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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공간 Jun 13. 2021

"그들은 과연 삶의 무의미 성에 대해 분노한 적 있던가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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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페이지. 82일차

【블라인드 페이지】- 82일차


구토는 우리 몸이 보여주는 즉각적인 거부의 징후다. 왜 거부하는가. 우리의 위장이 아직 썩거나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썩을 수 있는 게 생선이나 참외뿐이랴. 인간도 썩을 수 있고 세상 자체도 부패할 수 있는 것이다. 썩은 음식물을 위장이 거부하듯 부패한 세상에는 우리의 의식이 저항한다.

사르트르의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런 종류의 구토다. 로캉탱 (…) 단조로운 일상에서 그가 한 번씩 느끼는 구토는 소설 전체에 산만하게 흩어진 에피소드들을 하나의 주제로 꿰어낸다.

그가 그 도시의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 회랑에는 거대한 초상화들이 걸려 있었다. 대부분 의사 · 법률가 · 상인 · 정치가들인 그들은 말하자면 이 도시가 배출한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명예와 돈과 권력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생애에 걸맞게 그들의 표정은 모두 근엄하고 교만했다.

살아서 온갖 권리를 독점했고 죽어서는 거대한 초상화로 남겨진 그들, 망자이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부르주아다. 역사 혹은 귀감의 이름으로 이들의 권력은 아직도 그 퍼런 서슬을 잃지 않는다. 인생에 대해서, 일에 대해서, 부귀에 대해서, 명령에 대해서, 존경에 대해서, 그리고 마침내는 영원에 대해서까지.

하지만 그들은 과연 삶의 무의미성에 대해 분노한 적이 있던가. 그들의 존재가 어처구니없는 우연 속에 그냥 무작정 내동댕이쳐져 있다는 사실로 하여 독한 회의의 술잔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그들은 숙명의 굴레처럼 주어지는 삶의 그 숱한 통제 장치들에 대해 처절한 저항과 반역의 몸부림을 보여준 적이 있던가. 존재의 이해할 수 없는 저 잉여성에 대해 구토해본 적이 있던가.

로캉탱이 보기에 그들은 주어진 질서에 노예처럼 순응하고서도 고매한 표정으로 박물관의 한쪽 벽을 점함으로써 역사 속에 남겨진 '더러운 새끼들' 이다.

박물관을 빠져나오면서 로캉탱은 그 속물들에게 안녕을 고하며 구토한다. "나는 돌아다봤다. 작은 그림의 성당 속의 한없이 고운 백합이여, 안녕, 우리의 자존심이여, 우리의 존재 이유여, 안녕, '더러운 새끼들'이여 안녕."

_본문 일부 발췌


☞ 다양한 이를 만나 이야기 나누니 서적 유통상으로 이 업業이 주는 유익. 온/오프 이런저런 행사 간 젊은 세대는 물론이거니와 동년배인 40대 중후반(본인 방년47歲 '_') 이상 연령대 여러분과도 뵙곤 하니. 다만 동년배 이상 장성한 세대 여러분이 젊은 세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공통분모격 정서가 자리한 듯싶을 정도. 마치 공유라도 한 것처럼. 불행, 그래서 안 됐다든지 짠하다든지. 그럴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주관을 내비치는데 전혀 주저함 없으니 나로서는 이런 태도가 놀라울 따름이긴 하다. 그러니까 동정받아 마땅한, 시혜施惠의 대상으로 여기는 게 배경에 자리한 때문일 텐데. 당사자인 젊은 세대 역시 그리 생각할까? 당장 내 머리로도 '글쎄올시다' 물음표 띄우며 혀를 차게 되는데. 훔..


☞☞ 개중 혹자는 자기 세대가 지나온 날들을 떠올리며 성실을 강조, 상대적으로 노력이 부족하지 않은가 우려도 표한다. 일견 옳다. 확실히 개개인으로야 그러한 차이가 실상 차이를 빚기도 할 터. 다만 그리 가늠하자면 그 잣대, (먼저) 자신에게 돌려 성찰 과정 거쳐야 마땅하지 않나 싶다. 이를테면 일생 어느 한때의 노력으로 취한 성과를 평생에 누리고 있지는 않은지, 계속해서 누리려 하고 있지나 않은지. 이에 대해 무자각인 형편이야말로 다름 아닌 게으름. 이 게으름이 가능한 여유를 생각지 않고 그저 권태를 이기겠다고 말초 지경으로 내리닫는 욕망 추구 내지는 누리는 것을 전시하며 행복을 과포장하는 속물 지향. 이런 게 기득권의 실체 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세대야 말로 불신의 근원이자 갈등의 촉매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저 서민일 뿐이라는 의식. 기득권의 실체가 뭐 별개 아니다. 도처에 쁘띠-부르주아들, 이 '평범한 악'의 민낯들 같으니라고 ㅋㅋㅋ


 '장유유서'가 예로 자리하는 데엔 어른으로서 어른다움이 실재實在할 때이다. 섬기지 말라 해도 섬긴다. 자본도 힘이라고 자본력資本力 운운 꼴값에도 흔들리는 바 없는 어른. 책무를 소명으로 실천하는 어른. 실재하는 힘 곧 실력實力이면 된다. 30대 야당 대표 당선이 그리 충격적으로 읽히진 않는다. PC에 갇힌 공정이랄까 자본력과 짝하는 능력주의 등 한계는 여실하여서.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꼰대진보-프레임' 식의 견해와는 거리를 두고자 한다. 무늬만 진보 아닌가 통렬한 반성, 우선이어야 하지 않을지.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_개신교 성경 마태복음 7장 12절~14절


붙임. 1 이리 인용하면 금욕하란 것이냐 쌍심지 돋우는 치들 없지 않으니 부연하자면, '좁은 문/길'이라고 실제 좁은 것도 아니다. 장성한 세대가 불자 흉내 선(禪, zen)-스타일부터 팔자 좋게 미니멀리즘 경유하는 동안 소확행 또 최저시급 바탕 예산선 안에서 탕진잼 추구하는 젊은 세대를 염두에 두면 그리 어려운 미션은 아니지. 금욕 운운 앞세울 게 아니라 평소 과욕을 부리고 있지나 않은지를 먼저 살펴야 하잖나 싶다.


무어나 일을 맡겼으면 불이 버쩍 일게 해낼 팔팔한 젊은 사람들이다. 그렇건만 그들은 몸을 비비 꼬고 있다.
 아무 데도 용납치 못하는 사람들이다. (…) 레디메이드로 된 존재들이니 아무 때라도 저편에서 필요해야만 몇씩 사들여간다.

_채만식, 「레디메이드 인생」 中


붙임. 2 일본 애니 등 '사실 네겐 엄청난 포텐셜이!!' 따위 서사로(하지만 알고보면 유서 깊은 가문의 직계로 비기를 저도 모르게 전수받았다든지 '데우스 엑스 마키나' 급의 전형ㅋㅋㅋ), 이미 낙오/루져로 낙인찍어 놓고 희망고문 양산 말고 사회적 소신공양 못해 안달인 젊은층 등신불로 저를 주조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판을 깔고, 자리를 마련해야 마땅. 동정/시혜가 아니라.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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