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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공간 Mar 28. 2021

되'고프다'지만, 실상 불리'고픈' 보이'고픈' 것이면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자고 새면
이변을 꿈꾸면서
나는 어느 날이나
무사하기를 바랬다

_임화,詩 <자고 새면> 中


 '이게 미친 게 아니면 무어냐'는 반문이야말로 본의에 가깝지 싶은데 요사인 시쳇말로 '국룰'로 화한 게 아닌지. 밖으로는 그 무슨 혁명이라도 개벽 급으로 일어야 마땅한 것처럼 굴다가도, 타산打算 후 조금이라도 제게 손해될 것 같으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것처럼 돌변. 자기 안녕을 구하며 벼리는 바늘로는 아무래도 낭중지추囊中之錐 실격.




'문화산업'이라는 용어의 모호성을 보자. 만약 '산업'이라는 단어가 문화 생산이 근대 문명을 관통하며 얼마나 멀리까지 영향력을 확장했는지를 보여주는 기준이라면, 이 단어는 또한 이런 일을 하기 위한 핵심 동기가 결코 문화적인 것이 아님을 환기하기도 한다. (…) 옛 산업 세계가 거친 말투로 군림했다면 현재의 자본주의는 진화해 문화적 얼굴로 바뀌었다. (…) 전 세계적인 현상인 대학의 쇠퇴야말로 자본주의가 한때 자신의 반대말('문화')로 여겨졌던 것을 자신에게 동화시키는데 전념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사례다. (…) 인문적 비판의 핵심부로서 수세기에 걸친 전통을 가진 대학은 현재 야만적일 만큼 속물적인 관리 이데올로기의 지배 아래 놓인 사이비 자본주의 기업으로 전환되면서 사라지는 중이다. (…) 이제 대부분의 대학은, 가치란 주로 부동산의 문제라고 여기는 테크노크라트들의 손아귀 속에 있다.

_테리 이글턴, 『문화란 무엇인가』中


 '산업'의 등장과 함께 결부지어진 공부와 입신양명. 본격 '학생學生' 실종 지경 돌입. '삶[生]'에서 '배움[學]'을 소외시키니, 자본 서열에 끼어들 스펙으로나 기능할 뿐인 학교 엠블럼 거머쥐자고 입·출력 기계-되기 자처하는 형국. 팔리울 스킬 연마도를 평가하는 학제가 범용汎用되어 스민 사회 속에서 소위 '문화文化'는, 이미 '문文'으로 '화化'하고 만 박제를 모사한 카피본 양산에 그치기일쑤. 충족되지 못한 경험, 결핍 보상은 관람 등 유사체험 소비활동으로그러니 삶 가운데 자리하지 못하고 겉돌게 마련. 때문에 '산업'만 양수겸장兩手兼將으로 득得. 그래서 노랫말처럼 '짜가(*가짜)가 판 친다'. '짜고 치는', 그러니까 삶과 유리된 입·출력 기계의 득세를 사실상 '짠' 것과 마찬가지로 조력하는 형국 되어버림. 물론 본의는 아니지만. 따라서 자승자박自繩自縛 지경의 해解라면, 결자結者인 제 몫. 되'고픈'으로 가늠하며 구축 내지 복원할 상像이라면, 먼저는 저라고 여기는 경내에 갇히는 바 없고, 울타리에 걸리는 바 없으며, 밖으로 좌우되는 바 없겠다. 그제야 '이름 없이 빛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며 섬기'는 게 가능하게 됨이고. 그러나 이와 달리 주도권이 자기 바깥인 형편이어서 좌지우지 휘둘리고 흔들리는 욕망의 불꽃이야말로, 어렴풋한 신기루의 실상. 그저 보이'고파' 불리'고픈' 제 결핍을 관계의 도착倒錯 통해 만인에게서 추수, 충족하려려는 데에 혈안. 때문에 되'고픈' 상을 저마다의 속내에서 불러 일으키는 '기신起信'은커녕 외려 반대로 저를 본本으로 삼는 소비만 부추길 따름. 우상偶像이 초래하는 문제는 제 태생적 한계를 바탕으로 삼는 그릇된 인도에 있겠다. 집중될 중심을 열망하는 중에 고착되느니 인물 중심 구도이고, 이 프레임 안쪽 무대에 오르느니 각계 모오든 분야의 아이돌. 식상하다.




 어차피 연기 불가분이면, 바울처럼 성역에 든 모델이 필요하지 싶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바로 제 과거를 구별 지어 의식하면서 그 나라 그 의를 실천하는데 올-인. 와중에도 번번이 침노 거듭하니 쟁투의 전장戰場된 육신 벗을 날, 학수고대(기쁘게 맞을 듯). 포섭 거부하며 세간을 누비는 아나키스트의 거리두기로도 읽힌다. 자기 결핍이 대승의 해탈로 극복되는 서사, 부처는 이것이야말로 인간種으로 가능한 유일무이한 기획임을 보인 게 아닐지. 어른-되기란 역시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고픈' 층위를 벗어나는 탈주에 있겠다. 영혼의 유년기를 넘어서려는 몸부림, 부수고 나아가길 지속하는 파破:란卵이야말로 문화文化일지 모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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