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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공간 Nov 24. 2021

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 독후讀後/감感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일러두기.

이하 인용문은 모두 최시현, 『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발췌 페이지를 괄호 속에 표기하는 것으로 출전을 대신한다.


국가는 주택의 상품화 경향을 가속화하면서, 남성 가장의 권위와 권력을 전제로 하는 불평등한 가족제도 속에서 현모양처와 복부인이라는 한국적 인간형을 마치 상반된 인간형처럼 배치하고, 전통적 가치를 지키는 효부와 세속적인 소유욕을 가진 야망 있는 여성인 복부인을 대조했다. (p79)


현모양처(또는 효부) VS 복부인. 1인 2역 지경의 분열 양상, 무리도 아니다. 이는 애당초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화폐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니, 얻기 위해 종사하는 을乙 VS 소비로 누리는 갑甲이 그것.

말하자면 [in]visible이랄까, 곧 종사하는 동안 감춰지고 배제되는 한편(invisible)소비하는 데서 비로소 가까스로 모습 드러나기에(visible)¹.


따라서 살아 숨쉬는 존재 실감에 갈급한 형편으로 당장 실현 가능한 소비에의 몰입은, 불가피라는 데 이견내기 보다 동조 우선하지 싶다. 하지만 짚고 넘어갈 점은, 마땅히 전제되어야 할 의구심 곧 소비 과몰입이 과연 타당한가 여부 그 판단 과정의 생략/누락일 것. 그러나 생략/누락 상태 임에도 불구하고 '주택장場'에 들어서기 바쁘니 고스란히 되먹임될 밖에.

반복, 확대 재생산을 문제 삼아야 하지만 당면한 현실로, 해서 그 구조와 불가분인 것으로 여기니 저자 표현대로의 '주택실천'은, 지속 가능 메커니즘으로 자리하는 동시에 '주택장'을 확고부동한 구조로 굳힌다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어찌되는가 하면,

여성들 자신이 원했든, 그렇지 않았든 투기적 주택실천의 효과는 사회적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아주 단단한 경로가 되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p292)




투자와 투기의 구별은 생산성과 불로소득에 대한 특정 관점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투기가 부도덕하며 부적절하다고 비난하면서도 불로소득은 선망한다. 요새 젊은 사람들의 궁극적인 꿈이 임대사업자나 건물주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노동시장에서 겪는 부당한 일들, 노력과 헌신에 비해 정당하게 주어지지 않는 소득, 시장 진입과 성장 과정에서 부딪히는 부당한 차별과 견고한 위계 때문에 노동과 노력이 기존에 갖고 있던 도덕적 위상을 믿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예측 불가능한 노동시장과 가혹한 노동 환경은 인간성을 위협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되도록 노동을 회피하고 인간적인 삶, 좋은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기제로서 지대地代, 즉 부동산을 통한 불로소득을 선망하는 추세다. 건물주가 되겠다는 희망을 막연한 허영이나 비윤리적 삶의 태도라고만 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 부동산을 통한 지대 확보가 인간다움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생존전략이자 좋은 삶을 위한 가장 적합한 선택지라는 생각은 이미 많은 대중이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환경을 조성하는 요인으로 가족규범이 존재한다. (pp130,131)


'투자''투기'에 대한 자의적 구분을, 자기 바깥으로 책임 소재 돌리는 방어기제로 활용. 실상 그런 지경에 처하도록 만드는 과정을 역탐, 자리한 얼개/구조 가늠과 동시에 해체 및 새로이 구성/구축 기획으로 뻗어야 마땅. 그러나 '오히려 행위자들은 정부마다 다른 정책과 그에 따른 기조 변화를 오락가락하며 예측 불가능성을 높이는 주먹구구식 행정으로 이해하고, 정부의 무능함 때문에 힘없는 시민인 자신이 이 불가측성을 감당해야 한다며 억울해'²하는 한편 그런 등등을 이유로, '큰 자본을 가진 이들(…)을 타자화해서는 안 된다(며) 오히려 그들처럼 자본가의 관점으로 움직여야 자본을 점유하는 게임에서 패자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³하는 소위 내로남불 지경에 다다른다. 하면 이로써 왜소한 개인 특히 가부장제 그늘 아래 '비자본주의적 노동'에만 종사, 그림자로나 (시장) 참여하던 그러니까 제한된 (여성의) 성역할은 극복되는가? 아니면 단지 그것도 '공부'라는 식으로 가치 전도된 표현을 구사하며 투기에 적극 가담, 기어코 공모/협잡의 한 축을 이루고 마는 데 불과한가? 후자로 명약관화.


주택실천으로 얻은 자본이익이 여성들에게 전에 없던 경제적 자유와 풍요로운 삶의 기회를 허용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현상을 성평등 강화의 징후로 읽어낼 수 있을까. 터키 출신의 영국 정치경제학자 칸디요티가 사용한 가부장적 교섭patriarchal bargain이라는 개념은 낙관적 전망이 이루어지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점을 일러준다. 그는 이 개념을 통해 여성들이 가부장제가 짜놓은 전반적인 각본 속에서 나름의 조건과 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며 자기 삶의 기회를 극대화하는 데는 전문가가 되지만, 이는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요령의 체득일 뿐, 그들이 구조적으로 불리한 자신들의 삶을 바꿔내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분석한다. (p248)




이쯤에서 책 머리의 <프롤로그>를 다시 살피는 게 필요하지 싶다.

문제가 복잡해질수록 주택문제는 중산층 시민윤리와 무관한 이슈로 변했다. 이제 질문은 도시 중산층의 시민적 역량과 새로운 젠더정치는 무엇인가로 향해야 한다. (p8)


문제를 의식한 시선은, 이를 견지하는 가운데 '이러한 구조적 환경을 조성하는 요인으로 가족규범'⁴을 짚고 마침내

1982년에 초판이 발행된『반사회적 가족』에서 배럿과 매킨토시가 제기한 것처럼, 가족은 왜 반사회적인가? 특히 집을 소유하려는 가족의 욕망은 왜 반사회적일 수밖에 없는가? 반사회적인 제도를 우리는 언제까지, 누굴 위해 존속시켜야 하는가? 언제나 질문은 주택이 아니라 가족을 향해야 한다. (p292)

라는 데에 이른다. 당연하다.


역시 이라영 선생이 도서 본문 내용을 바탕으로 거듭하여 짚은 바, "여성이 사적으로 '더러운 일'을 수행한 덕분에 남성은 순수한 공적 자아를 유지 (표4)"하는 선에 그칠 게 아니라 필"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긴밀한 결합 속에서 중산층 여성은 어떻게 계급재생산에 참여하는가. 가족주의와 모성은 이 계급재생산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표4)"를 살펴야 마땅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다음 사연과 같이

수연씨에게 자가소유 주택의 의미는 분명하다. 경제적 독립과 자율성이다. '자기 (명의로 된) 집'은 그녀의 페미니스트 활동에 추동력을 더해준다. 오랫동안 여성주의 활동을 해온 그녀는 여성이 남편 혹은 원가족에 경제적으로 의존하면 여성주의자로 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주거 안정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한 최소 요건이다. "집은 있어야 돼. 이놈의 혼탁한 세상에서." 수연씨는 주변 여성들에게 자기 명의로 된 집이 있어야 한다고 늘 주장한다. (…) 주거문제로 삶이 흔들리면 혼탁한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특히 페미니스트로서 살며 맞닥뜨리는 산적한 과제들을 감당해내기 더 어렵다. 계속 오르는 집값, 그리고 집이 부여하는 정서적 안정감이 자가소유 주택에 대한 수연씨의 강한 믿음을 뒷받침한다.
내면화된 투기 감각이 오로지 경쟁과 독점이라는 배타적 태도 때문에만 형성되지는 않는 것 (pp192,193)


'내면화된 투기' 곧 '주택장'을 공고히 하는 구성 요소로나 기능, 동일 역할만 수행할 뿐 그물 벗지 못하는 형국에 계속해서 처할 밖에 다른 도리 없을 것. 어차피 피차 간 그물을 구성하는 일개 올로 기능하길 멈추지 않는 이상 해체 작업은 시동조차 불가이니.


그러니까 중산층(을 열망하는) 여성이 의도치 않게 짊어진 역할로 국한하면 한계 봉착변화는 요원하다. 가족을 구성하는 성원으로서 남/녀가 서로 간 적대적인 경우? 글쎄 아주 없진 않겠지만 대개는 원팀으로 경제 공동체다. 가족은, 혈연 서사를 지속가능케 하기 위한 재원 마련을 목적 삼는 최소 단위의 경제 주체. 때문에 '주택장'이라는 공모, 또 투기로 불거지는 협잡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적극 가담한다. 이것이 국민국가 경제체계를 떠받치는 주된 축으로, '모범' 그야말로 K-Standard '가족' 모델의 전형. 이들의 생활로 구현되는 주거공간으로써의 (브랜드) 아파트 등은 그 자체로 소위 '중산층'의 지표. 이러저러한 것을 소유, 누리는 것임을 모든 국민에게 전시하는 장場 그대로, 모델하우스로 기능. 


'가족'을 토대 삼는 혈연 서사, 애착에서 비롯하는 세습 등의 문제를 직시 않는 이상 인간 개체로 독립 주장은 공염불에 그치지 싶다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고의) 누락/외면하는 데서부터 싹 트는 문제라 할 수 있겠다. 양손에 떡을 쥐려는 이중적 태도. '주택장'의 규범(스스로도 '투기'라 명명, 의식하는 바로 그 방편)을 적극 수용하며 자산 불리기에 전심전력, (소규모) 유사 자본가로 '중산층' 지위 획득을 목적 삼고 그에 혈안이면서 저와 무관한 것처럼 별개의 '투기' 세력을 특정하며 거리두려는 억지. ← 이를 직시하는 데서 해결의 실마리 쥐는 것.


그러니까, 어쩔 도리 없다며 무력함 토로 → 광장을 뒤로 하고 제 거처인 밀실로 후퇴, 동시에 '주택실천' 몰입 → 후반 진입 반성하는 한편 비록 '나중이나 먼저! 으뜸!! 되리라' 희망 품고 메커니즘 작동의 톱니로 헌신. 이게 문제라는 것.


와중에 소유물로 갖추니 교양. 그 장場에서 탈락 지경인 소위 루저를 동정, 그네들에게 베푸는 선의 곧 시혜로 갈음하는 실천? 이게 참 실천인가? 턱에도 미치지 못하지!! 이런 과시 소비 행위에 봉사, 부합하는 형편으로나 제공되니 이른 바 문화? 유명무실이라 아니할 수 없겠고. 그러니 실상 무변無變 지경에서 공회전 거듭, 그야말로 겉돌기 연속일 밖에. 정말이지 기도 안 찬다. 그러니 내내 평행선, 변화 일 수가 없지. 어떻게 바뀌겠나. 몰입 지경에서 벌이는 짓들이 죄다 이러한 데로 쏠리고 이에 그칠 뿐이니. 한낱 무늬로 그치고 마는 데, 그 뵈는 겉[표表]으로 속[리裏]을 가늠, 좌/우 등등으로 구별짓는다 덤벼야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겠나. 어차피 피차 간 무색無色이나 다름 없는데. 그러니 이 공모/협잡과 거리두며, 총체總體를 이루는 모두를 대상으로 비판(여기엔 상반된 길로 향하는 실천이 반드시 수반)하는 데 주저함 없어야 할 것. 소위 진보는 이러한 활동 위에 비로소 성립!!


그러니까 (비)자발적 전심전력으로 봉사하던 기존의 혈연 서사를 법계法係로 전환, 저마다 법기法器로 탈바꿈 주도해야 변화는 비로소 가능하지 않겠냐는 것. 이제까지 자명하다고 여겼던 인간상 그 모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태도와의 결별을 촉구.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유산으로 전해지는 지혜 아니었나. 여러 성인聖人이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설계, 가리키는 그야말로 공통된 지향 아닌지.

가부장제 그늘에서 자산 증식으로나 실천(!)되는, 국한 지경의 여성성과 결별. 곧 극복은 이렇게 국한/제한된 여성성을 직시, '여자?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 (개신교 성경 <요한복음> 2장 4절 원문 차용)'며 떠맡은 역할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려는 데서 비로소 이뤄지지 않겠냐는 것. 혈연 서사 또 이를 바탕 삼는 '가족''반사회'성을 제대로 살펴 (소규모) 유사 자본가로나 실천(!)하는 따위의 롤플레잉 멈추고 반대편으로 걸음 내디딜 때 기성旣成의 매트릭스 허물리지 않겠냐는 것.


물적 토대에 대한 집착으로 하향평준화된 신토불이身土不二 신앙 이로써 그리는 지도地圖를, 지혜智慧로 환히 밝히는 지智:도圖로 대체! 욕망의 거처된 내면과 소내疏內 → 공적/사적 영역에서 수행하던 성장/증식 몰입 거부 → 투기에 자발적 결탁 자본제 재영토화에 일조하며 실상 매몰 지경에 처했던 스스로를 구원 → 후세로 잇닿는 구조맹 재생산 멈추고 → 마침내 법法에 이르는 도道를 드러내는 '대애도大愛道 비구니' 출현!! 학수고대!!


남녀 불문, 개신교 성경 고린도전서 13장에 언급된 '어른'이야말로 지금 필요한 인간상!!

혈연 서사를 극복하려는 몸부림으로 닦는 길이야말로 지속가능한 미래로 자리하지 않겠나?!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잊어버렸습니다.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떄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_개신교 성경 <고린도전서> 13장 11,12절

¹ 때문에 소위 SNS는 전시장으로 화할 수밖에 없다. 후발 주자 역시 당초 전시장 구축을 목표로 시장 진입함이 당연하고. 소비자 측면에선 내향을 주장하는 사정 역시 내향성을 드러내는 것들로 도배 일쑤. 때문에 성격/성향 운운 등등 자기 자신을 설명하려는 따위 주석, 이에 해당하는 것들은 죄다 전시장 내로의 자발적 재영토화를 수행하는 이상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

² p151, 같은 책

³ p201, 같은 책

⁴ p131,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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