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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공간 Nov 14. 2021

필론의 돼지, 미니마 모랄리아, 상처로 숨 쉬는 법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서점일기 번외편


필론




먼저 이문열 단편 「필론의 돼지」¹.


내용인즉 군열차로 귀향하는 제대 군인 무리가, 함께 탄 소수의 현역 특수부대원 '검은 각반'들의 일방적 괴롭힘에 숨 죽이고 당하다 맞서서 역전 구도 결국 쟁취. 우위를 점한 소수의 횡포에 굴종하던 다중 → 무리의 힘 각성 → 부당함에 맞서 권리와 지위를 복권하기까지의 과정. 이는 마치 권선징악 작동시키는 개개인, 그 목소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훈으로도 읽힌다. 그런데 보다 주목할 건, 가시적인 실체로 뚜렷하다 여겼던 '검은 각반'을 무너뜨리고난 이후. 무력함을 토로하던 왜소한 개인─이러한 처지를 작자는 철학자 '필론'에 견준 것. 격랑과 조우, 난파 염려하는 배 안에서 도무지 제 쓸모를 찾지 못하던 철학자 '필론'. 선실 안쪽에서 태평한 채로 꿀꿀거리는 돼지와 다를 바 없으니 그를 흉내낼 밖에 도리 없더라는, 자조─'검은 각반'이 무너진 뒤에도 여전如前. 솟는 의구심, 무소불위 전횡의 주체는 과연 '검은 각반'이기만 한가? 힘[力] 그 자체 아닌가? 하면 적의敵意가 집중되는 과녘 중심, 그 일점一點을 점하던 실체의 소거를 개혁이든 혁명이든 과업 완수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함정일지 모른다는 것². 개운치 않은 뒷맛, 이유인즉 '검은 각반'을 대체 post-는 무리의 힘[力] 곧 다를 바 없는 욕망의 군집. 실상 쌍방이 이루는 협잡으로 형해形解 곤란 지경. 불거지는 몇몇 마치 그 권좌를 점한 형상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자기기만'으로 동기화. 이런 한편에서 인간 종種 개별 단위로 자기 생애 가운데 누리려는 행복(욕망과 결부된)을 우선. 따라서 앞서 이른 과업 완수는 애당초 무리한 목표로 폐기. 육욕에 봉사하는 노예로 전락하는 개성個性. 때문에 근기根機, 차이는 좁혀지기보다 확대. 협잡이라는 실상을 부정하는 '자기기만' 말고는, 진리랄지 의義 내지 도道고 자시고 간에 이를 중심 삼고 어느 한 시점/시기에서 일제히까진 아니어도 다수가 동기화 이루기는 더더욱 불가능 지경으로 수렴.




때문에 '자기기만'을 의식, 명확하진 않아도 감각하게 되는 인간은 멜랑콜리에 처한다. 그래서 옥獄에 갇힌 수인囚人처럼 무력하고 왜소함을 실감하면서도 이같은 협잡에서 온전히 몸을 빼낼 수도 없으니 최소한으로 꾸려 ─욕망 충족 기계로나 동작할 뿐이어서 이미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는 상태. 하여 내구연한 다하기까지 견디느니, 단 한 순간일지언정 정말 사는 것처럼 살아 움직이자면[生活] 소박할 밖에. 그런데 정작 우울감 호소하는 상당수, 이와는 대척인 형편을 열망하며 그를 잠시라도 경험코자 안달, 또 겪으면 그런 경험 내보이지 못해 복달한다는 것─ 숨 쉬는 것. 그러나 이처럼 소박하게 꾸려도 수반되게 마련인 수치. 결국 따위의 국지전으로는, 소규모 난국難局으로 고착되는 이 사회라는 총체總體를 어찌할 수 없기에.

안팎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하나되는 심연, 여기서 갖가지 얼굴로 나타나는 괴물, 이를 구성요소로 하여 모습 드러내는 21세기형 리바이어던. 이 '객관적 권력'을 의식/인지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객관적 인식' 역시 똑닮은 괴물의 모습으로 나타남은 당연할지 모른다. '내가 세상에 화평를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³는 예수의 말, 거듭 새겨본다. 기성旣成과 짝하여 안주, 관계를 비롯한 모든 면을 고착 상태로 굳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간에 맞서야 마땅. 불화不和야말로 연성軟性을 일깨우는 힘. 따라서 염화미소 sync 가능성에 회의적(그래서 脫멜랑콜리에 처하는 게 가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시해야 겨우 가늠 가능한 현실, 외면할 수도 없어 이를 짚어 살피는 과업 명맥 유지.


이것이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요, 또 이를 경유한 철학자 김진영의 『상처로 숨 쉬는 법』의 주된 내용이지 싶다. 




상처傷處, 그러니까 상傷의 처소處所에 들되 제 우물 속에서 좌정관천 않는 것 ← 이것이야말로 수치를 의식하는[知] 이의 기본 소양이자 태도. 달리 이르면 너와 나로 유책을 구별짓기 어려운 협잡, 약육강식을 입신양명으로 코딩하는 따위를 문명文明이라 이르는 데서 비롯하게 마련인 수치를 견지하는 한에서만! 문文으로 화化하여 박제된 지경을 소비할 뿐인 데서 시프트-업, 배우는[學] 과정에 든다 할 수 있을 것. 이때에나 문화文化는, 비로소 '경험'되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¹ 10월 23일 당 서점에서 모인 <북타운 부평>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² 확실히 작가로서 이문열의 감각은 예민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만일 이를 좀 더 분명하게 거머쥐려 했더라면, 선명하게 의식하기 위한 작업 지속했다면 이후 행보는 드러난 실상과는 꽤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을지 모를 일.

³ 개신교 성경 <누가복음> 12장 51절

작가의 이전글 중2 눈높이에 맞추어 써야 마땅하다? 진부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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