에 부합하는 내실 다지는 형태로 쓰고파도 이건 홍보/광고 아니면 무슨 기자재 대여 등에나 소요. 이게 뭔가 뒤바뀐 형국이라 생각지 못한다기보다 고치려니 부대낌 만만찮아 관행이라는 관성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겠다 싶기도 하다만.. 내쪽에선 그저 갑x답할 따름;;
- 당초 이 '오디션'과도 같은 서점/책방 간 경쟁이 체제로 굳어지는 듯싶어 좀 그렇더라는 말씀, 책방 나비날다 대표분께 들은 바 있다. 들을 때에는 앞서도 언급했듯 불가피한 상황 서로 모르지 않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겼지만. 갈수록 젖혀두기 어려운 문제로 눈앞에 알짱대니 이거야 원;; 공모에 첨부된 신청서 살피니, 헛웃음 흘리게 되는 이 상황. 하아 정말이지 이게 다 무슨 하하하하핳 ~ 자생自生이어도 육성育成의 근간인 토양이 이러하니 여럿의 관심 또한 일본산日本産 『지적 자본론』 등 수입에나 열 올리고 '츠타야' 식을 조명하는 편으로 기울지. --+
너는 왜 소방관이 되었는가. 나는 내 속에서 돋아나는 그런 질문에 늘 대답하지 못한다. 삶 속의 어떤 사태는 설명이나 이유와는 애초에 무관한 것이어서 그 앞에 '왜'를 붙여서 의문문을 만들 수는 없을 터인데 아마도 '너는 왜 소방관이 되었는가?'라는 질문 따위가 그러하리라. 인간의 생애가 어떤 필연성 위에 세워지는 것이라고는 이제, 말할 수 없다. 나는 사십이 넘은 것이다.
_김훈,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중
- 아아 그래요 뭐. 사십 넘은 소위 '꼰대'로 이 동네에 자리한 여럿 가운데 한 '아재'의 푸념일 따름. 뭐 그런 걸로 해두십시다.
나는 그를 내 앞에 세워두고 그의 신상기록카드를 집어들어 읽었다. (…) 동산과 부동산의 액수를 쓰는 난에는 각각 한자로 '別無'라고 적혀져 있었다. 그 한자는 획에 내지르는 힘이 빠진 엉거주춤한 글자로 그의 무산(無産)을 의심할 수 없이 확실히 보증해주었다. 그의 이력은 스물다섯에 제대해서 서른살에 소방서에 들어올 때까지의 육 년을 건너뛰고 있었다.
(…)
"면허가 있는데 왜 중기 일을 그만두었나?"
"면허가 취소됐습니다. 회상에서 쫓겨났지요. 아니 내 발로 걸어나왔습니다."
"말이 어렵군"
"저도 잘 설명하기가 어렵군요."
생판 처음 대면하는 남이 밥을 벌어야 하는 일과 조직의 상급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삶의 내용과 궤적을 고백해야 하는 절차의 수모스러움이 장철민의 표정에 떠올랐다. (…) 나는 그의 중기면허취소에 관하여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
_같은 책
- "말이 어렵군", "저도 잘 설명하기가 어렵군요" 크으 ~ >.< 그야말로 압권! 쐬주 땡기는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뭐랄까, 염화拈華/미소微笑의 이심전심以心傳心 현장이 각박하게 변모한 듯싶어 좀 서글프긴 해도. 하여도 '절차의 수모스러움'을 가늠할 정도의 섬세라면..
- 그러나 누구나 거친 '장철민'과 다를 바 없던 시절 상사 아니어도 저런 어른 좀처럼 마주하지 못했다. 하기사 이제는 몰라본 당시의 이 내 좁은 속내야말로 문제였음을 겨우 인지하게 된 형편이지만. 아무튼 저렇게 저간의 사정을 꿰뚫고도 겉으로 표하지 않는 배려, 또 이를 베푼다는 의식조차 여읜 채로 실천하는 작중 상관과 비슷한 혹은 그 이상의 연배건만. 나는 어떠한가를 질문을 애써 누르고 있지는 않은지. 가능한 솔직하자고 다지려니 담백하게 꾸리지 않을 수 없는 삶이어서 소박에 절로 근접하게 되는 것 같긴 하다. 아, 과몰입 해부렀네 ㅡㅡ;;
- 서점/책방에서 책을 매개로 독자/서점주(책방지기)/저자가 만나 소환하는 현장은 이런 면면일 터이다. 어림하면서도 온전하게 형언해낼 수 없는 상황들. 지나친 어느 때 그 장소─이제는 함께이지 못한 인연이 자리한 그곳─로 슬립이든 역으로, 지금 이때 이 자리로 불러내든 하여 다시 체험하며 당시의 오해를 이해의 영역으로 들여 쓰다듬고 안아주는 것(딱히 떠오르는 바 없다면, 영화 《소스 코드》를 참고해도 좋을 듯. 연상하면 수월하게 가닿지 싶다). 이를 직·간접 체험하는 場으로 서점/책방이, 점주이자 지기는 長으로 조력. 이것인데 말이지. 이를 고갱이로 취하는 기획이야 코드이자 격으로써의 틀거리 곧 프레임에 불과. 실實은 교외별전이건만 하여도 팔리우기(선정되기) 위해 이를 형언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 곤혹스럽지. 아무렴. 이럴 때 보면 관官은 '밥벌이의 지겨움'을 토로하게 만드는 '근로감독관' 같단 말이지. ㅎㅅ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