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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공간 Jun 05. 2021

"작은 뜻으로 한 것을 세상에서 크게 생각"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https://project100.kakao.com/project/10341/activity?daily=76

블라인드 페이지. 76일차


【블라인드 페이지】- 76일차


서로 남을 위한다고 여기면 책망을 하게 되나 자신을 위한다고 생각하면 일이 잘 되어 간다. 그러므로 부자간에도 혹 원망하고 꾸짖으며 사람을 사서 농사 짓는 자는 맛있는 국을 내놓게 된다. 그 설명은 문공이 미리 선언해 둔 일과 구천이 여황을 비난한 이야기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므로 환공은 채에 대하여 노여움을 숨기고 초(楚)를 일부러 쳤으며 오기는 상처가 나은 후의 보답을 계산하여 고름을 빨았던 것이다. 또한 선왕을 칭송하는 시나 종과 솥에 새긴 명문은 모두가 파오산의 발자국이며 화산의 바둑판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선왕이 기대하였던 것은 실제 이득이며 사용한 것은 힘이었다. 사사를 지을 때의 속담은 자신(진 문공)을 위한 변명의 말이다. 학자들을 시켜 선왕에 대하여 막연히 (기리는 말을) 하게 한다면 아마도 오늘에 맞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고칠 수 없는 일은 마치 정(鄭)의 시골 사람이 수레멍에를 손에 든 이야기와 위(衛) 사람이 주살 쏘는 이를 거들어준 이야기와 복자의 처가 해진 바지를 만든 이야기와 그리고 연소자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선왕의 말 가운데 작은 뜻으로 한 것을 세상에서 크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는지 큰 뜻으로 한 것을 세상에서 작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는지는 반드시 알지 못한다. 그 설명은 송(宋) 사람이 글을 잘못 이해한 이야기와 양(梁) 사람이 기록을 잘못 읽은 이야기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므로 선왕 때 영(郢) 사람의 편지가 있었는데 후세에 그것을 달리 해석한 연(燕) 사람이 많았다. 도대체 실제 나라일에 맞추지 않고 선왕만을 모범으로 꾀하려는 것은 모두 집에 돌아가서 발을 잰 잣대를 찾은 자와 마찬가지이다.

 _본문 일부 발췌


"작은 뜻으로 한 것을 세상에서 크게 생각" → 실리 기대하고 힘을 부리는 지나지 않는 데에 과대평가. 이르자면 허명(虛名) 전하기 일쑤인 요즘 세상. 와중에도 세(勢)를 이루는 유명(有名)만 탐하니, 제 머리로 곱씹고 가슴으로 내리는 과정 생략, 이 과정에 공들여 겪어낸 끝에 건져올린 타자의 말, 글, 생각 훔쳐다 저를 뽐내는 데 이용하기에 급급. '자기 복제'를 넘어서 주변 지인과 일상 간 대화 복붙(ctrl + C,V) 등 죄다 생산 후 제 이름으로 추수하려는 목적 때문*. 하여 소위 환금을 척도로 하는 인기, 대중 영합인 지경될 밖에. 그런데 배움이 바탕일 수밖에 없는 산물이 이런 따위라면 이것이야말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함과 다르지 않겠고. 이런 무책임을 자행하면서도 자각 없다면(혹은 고의 회피라면) '연자맷돌 목에 달아 수장시킴'과 다르지 않은 행위로, 감당 못할 무게의 죄책. 제정신 찾아야 마땅.


'토사구팽' 술수도 부릴 능력이 받쳐주는 때 가능. 다만 그 능력이라는 것이 자본력에 치우치니 도처에 갑질 위시 꼴값 넘치는 것. 산업예비군 넘치는 시점이 특히, 팽 당할지 모를 두려움 안고서도 개처럼 부려달라 들어서지 않을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리는 것. 때문에 '복지국가'야말로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꾸리기 위한 최소한의 보루라면 보루. 이런 장치를 제도로 굳혀 이 위에 삶을 축조하는 것이야말로 또 수다한 생물종 가운데 인간을 변별하는 특징으로 소위 '정의(justice)' 아닐지.

 그런데 보편이든 특정이든 복지를 수혜의 차이로 받아들이고 차별로 호도하는 데에 휩쓸리어, 욕망 추구 방해하는 규제를 완화 내지 철폐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정의 아니겠나 따위의 논조에 놀아나는 것이야말로 말초 지경의 원생물로의 급전직하를 자발적으로 추구하는 게 아닌가.


 근시안으로 전체를 조망하겠다, 시쳇말로 깝치는 능구렁이들이 괜히 '오월동주'로 지속가능한 게 아니지. '노예의 도덕'을 내면화한 '수인의 딜레마' vs 미꾸라지들의 '오월동주', 양극의 바퀴로 구르는 역사의 현장. 저만 위하자고 덤비는 소수의 능구렁이, 미꾸라지가 이길 수밖에 없는 구조. 하면 대승(大乘)의 바퀴 굴리자면 좋은(?) 분위기 깬다고 원성 사는 걸 두려워할 게 아니라 외려 논란될까 두려운 나머지 감추기 바쁜 그 여지(餘地)를 계속해서 폭로하는 일선에 서야. 오독(誤讀) 나아가 자의적 해석 낳는 지경을 의(義)에 상시 접속 유지케 해야. 이로써 동기화 이루는 때 드러나는 '일반의지'가 아니면 '유니콘 리더십' 같은 판타지존에서 존재하는 그 능력(?), 실상 자본 바탕 꼴값을 멈추긴 곤란.


♨ 일엽편주 내(內) 각주구검이 물 위에 긋는 흔적은 돌이키면 없이 됨과 같으나 동기화 이룬 일반의지의 궤적, 그것이 일으킨 물살은 반드시 변화 구현!! 무명씨(無名氏)의 운명愛(amor-fati)야말로 진정 'nobody-되기' 실천!!!


*서점주는 물론 북-튜버 활동 끝에 출판으로 이어지기도. 이런 조명에 고파, 데뷔 목적 삼고 서점이든 북튜버든 활동무대를 자발적으로 조성하는 건 이제 흔한 일. 해당 활동에 앞장인 형편의 사람이 최근이라면 최근 도서 출시했던 모양. 누군가 내용 일부 발췌해둔 걸 우연히 목격. 내용인즉 독서, 저자와의 대화가 골자. 특별할 건 없는 내용. 나로서도 자영으로 꾸리기 전후 수차례 언급했던 바. 그런데 정말 스스로 닿은 끝에 그리 생각했더라면 이전 생산된 콘텐츠에도 언급 있었을 것. 또 그를 표현함에 있어서도 자기 만의 언어랄까, 표현이 따르게 마련. 그런데 '경청'? 글쎄올시다. 아마도 누군가 올려둔 글을 탐하여 임의 차용, 이를 감추려니 다른 표현을 해야겠고 때문에 '경청'으로 바뀌지 않았을지. '경청'이라 표현하게 된 건, 그의 의식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점유하고 있던 표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출력. 이는 물론 수다하게 팔린 자기계발인지 개발인지 부류의 도서 『경청』에서 옮아왔을 터. 스테디로 인구에 회자 이상 다양한 경로로 노출된 바가 그대로 무의식에 스며 있던 것이고. 비판적 독서를 통한 DB가 내면에 구축된 바 없이 타자의 사고를 훔쳐다 바꾸려니 그리 대체되었을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세(勢)를 이룬 마당이어서 판매 호조인 셈이니 나로서는 더더욱 글쎄올시다 ~ 양심과 엿을 바꾸는 데 주저함 없는 치들로 자본 종속 지경의 출판이라면 뭐 이미 소금을 주장한들 그 맛 상실 자초인 것 아닌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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