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각공간 Nov 14. 2021

To be or not to be, 오징어 게임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서점일기 번외편


https://brunch.co.kr/@nemo-book/194에 이어서.


하지만..

아도르노 등이 충격한 이후로도 좀처럼 바뀌지 않으니, 현실.

오히려 퇴행을 의심해야 할 판.

첨부 이미지는 소위 북-튜버 '겨울서점'이 이 책을 소개(?)한다고 남긴 내용.


첨부 이미지에 언급된 바야말로 일군의 주례사 평처럼, 산업에 종속된 문화를 여실히 드러내는 '지표' 아닐까 싶다.


다만, 이를 모르는 바 아니나 느껴도 청탁(!)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과 그렇게 받아 쓰지 않을 수 없는(!) 곧 매문賣文과 다를 바 없는 지경으로 자신을 몰아댈 수밖 없는 사정, 양편이 짝으로 이루는 현실 그리고 그에 깃들 수밖에 없는 비애 등등을 어림해 볼 법하다.

그러니까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어쩔 도리 없는, 옴짝달싹 곤란한 지경으로 옥죄는, 구조니 체계라 이르는 이 현실, 때문에 정작 책에서 짚는 내용과는 상반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형식', 취할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의도라면 미루어 짐작컨대, 비록 대부분 소비로 그칠지언정 당장은 (판매를 촉진, 소비 독려하는) 물결이라도 일으켜 그 형세에 올라 널리 가닿도록 하는 게 중하다는 판단이지 않겠나. 종국에 자리하는 목적은 물론, 개중 이를 감각하고 선명하게 의식하는 이들의 출현 기대? 해서 불가피한 전략으로 택하였으리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그런 의도면 담는 내용 만큼은, 가리키는 바 손가락으로써의 역할과 기능에 부합해야 마땅. 비록 (어쩔 수 없으니 취하는) '형식'이어도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하면 도저히 그렇게 보아줄 수 없으니 안타깝다. 문제는, '상처' 등의 표현에서 비롯한 피상적 이해(이를 이해라 표현하는 자체가 적절한지 의문이지만)를 바탕으로 저지르는 오도誤道. 이러면 파고든 아도르노는 물론이거니와 이를 다시 풀어낸 길라잡이 故김진영 선생께 실례요, 독자로 하여금 착각 불러 일으키니, 그 피해 이만저만 아니다.




폄하하자는 게 아니다.

본의야 어떻든 오도가 문제라는 것.


실제로 시간 들여 저자와 대화 거듭하면 이해에 가닿을 것(전에도 여러차례 언급하며 강조한 바 있지만 바로 이 '대화'야말로 다름 아닌 독서의 본질일 터). 요는 성급하다는 것¹인데.. 이것이 풍조라 해도 과언 아닐 정도로 널리 퍼져 있다면 개탄할 노릇. 왜냐하면 임기응변이 처세의 골조를 이루는 사회야말로 처처에 스며든 불공정을 반증하는 것일 테니. 이 정도까진 아니라 믿고 싶지만, 조급함은 책을 사들인 독자에게서도 보인다. 인스타그램 위시한 SNS 등에 책 올려두고 게시한 내용 살피면 대개 상처→치유/회복에 이르는 힐링 서사를 전제하면서, 그를 언급하기 전과 다르지 않은 이후 그러니까 언제 어디서 무엇을 입고 먹고 마시며 즐겼는지를 증거하길 잇는다. 그러니까 먹부림 비롯 등등 ~부림의 내밀한 역사 전시를 지속하는 것. 하지만 기실 책 내용은, 이를 비롯하여 살아있음을 증명하려는 몸부림 태반이 그 본의와는 무관하게, 장용학의 『요한시집』 구절처럼 '다른 데를 열심히 사는' 데 불과함을 짚는다.


소비와 동시에 찾아드니 허무, 이를 다시금 '거짓 보상'으로 메우고자 달음질 연속하는 식. 이 부질없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한에서 불가피한 대로 견디며 겨우 '살' 수 있다는 게 요지라면 요지일 텐데. 그러니 만일 이에 감응한다면 이제까지의 전시와는 무관한 형편으로 다시금 삶을 직조, 이전과 같은 노출은 꺼리며 거리를 둘 수밖에 없을 터. 왜? 부끄러우니까! 그래서 목격되는 바가 줄어야 마땅하다 싶지만 책이 언급된 개개의 계정에서조차 마주하게 되는 걸 보면 아무래도 무관한 채로 소비될 뿐이지 않나 싶어 아쉽다. 그렇다고 책으로 업로드 지속한다 해서 다른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이, 사실 책 거죽만 바뀔 뿐 서평이니 리뷰니 이르는 표현 아래 저 홍보 문구와 동일한 눈높이에서의 감상 나열로는 다를 바 없고. 그러니 사회상의 변화랄지 탈바꿈이 가시적으로 관찰되기까지 요원하다 아니할 수 없겠다. 사실상 무변無變장수-사회라고나 할까.




다시, 그러면 어째서 급한가?

소위 '관종의 시대'라는 이즈음을 염두에 두고 나름 추측컨대, 비자발적으로 내몰린 것 못지 않게 제 이름으로 추수하는 '형식' 아래 자발적으로 삶을 재편하기 때문이지 싶다. 환원될 수익을 삶의 동력으로 구성하는데 적극적인 인간, 소위 '성과주체'랄 수 있겠다. 정작 이러한 태도야말로 죽은 것과 다름 없다는 게 아도르노가 전하려는 메시지 가운데 하나랄 수 있겠지만..


아무튼 다매多賣 통한 수익 환원이 목적이면 내용이야 아무래도 좋고, 읽히든 말든 부차적. 이는 독자 처지도 매일반이어서 저를 돋우고 뽐내는 용도로 소임 다하면 그뿐, 안에 무엇이 담겨 있든 저와는 무관인 채로 평행선. 이처럼 액세서리 기능으로나 전락하는 본말전도 지경이야말로 상처 생산 메커니즘을 지속 가능케 한다는 것이지만.. 역설力說은 그러나, '호령하여도 에코우가 없는 무인지경'의 역설逆說로나 반환될 뿐이다.




'자기 소외'를 도외시하며 바깥으로 눈 돌리니 간단히 양분兩分 되는 세계. 곧 케어 마땅한 자신 vs 손절 불가피한 타인 구도. 계급론을 구태로 치부하면서도 성별, 세대, 종교, 인종은 물론이거니와 동·식물 둘러싼 환경(온라인 공간도 빼놓을 수 없겠지)에까지 곳곳에 양비兩非를 무기로 PC(Political Correctness). 그러나 정작 PC주의자야말로 제게 관대한 나르시시스트. 입으로나 '주여, 주여' 이르며 천국에 들어가길 바라는 외식外飾하는 자처럼, 입으로는 민주/진보를 주워 섬기지만 동시에 부富에 집착하고 제 혈육의 안녕과 승승장구를 구복求福하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겠다는 식이니 그야말로 양손에 떡을 쥐려 드는 것. 이는 '공功'에 대한 성찰은 전무한 상태로 '성공成功'을 이르며 이루겠다며 맹목적으로 몰입하는 식과 다르지 않다. 이런 태도라면 차라리 자본제에 충실하는 편이 여러모로 나을 성 싶지만, 실체야 어떠하든 잠시 잠깐의 제스처와 포즈 만으로 유명세 누릴 수 있는 세상이니 골치 아프게 고민할 필요 없이 일천한 경험, 조악한 DB로 자꾸 무리수 두는 것. 그래도 획득 가능한 부富. 아니 외려 허명을 돋보이고 빛내니 스놉snob이 판친다.


애당초 공부와 맞물리는 독서²라는 행위 자체는 이같은 흐름을 거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조급함에 대항하는 삶의 태도야말로 소위 '느리게'라는 수사에 부합. 그러니까 '게으름' 내지 '느리게'라 이르는 삶은, 덧없음/부질없음을 연속하는 쳇바퀴를 거부하고 제 속도를 자기 일상, 낱낱의 순간을 단위로 하여 자기 생활을 꾸리는 태도로 구현해낼 때에나 비로소 부합할 터. 이렇게 실천으로 자리하니 명실상부이나, 이와 무관한 형편으로 베짱이의 낭만을 꿈꾸니 '자기기만'이란 것이고. 이런 작태를 저지르면서도 부끄러움 모르니 '뻔뻔하다' 이르는 것.


그러니 필요한 건 '잔인할 만큼 눈을 크게 뜨'니 어쩌니 따위의 수사를 동원하면서 감정 과몰입하기를 거부, 그저 진득하니 있는 그대로를 살피는 자세. '사랑받기 위해 났'노라는 일면만 부각하며 돌봄받아 마땅한 것처럼 응석부리는 건 퇴행이지, 주체로서 권리 행사와는 무관하다. 상傷의 처소處所에 들어 결가부좌. ← 이는 제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타他의 상처를 구성하는 협잡에 자신이 어떻게 간여하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가담하고 있는가부터 살피는 것이다. 악惡의 총체를 구성하는 제 민낯을 평범하다 가볍게 여기며 자위하는 데 빠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렵다.

의식하는 데 게으름 부리는 한편 유불리 타산에만 소수성/약자성을 과장(때문에 실제 소수/약자는 계속해서 배제³)하기 일쑤이니.


'무언가를 정말 바꾸고 싶긴 한가? 사실 변화를 반기지 않으며 안주를 바라는 건 아닐까?'

이처럼 자문自問 연속하며 자답自答하는 가운데 벼려지는 말에 부합하도록 실천 꿰어야 하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렇다고 선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라는 예수의 탄식은, 바울에 이르러서야 겨우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는 인식에 다다른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함을 인지,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음을 지각,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기에 이른다.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슬퍼하는 동시에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⁴ 아래 있는 이 부조리한 형편 중 '삶'을 꾸려보자 작정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잘산다'는 모양새를 모든 영역에서 K-Standard로 제시하는 체제를 그대로 '미미크리'하는 '제나[自我]'로는 불가不可.

이와 무관한 그러니까 힘[力]의 궤도 바깥을 '미메시스' 하는 '얼나[靈我]'로 솟나야, 그러니까 거듭나야 가능하지 않겠냐는 것.


결국 나의 선택으로 귀결. 

이것이야말로 나[自]로부터 말미암는[由], 참 자유自由 아닌가?


자, 자기 내면에 마련된 사유의 뜰/장내에서 오징어 게임 펼쳐보자.

호의호식 등 추구하는 바에 닿기까지 비교적 평탄한 대로大路에 해당하는 예속이냐,

아니면 자유한 좁은 길이냐, 어느 쪽을 택할는지?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자유롭게' 전공을 선택한 사람이 제 분야에서 교육을 받느라고 경직된 시험을 치르며 편협하고 고정된 교과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면, 선택된 자의 경우에는 그가 독자적으로 연구를 시작하자마자 곧 폭넓은 자유가 주어지네. (…) 자신이 봉사할 수 있고 봉사하는 가운데 자유로울 수 있는 자리를 찾는 거야. 그 밖에도 그는 이제 저 무서운 예속을 의미하는 직업의 '자유'에서 평생 동안 해방되는 거지. 돈이나 명성이나 지위를 좇아서 애태울 필요도 없고, 당파를 몰라도 되며, 개인과 직책 사이의 갈등, 사적인 일과 공적인 일 간의 알력 같은 것 역시 몰라도 좋고, 성공에 연연해할 필요도 없어. 자, 이제 알겠나, 우리 아들. 사람들이 자유로운 직업에 대해 말할 때 그 '자유'는 지극히 조롱의 뜻이라는 것을.

_헤르만 헤세, 『유리알 유희』 中

¹성급함을 문제 삼으면, 이해할 수 있는 머리 임을 증명하고자 IQ/학력을 비롯하여 출신 성분/배경을 드러내는 갖가지를 객관적 지표랍시고 내놓는다. 하지만 관건은 그 '시간'. 스스로 취하는 과정 곧 제 노력에 들이는 제 시간에서 비롯한 결과물로 경쟁해야 마땅하건만 이를 소위 '엄빠 찬스' 등으로 마련하고는 제 스펙으로 과장하니 문제되는 것. 할 수 있는 머리가 있으나 부족한 시간을 가내家內 자원 활용 메웠을 뿐이니 문제될 바 없지 않냐는 식은 안일한 판단이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머리가 있음에도 부족한 생활 자원을 메우기 위해 그러지 않아도 부족한 시간을 아르바이트 전선에 투입해야 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공정성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물고 난 수저 색깔은 다를지라도 지닌 능력을 중심으로 평가되는 것이야말로 기회의 균등 아니겠나. 아마도 이런 측면에서 조국 전 장관 자녀의 부정입학 의혹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갈리지 싶다. 과한 혐의를 바탕으로 벌인 무리한 수사 등은 '정치검찰'이란 오명을, 오히려 기득권 수성의 명예로 여기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 당연하다. 그런 한편 덮어놓고 무조건 옳다는 식, 아묻따 지지(?)는 못하겠다. 이런 지도층 인사와 그 일가에 거는 기대로 우선하는 건 편법도 기피하는 청렴 아닐까. 혈연 서사에 종속된 형편으로 별 다를 바 없음을 '인간적'으로 치환하는 순간 겨 묻히고 똥 묻은 것 나무라지만 결국 개 신세로 매일반이니 내로남불 거울상으로 오십 보 백 보 지경임을 자임하는 것이다. 이로써 '다름'을 주장하며 공의를 관철할 수 있을까. 불가. 하긴 180석 만들어주었니 어쩌니 해봐야 처음부터 그럴 생각 없는 이들 섞여들었다 해도, 역시 다를 바 없는 욕망 품은 국민으로선 실상 노예 지경에서 정신승리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


²그렇다, 공부와 맞물리는 독서. 그러니까 지면에 앉혀진 활자를 눈으로(혹은 손으로 귀로) 읽어들이는 순간 내면에서 목소리로 부활하니 이로써 주거니 받거니 하는 과정이야말로, 책冊이라는 물성物性 풀어 헤치는 것. 이처럼 구속/박제된 상태, 그 격格을 벗은 글이 목소리를 입고 다시금 말로써 재생되니 그때까지 부지불식간 고정된 관념을 파破한 끝에 다시금 새로이 구조/체계를 (재)구축토록 하는, 이 과정이야말로 책이 선사하는 '경험'. 이것이 '경험'이라 이르는[名] 바 본질[實]일 것. 그런데 이를 느껴보자고 계속해서 자기 바깥 이곳저곳 헤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배회인가. 그리고 이에 조응하여 벌이는, 소위 큐레이션이라는 조악한 수준의 편집력과 이를 가장하는 in/ex-terior, facade 그리고 굳즈를 비롯한 포장.etc ~~ 이리 방황하면서도 '경험하는 인간'을 연출하기 위해 꾸밈 노동에 여념없는 사정이야말로 서글픈 것.


³민노총이 반성할 지점이라 여기지만 역시 가능할지 모르겠다. 이익 단체로 변모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 이미 아랑곳 않는 건 아닐까.


⁴개신교 성경 <마태복음> 26장 41절, <로마서> 7장 15절/19절/21절/23-25절.




작가의 이전글 필론의 돼지, 미니마 모랄리아, 상처로 숨 쉬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