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연예계/체육계 불거진 학교폭력 관련 가해/피해는 '입장 차이'가 아니건만 흐른 세월만큼 규명 어려워 '논란'으로 치부되니 실제 피해 당사자라면 억울하기 그지없겠다. 더하여 인 생각, 글로 옮기며 거듭 새겨본다.
'죄짓지 말고 살아야', 옳다. 이것이 최선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과거, 이미 지나버린 시간을 다시 살아낼 방법은 없다. 돌이킬 수 없다. 그러니 차선이라면 자신이 저지른 바, 지은 죄를 직시하고 그 과오로부터 접어든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려는 개선이겠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의지로만 되는 일도 아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그러니까 이미 죽은 자와 다를 바 없이 멋대로 어그러진 형편 그대로,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편이 쉽다. 포기라면 살아도 산 게 아닌 느낌을 자아내는 마음의 감각기관을 일제히 끄는 것. 비참의 지경에 처하길 스스로 택하는 것. 이러한 유폐를 도피로 택하는 이의 불행은 그러나 본인으로 국한되질 않으니 다시 문제. 문제인 줄 알아도 폐 되는 바를 피할 수 없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더 큰 화를 초래하게 마련. 그러니 포기야말로 자승자박의 극단이겠다(그러니 할 수 있다면 아니 하지 않을 수 없는, 임해야 마땅한 일이라면 저마다 자기 지옥을 짊어진 채로 다를 바 없는 상대를, 서로 포기 않는 것). 새로운 길로 나아가려는 자신의 발목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과거의 자신이 붙잡고 있는 형국이기에. 몸서리에서 몸부림으로의 전환, 곧 자신이 얼마나 잘못하였는가를 직시하며 몸서리칠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다시 거듭하지 않겠다는 몸부림이 가능하고 그제야 겨우 새로이 내디딜 수 있음이다. 이 격전을 치르고서야, 이 고통을 몸에 새기고서야, 제 잘못으로 피해자가 얼마나 괴로웠을지를, 어떠한 지경에 처했었는지를 그나마 어림할 수 있게 되는 것.
다행이라면 한번 이렇게 돌이키기 시작한 사람은, 철면피로 지속 가능하기 어렵다는 것. 뼈저린 반성으로 비로소 실감하게 되는 고통이 저를 그 피해자 앞으로 향하게 하여 무릎 꿇릴 것이므로. 제가 처한 고통에서의 구원이 바로 그 용서에 있음을 깨닫기에.
용서를 구할 수 있다면 그래도 다행. 이조차 피해자 부재 등의 사유로 불가능하게 되면 가해 당사자는, 여생을 제가 지은 업業의 화택火宅에 거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옥地獄의 불길을 고스란히 감내하며, 용서받지 못한 잘못을 선善으로 탈바꿈하여 끝끝내 지켜야 한다. 이것이 개과천선改過遷善, 곧 갚을 수 없는 불가능을 마음에 품고 가능한 형편에서 모든 힘을 다하여 선善을 돋우어 흐르게 하는 것.
'머리 검은 짐승 거두지 말라'거나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옛말과 속설은 그래서,
① 선善의 좁은 길로 새로 들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사전에 일러 경계토록 함이고
② 이미 저지른 이에게는 고칠 수 없는 제 잘못을 직시하기를 죽는 그날까지 그리고 그릇된 제 면모를 목숨 다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다듬어야 함을 역설함이다.
해서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엎질러 다시 담을 수는 없어도 그 물이 스민 자리에 씨알 틔워 자라도록 하는 기능적 역할도 수행하게 됨이다. 또 '상처 입은 치유자'를 입말로 지어 뱉는다고 당장 그리 될 수 없음과 다르지 않고. 그래서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¹ 하늘의 뜻이라는 '그 나라 그 의義'²가 '땅에서도 이루 어지'³도록 노력할 따름.
¹개신교 성경 <로마서> 3장 10절
²개신교 성경 <마태서> 6장 33절
³개신교 성경 <마태서> 6장 10절
* 백 년을 채 넘기지 못하면서 천년 근심, 자손만대 호의호식 위해 당장의 적대를 불사하는 가련한 인류야말로 '조삼모사朝三暮四' 지경의 전형이지 않을까. '우리가 우리에게 지은 죄를 사함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개신교 성경 <마태서> 6장 12절) 달라는 의미를 새로이 새겨볼 일이다. 들리는 그대로 받아넘기면 저 자신, 용서의 권위를 행사하는 이로 새기기 쉽지만 의를 새길라치면 타인에게 지옥 되어 저지른 과오를 떠올리게 마련. 스스로 속속들이 파헤쳐 낱낱의 잘못을 먼저 직시. 용서가 실체로 행사되기 위한 조건. 절-대자인 형편에 설 수 없는 서로가 서로를 품기 위한 전제. 때문에 우리 안에 속한 권위는 아니지만 행사될 수 있고, 용서가 마련한 터에 비로소 사랑이 깃들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