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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공간 Dec 11. 2021

서점일기 - 영혼을 깨우지 못하는 서재는 무덤과 같으니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서점일기


이혼 이후, 이혼의 충격으로 멍해 있을 때 생활은 엉뚱한 방향에서 이상한 틀을 가지고 나를 덮쳐 나를 그 틀 속으로 밀어넣었다. 곡마단의 객석에서 무대 위로, 술의 늪으로, 음모(陰毛)의 숲으로 나는 그것들의 부력(浮力)에 나의 존재를 떠받치도록 맡기고 있었고 그래서 나라고 내가 생각하고 있던 이전의 나로부터 점점 멀어져갔다. 물론 이건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전에도 항상 이건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었다. 이건 내가 아니고 이전의 내가 나라고 한다면 이전의 나는 그 이전의 나를, 그 이전의 나는 그 그 이전의 나를…… 그리하여 나는 무(無)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건 내가 아니라고 하는 바로 내가 나임을 나는 안다. 어느 때가 돼야만 이건 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건 꿈속의 꿈임을 나는 안다. (…) 아무리 떠내려가도 가까워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내나 친구나 그리고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과 이전의 나는 그때의 그 관계대로 어느 시점에서 영화의 정지된 화면처럼 멈춰서 지나가버린 시간의 땅 위에 남겨진 채로 나 자신에게조차 전연 낯선 나만이 낯선 여자들과 함께 가까워질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캄캄한 바다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 어두운 바다는 전연 다른 법칙으로서 상투적이었다. 타인끼리만 지키는 캄캄한 법칙의 바다였다. 그런 바다에서 어떤 변화를 기대하거나 시도하는 것은 위험했다. 육지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자는 잠시 얕은 바다에 뛰어들면 되지만, 되돌아가고 싶은 육지도 없이 바다의 부력에만 존재를 맡기고 떠내려가는 자가 변화를 시도하려면 물 속 깊이 빠져버리는 수밖에 없다. 바다 밑에서 딴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의 그것은 죽음일 것이다. 캄캄한 부력은 그런 위험한 시도로부터도 나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지난 삼 개월 동안 육십 명 이상의 여자와 관계했다. 세면(洗面)이 일과의 하나이듯 성교 역시 일과의 하나였다. 매번 다른 여자라는 사실은 매일 낯선 지방으로 여행하는 것과 흡사했다. 빨리 통과해버리고 싶은 여자가 있었고 며칠이고 머물고 싶은 여자가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여행이었다. 가는 곳마다 고향과 비교해보듯 여자마다 아내와 비교해보곤 했다. 그러나 모두가 고향과 닮았으나 아무 데도 고향은 아니듯 모두가 아내를 닮았으나 아내는 아니었다. 실제로 며칠이고 머물고 싶어 붙잡은 여자도 마침내는 비용만 축낼 뿐 어느 순간에선가 역시 타향이라는 깨달음만 안겨주는 것이었다. 나의 타향을 자기의 고향으로 가진 사람들이 있듯 나에겐 타인인 그 여자들을 고향으로 갖고 있는 남자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몇 개의 마을을 지나치는 동안 배치가 다르고 가꿈이 다르고 규모가 다를 뿐 결국 모든 곳이 집과 길과 숲과 냇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되듯 그 마을의 생활 속으로 들어갈 수 없고 또 뻔해서 들어가기도 싫은 여행자에게는 여행의 시작에 느꼈던 기대와 향수만 짙어갈 뿐이었다. 마침내 향수의 고통으로써 허전한 여행자는 아무리 잘 꾸민 도시에서도 지저분한 고향의 모습과 닮은 구석을 발견했을 때만 우두커니 발길을 멈춘다.

_김승옥, 「서울의 달빛 0章」


 '어떤 계기로 변화되는 인간상'조차 태반이 자발적 재영토화에나 그치고 마는. 복수불반분으로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지경 임을 인식해야만 반성은 작동. 거듭하지 않으려는 성찰과 동시에 비로소 새로운 지대로 나아가니 '초인', 이것이 '초월'의 본의. 균열 이후 붕괴. 틈으로 불거져 직면하게 되는 제 모습, 면면들. 직시하자고 덤빌 때 와해되는 노멀한 매트릭스. 각을 세워 대립, 그런 한편 그 위에 다가서려는 노력으로 축조하는 이해. 끝끝내 타협 곤란한 지점을 발견하고도 노력 잇는, 이 와중에 끌어올려지는 것들로 마침내 언어의 옷을 입혀 세상 밖으로. 그제야 겨우 자기 자신의 말, 최후의 언어 되는 게 아닐까.


붙임 : 이혼 관련 경험 바탕으로 지었다는 글이 제법 눈에 띄는 이즈음이다. 요즘 시대 또 뭐 그리 대수라고(본인 또한 소위 돌싱-력 연차로 십수 해)  마치 대오각성이라도 한 것처럼 이르는 데 사람 가르고~ 거르고~ 기준과 잣대 세워준다는 식의 접근이 태반이어서 가당찮긴 하다. 각성이면 외려 그 반대여야 할 터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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