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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공간 May 07. 2021

"글의 沈默"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아무나 글을 쓰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주워온 지식들로 길고 긴 논리를 편다. 천직의 고행을 거치지 않고도, 많은 목소리들이, 무거운 말들이 도처에 가득하고, 숱하고 낯선 이름들이 글과 사색의 평등을 외치며 진열된다. 정성스러운 종이 위에 말 없는 장인이 깎은 고결한 활자들이 조심스럽게 찍혀지던 시대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가? (…) 쉽사리 쓰고, 쉽사리 빨리 읽고 쉽사리 버린다. 재미있는 이야기, 목소리가 높은 주장, 무겁고 난해한 증명, 재치 있는 경구, 엄숙한 교훈은 많으나 <아름다운 글>은 드물다.

 잠 못 이루는 밤이 아니더라도, 목적없이 읽고 싶은 한두 페이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수많은 책들을 꺼내서 쌓기만 하는 고독한 밤을 어떤 사람들은 알 것이다. 지식을 넓히거나 지혜를 얻거나 교훈을 찾는 따위의 목적들마저 잠재워지는 고요한 시간, 우리가 막연히 읽고 싶은 글, 천천히 되풀이하여, 그리고 문득 몽상에 잠기기도 하면서, 다시 읽고 싶은 글 몇 페이지란 어떤 것일까?

 겨울 숲속의 나무들처럼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서서 이따금씩만 바람소리를 떠나 보내고 그리고는 다시 고요해지는 단정한 문장들. 그 문장들이 끝나면 문득 어둠이거나 無. 그리고 무에서 또 하나의 겨울 나무 같은 문장이 가만히 일어선다. 그런 글 속에 분명하고 단정하게 찍힌 구두점.

 그 뒤에 오는 적막함, 혹은 환청, 돌연한 향기, 그리고는 어둠, 혹은 무. 그 속을 천천히 거닐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 散文集을 번역했다. 그러나 전혀 결이 다른 言語로 쓰여진 말만이 아니라 그 말들이 더욱 감동적으로 만드는 침묵을 어떻게 옮기면 좋단 말인가?

_장 그르니에의 『섬』 역자 김화영 교수의 '글의 침묵' 일부 발췌


 해당 잡문집을 우리말로 옮겨 내기까지, 역자 나름의 심경을 밝힌 내용이라 여겨도 무방하겠다. 내 지닌 판본은, 민음사 1980년12월10일 인쇄 후 1984년 4판. 그로부터 근30년 세월 흐른 셈.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과거 중첩인 듯싶은 요즘. 그래봐야 정체停滯 아니면 퇴보 지경이란 얘기인데 어느 편으로든 개운치 않은, 현실. 그렇다고 '아무나'를 대신하여 '누구든'으로 싸잡아 힐난하는 내용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해를 기반 삼아 말글 교호 가능인 부류가 따로 있노란 식의 주장은 더더욱 아니고. 누구나 있고, 그럴 수 있어야 바람직하다. 옳다. 다만 입─바깥으로 나서길 좋아하는 말[言]의 고삐를 틀어쥐는─'조심'과 그로써 빚게 마련인 '고결'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환기? 이렇게 읽으면 어떨까 싶다. 이름값 탐하는 조급함으로 '고행' 간과. 때문에 무게를 얻지 못하고 동동 뜰 뿐인 것들로, 남이 터득하여 구축한 나름의 체계, 흉내 급급이니 구성 빈약/조악하게 마련.


 결국 '<아름다운 글>'은 다른 누구 아닌 제 심연 탐사에서 비롯하는 게 아닐지.

 이하 그르니에의 『섬』가운데 '공의 매혹' 본문 일부를 발췌해둔다. 우리말로 옮겨진 내용다시 옮기면서도 절로 끄덕여지는 고개(그러니 원문 번역 시에는 어땠을까. 해서 앞서처럼 남기게 됨이고).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 이로써 가닿으니 저마다의 오롯함 아닐지.


 사람이 자기의 주위에 있는 것들을 무시해 버리고 어떤 중립적인 영역 속에 담을 쌓고 들어앉아서 고립되거나 보호받을 수는 있다. 그것은 즉 자신을 몹시 사랑한다는 뜻이며 이기주의를 통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신을 세상만사 어느 것과도 다를 바 없는 높이에 두고 생각하며 세상의 텅 비어있음을 느끼는 경우라면 삶을 거쳐가는 갖가지 자질구레한 일들에 혐오감을 느낄 소지를 충분히 갖추는 셈이다. 한번의 상처쯤이야 그래도 견딜 수 있고 운명이라 여기고 체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날이면 날마다 바늘로 꼭꼭 찔리는 것 같은 상태야 참을 길이 없다.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삶은 비극적인 것이다.
 바싹 가까이에서 보면 삶은 터무니없을 만큼 치사스럽다.

  삶을 살아가노라면 자연히 바로 그 삶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절대로 그런 것 따위는 느끼지 않고 지냈으면 싪었던 감정들 속으로 빠져들기 마련이다. 이것이 저것보다 더 낫다고 여겨지는 때도 있다. <이것>과 <저것>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만 되는 경우도 있다. 아니라고 말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 그렇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야말로 고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자신도 모르게 <無心>의 순간에서 <선택>의 순간으로 옮아가게 된다. 나는 유희에 말려들고 덧없는 것 속에서 거기엔 있지도 않은 절대를 찾는다. 입을 다물고 무시해 버리지는 않고 나는 마음 속에 소용돌이를 계속 불러일으키고 있다. 상표가 서로 다른 두 자루의 펜을 놓고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실로 참혹하다. 가장 좋은 것이 반드시 가장 비싼 것은 아닐 터이니 말이다.

 가장 못한 것이 오직 다르다는 이유로 널리 쓰일 수도 있다. 가장 좋은 것도 없고 가장 못한 것도 없다. 이때에 좋은 것이 있고 저때에 좋은 것이 있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란 없음을 나도 잘 알지만 이 세상에 일단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이 세상 속에 일단 얼굴을 내밀기로 작정만 하면, 우리는 더 할 수 없을 만큼 기묘한 악마의 유혹을 받게 된다. 목숨이 붙어 있는데 왜 안 살아? 왜 제일 좋은 걸 안 골라? 하고 귀에다 속살거리는 그 악마 말이다. 이렇게 되면 곧 뜀박질을 하고 여행을 떠나고…… 그러나 <이제 막> 욕망이 만족되려고 하는 순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인가.

 空의 매혹이 뜀박질로 인도하게 되고, 우리가 한 발을 딛고 뛰듯 껑충껑충 이것저것에로 뛰어가게 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공포심과 매혹이 한데 섞인다. ─ 앞으로 다가서면서도 (동시에 도망쳐)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그칠 사이 없는 움직임의 대가를 받는 날이 찾아오는 것이니, 말 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너기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리게 된다. 문득 空의 자리에 충만이 들어앉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_장 그르니에, 『섬』 가운데 <空의 매혹> 일부 발췌*



*블라인드 페이지. 47일차 내용(아는 분 적잖지 싶어 예서 그냥 밝혀둠).

https://project100.kakao.com/project/10341/activity?daily=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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