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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공간 Nov 14. 2021

2X세기 '자기 소외'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서점일기 번외편


맑스가 짚은 '자기 소외', 골자는 부자유不自由.

곧 제게서[自] 말미암았지만[由] 그리 되었노라 이를 수 없는[不] 지경.

얼핏 아버지를 아버지라 이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비자발적 유구무언 처지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

물신物神으로 모셔선 아버지 자리에 앉힌 장본인, 다름 아닌 욕구 성찰 부재의 인류.

이렇게 제 머리 꼭대기에 올려놓은 자본에 의해 대상화된 인간 종種의 욕망.

그 아버지의 명命에 복종, 이로써 강화되느니 '자기 소외'.

실상 '우리가 우리에게 지은' 부조리이건만, 이렇게 전도된 상태를 당연 시 여김.

이로써 예속 관계는 배후로 은폐.


대표적으로 노동자.

인풋, 요소의 하나로 전락한 노동력.

제공은 하면서도 정작 생산 과정 간 피지배를 경험할 뿐인 이.

그래, 다름 아닌 노동자.

제 손 거친 아웃풋, 산물과도 무관無關.

오직 소비 통해서만 경험 가능 ← 반쪽짜리 관계 맺음.

제한된 주권 행사, 때문에 한계 주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소외'의 제한 상태를 문제 삼기보다

그저 소비를 연속하며 주권/주체 누리려는 열망. 이러한 욕구에만 충실.

때문에 회당 소비 규모 그리고 단락되는 바 없이 연속 가능한 소비 수준으로 서열화 불가피.

열망의 종착지, 소비 지속가능케 하는 전제로써의 부富 축적 ← 노골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


본래 인류, 자연과 대등하게 합合 도출 ← 이런 게 참다운 주체의 원형 아닐지.

하면 생산 과정 역시 다음과 같은 상태로 설명 가능.

곧, 육체/정신 융합 상태에서 비롯하는 노동력을 바탕으로 자연과 변증 구도 구현.

그러던 것이 기술 발달로 분업 가능한 체계 구축 → 효율 우선, 비약적 생산(성) 증대.

이를 가능케 한 '비교 우위' 내면화  육체를 따돌리는 정신 집약 등 노동력으로 인간 사이를 구별짓는 행위, 인간세에 결부.

'꿈'이니 '능력'이니 이르는 것들은 대체로 육체 노동과 무관無關한 형편에서 설정.

기피 결과 소위 3D(Dirty, dangerous and demeaning) 업종으로 수렴.

우열로 재편, 드러나는 관계로 갈葛 vs 등藤 구도 격화.

2X세기 '자기 소외', 곧 '자기 소외'의 극단에서 벌어지는 분열 양상.

실상 하나이지만 구별 지어진 상태의 일편/일면만 누리려는 욕망으로 첨예한 대립.

대표적으로 케어 받아 마땅한 나 vs 손절 불가피한 타자

을乙로 종사하는 동안 벌어들인 화폐를 소비하면서 갑甲질.

주체 경험의 왜곡된 망상으로 변질된 주권 행사, 결국 횡포에 불과할 뿐인 걸 주고받음.

여기에서 비롯하는 상처이건만 구조 변화 주도하지 못하고 응석받이로 퇴행.

소위 '감성팔이' 따위의 당의정 곧 위로/힐링 서사 소비. 이것이야말로 감정 소모.

휴지처럼 하루에도 수차례 휘갈긴 시답잖은 감상 나부랭이.

이를 사들이는 자체가 그이의 감정-쓰레기통임자처하는 것.

이처럼 기형 간 이뤄지는 거래를, 작가/독자 관계로 포장하여 확대/재생산.

이런 협잡을 성찰하지 않는 구조맹들이 가담 지속 → 공고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에 독립, 저로 오롯한 자유에의 열망은 파이어족 등으로 귀착.

고작 미립자로 축소 지향 중인 인간 종種이라니 얼마나 한심한가.

한없이 쪼그라드는 자아들의 플렉스 경쟁, 도토리 키재는 병림픽 구도로 수렴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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