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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공간 Jan 08. 2022

서점일기, 우리 곁 서점이 사라지는 이유-2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서점일기



동네서점으로야 이제 만4년 앞둔 형편이나 십수 년을 이 바닥에서 밥을 빌어온 처지로, '사준다'는 식의 의사 내지 표현을 최근까지 접하는 스스로가 정말이지 '베푸는 선의 곧 시혜로 갈음하는 그 실천'에 기댈 뿐인 소위 '루저'로 비치는가 싶을 정도여서, 이런 자신 꼴사납고 한심하다 싶을 따름;;


말로 이르지 않아도 이심전심~까진 바란 적도 없건만, 최소한 읽는 이들인 만큼 부족한대로 미루어 짐작 가능하리라 여긴 곧 저간의 사정 서로 살피리라, 살필 수 있으리라 여기던 심경은 해당 표현 접할 적마다 좌초 지경까진 아니어도 찬물 뒤집어 쓴 것처럼 화들짝 놀란다. 물론 새삼 실감하니 가는 길의 아득함이어서, 이를 거듭하여 새기는 계기 삼자고 마음 다잡지만..



시혜로 접근하는 측, 크게 두 편. 수요/소비 해당 공공기관과 일반 소비자로 독자이겠는데 우선 독자.

어째서 시혜로 드러나는가 하면 우리 안의 자본제 습속 때문이지 않겠나. 읽는 1인으로 독자에게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떠올리며 이야기 이어보련다.



물성物性 취하여 모습 드러내니 곧 책冊. 이를 가까이 하여 읽는 행위로써 독서¹는, 책을 매개로 지면紙面(또는 화면畵面) 밖으로 길을 잇고, 이은 길따라 마음 내는 실천을 목적 삼는다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독서라는 행위는 수반되는 실천으로 비로소 완성이랄 수 있을 것(쓰기 또한 마찬가지). 文으로 일깨워 솟난 問, 이로써 어림하게 된 門을, 두드려 여는 것이야말로 독서 곧 읽기 통해 지향하는 바이지 싶다. 해서 읽은 바를 일상 중 변화로 일구지 못하면, 곧 생활로 잇대지 않으면 파헤친들 변죽 울림에 그칠 뿐이고 거居한다 일러도 실상 주마간산에 불과. 옥죄는 구조 간파하면 헤어난다는 것인데 이와 무관하기론 똑닮은 서로가 '다름'을 주장하며 다툰들 무슨 의미. 비하자면, 부처 손바닥을 온세상으로 여기는 손오공 같달까. 손아귀 속 좌정관천을 세계의 전부인 양 느꼈구나라고 깨달을 때에나 비로소 (자임하던) '제천대성'에 부합하는 꼴로 다듬어지는 것(하여 명실상부). 머문 채 지속이면 손바닥 내內 천방지축으로 자고自高하는 내내, 줄기차게 겉돌 게 마련인 만큼.²


때문에 '공부'라면서 '기억술'이니 '훈련'이니 '속독' 등등의 표현이나 방편 취하기에만 급급? 무익할 뿐. 때문에 권수를 셈하여 성취를 가시화하려는 욕구는, 성장 이끄는 동기로 기능하기보다 집착을 부채질하는 편으로 치우치기 십상. 당초 앎이란 사람답게 살자니 취하여 들이는 방편. 하면 '잘산다'에서 '사람답게'를 떼어내 호의호식의 부차로 종속시키는 움직임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으니 곧 절차탁마 공부. 그런데 포위 지경에서 포섭에 적극 동조는 물론 자발적 투항에 이르기까지, 격하된 앎을 수용하는데 거리낌 사라진다? 더하여 호의호식 구가하는 경제적 형편 정도로 국한/축소된 여유와 자유, 이를 부대낌 없이 내면화? 때문에 안다는 사실보다 아는 것처럼 보이는 데 치중하게 되잖나 싶고. 해서 인정받자고 보이지 않는 답지 상정, 그에 써넣을 표현 습득에나 열 올리는 형편에 처하지 싶고. 사람다움을 따돌리는 현실이 목전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물론이거니와 식솔의 안녕 위한다고 이에 가담/동조하니 고착될 수밖에 없는 현실;;


이처럼 (비)자발적으로 임하는 모양새부터 뒤바꾸려는 기획 그리고 기어코 이를 작동시키는 것이야말로 앎의 본질. 전도顚倒/배제를 토대로 들어서는 호의호식 모델, 이를 모두의 이상형처럼 정형화하는 데 맞서는 한편, 가증스러움으로 뒤덮는 이 시뮬라시옹 상태의 전복을 꾀하는 중에 펜은 비로소 칼이 되고 앎은 무기로 전화轉化. 이것이 알자고 덤벼들어 연마하는 목적이라 나는 배웠는데..


나의 여유와 자유를 국한/축소하는 종속 지경을 깨우치는 앎인 만큼 알기를 체념하는 것은 결단코 '내려놓음'일 수 없겠다. 외려 언어의 심지에 불 당겨 캄캄한 처지 밝히려는 시도, 이를 앞장세우려니 호의호식 비롯한 열망 off. 그러니까 내려놓는다는 본의는 이같은 열망을 잠재우는 태도와 상통하는게 아닐지. 그런데 종속 지경에 대해 솟는 의구심은 젖혀두고 오히려 호의호식과 같은 열망 on, 그에만 충실? 그리고 그러기 위한 공부라면..


해서 옅은 반성, 미약한 성찰로 내비치는 모습은 대개 나름의 중산中産 내지 고학력 등 해당 층위에 속하여 누리는 그 여유를 보이려는 식으로 드러나게 마련. 읽는다 자임하여도 결국 소유한 책을 전시하는 서재를 배경으로 소위 반려, 동물을 품에 안은 채 근대의 귀족을 오늘에 되살리는 듯한 폼으로 표현. 로컬리티 활동 위시하여 지역의 도서관을 비롯한 동네서점은 물론이거니와 소위 문화공간을 거점으로 하여 빚는다고 벌이는 활동에 이처럼 임하니 함께를 입에 올려도 타자화를 피할 길 없고, 갤러리&들러리 세워 여유와 풍족 누리는 저를 인증하는 무대로나 기능. 가상이든 실재이든 부러움을 추수하려니 뽐내기에 치중. 그러니 판을 기획, 벌이는 처지로선 기운 빠질 법. 왜냐하면 고작 이 저열한 인정욕구에 봉사하는 액세서리로나 기능하나 싶어 허탈함은 물론이거니와 자괴감마저 엄습하기에.


하지만 어차피 불가분, 같이 길 걷는 도반-되기 조력, 그러니까 당장 무대찾기에 쏠리는 관심을 함께 앎에 쏟아보자 다독이는 수밖에(해서 판을 조성하는 입장은 늘 난처難處일 수밖에 없겠지). 이를 저변에 두고 참여 돕는 귀한 책손으로 역시 독자. 다만 후자는 드물고 전자는 수다하니 어찌할 수 없는 현실³. 하여도 전자가 스스로를 전/후기로 선명하게 구별지어 후자로 변화하기까지 가능성에 무게 두고 지속하여 깔고 벌여야 마땅하니 다름아닌 그 판이렸다.


그러니 귀 열고 눈 가리는 들보 치우자는 읽기에 무게 중심둘 수밖에. 그렇다고 시쳇말처럼 입은 무겁게 지갑만 열라? 아닙니다, 아니고요;; 오히려 넣어둬~ 넣어둬~~ 심경입니다;; 제발 대단한 은혜 베푸는 것처럼 '사준다'느니 어쩌느니 하지 말고요. 그저 꾸준히 읽다보면 절로 트이니 짐작하게 되는 저간의 사정, 그에 닿는 언젠가 절로 '아, 아니구나' 하게 될 때를 다만 기다릴 뿐이니..



소규모 동네서점 특수한 경우 제하면 일반적으로 평균 70%~75% 매입. 정가로 치르는 값의 상당부분 고스란히 출판/유통처로 옮아갑니다. 책으로 들여가는 선에서 값어치 충분히 챙긴 것이고 중간에서 서점이 대단한 이익을 취하는 게 아닌 만큼 시혜라 여길 정도는 아니란 것이지요. 물론 공간 지기로서도 고마운 일인 한편 들여가는 독자 또한 나름 뿌듯할 수 있지요. 다만 그 뿌듯함을 나름의 경계 너머 내비치면 그건 좀;; 어쩌다 한둘 여남은 권 사들이는 걸로 자그마한 서점과 책방의 사정과 형편을 크게 보아주는 것처럼 여기는 표현. 이야말로 외식外飾에 열중인 스스로를 증거하는 것으로 자기 상賞 이미 받은 것과 다름 없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 지쟈스께선 그게 복福 아닌 화禍로 닥칠 거라 경고로도 남겼잖아요~ ^^;;


구체적인 사례, 들어 이르자면 이렇습니다. 지원 예산 바탕 도서 증정 모임에 한 차례 이상 참여, 받아간 도서 등 값으로 치면 '사준다' 이르시는 그 책값 100%를 여기서 고스란히 취한다 해도 기울거든요;; 이해를 타산할 것 같으면 제로섬의 균형 달성된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사준다'라고 표하시면 참;;


전 그렇습니다. 요사인 좀 뜸한 편이나 초창기부터 시종을 일관하여, SNS 서점 계정에 입고 도서 올리며 꼭 우리 공간서 구매해주십사 이른 적 없고. 심지어는 알X딘 기업형 중고서점까지 들먹이며 주거지 인근 내지 직장 근처(동네서점 찾음 좋고 아니면 또 어쩔 수 없고) 직접 찾아 들여서 읽어보시라 한 적은 적잖아요. 그렇게라도 독자층 두터워지길 바라고 그게 우선이라 여기는 바여서. 그렇다고 알아달라 하는 것도 아닌 마당에 적어도 그 기운 앗고 의욕 꺾진 말아주십사 해서 이렇게 장황하게 구구절절 읊어 올리는 것입니다. 물론 당사자로는, 의도와는 무관하다 할 수 있겠지만요. 하지만 이쪽에서도 본의와 무관하다는 걸 느낄 수 있어야 바람직하겠죠. 정황 아닌 드러난 사실로, 객관을 빌면 어떻게 살피든 대번에 본의라 판단하지 않을 수 없으니;; 백 보 물러나 '미필적 고의'를 혐의로 두어도 '아니다, 떳떳하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듣는 편에선 당장 뜨악하게 마련. 표정으로 지어 드러내진 않습니다만..


생애주기로 따지면 요단강 절반에 가차운 형편인 어른으로, 득을 셈하여 취하는 쪽으로만 기울던 과거를 살핌과 동시에 점차 그 반대편을 지향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사준다 여길 것 같으면 안 사주셔도 됩니다. 마지못해 사들이는? 사주는 여남은 권? 그거 판다고 서점 형편/책방 사정을 비롯하여 점주/지기의 살림살이 나아질 리 만무!! 적은 권수여서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세간의 업종과 구별짓는 서점의 공공성 강조하며 그 책무 주장에 일로매진한 동네서점주로, 걸음하시어 책을 사들이는 손길의 귀함? 왜 모르겠어요. 이편으론 타의 추종을 허락지 않을 만큼 잘 알아서 고마운 한편 그 고마움을 서점의 책무로 돌려 늘 새겨 활동으로 보여야만 함을 언행으로 보이고자 전심전력하는 처지입니다. 비록 모자랄지언정 이런 제 눈에 밟힐 정도여서 이렇게 따로 글로 지어 말씀 올리는 것이지요.

그러지 마세요, 제발~ 스스로를 돌(我)보자고 읽는 것인데 이에 무감각이면 죄 헛물켜는 것에 지나지 않잖아요;;



함께 모인 자리에서 청년이 제 힘겨운 사정 나누었으면, 공감은 그이가 풀어낸 사정에 객으로나마 이입해보는 데서 비롯하겠지요. 그를 소재 삼아 제 자식 걱정하는 식으로 마무리 짓는 건 공감 아니잖아요;; 사정에 밝지 않아 그럴 수 있다면, 헤아림 깊은 그래서 모든 일에 바삭한 선생처럼 굴지는 말아야지요;; 질문 권한 독점한 것처럼 기를 세우니 이르는 질문에 해당하는, 나름의 답 곧 사전 궁구해본 걸 먼저 꺼내어 참여한 분들께 이른 이후 따르는 질문이면 되겠지요. 나로서는 당연하다 싶은데. 이런 게 불편하면, 죄다 그 기분과 마음 사정에 맞춰야만 하는 것 아니고 그러자고 여러분 참여한 게 아니잖아요;; 플렉스해보겠다 무대 삼으려는 할 수 있어요. 딱히 말릴 일도 아니고요. 케미 돋으면 훌륭한 판으로 앎이랄지는 물론이거니와 더하여 재미+α 취하겠죠. 그런데 그저 주변 불편 자아내면 마냥 반길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어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지요. 청년과 함께하는 자리의 고마움을 다음엔 소소한 먹거리 등 마련 함께 나누겠노라 취재 마이크(지역방송) 앞에선 노래하듯 발언, 이후 일언반구 없이 노쇼로 응답(?)한 분도 계셨지. 우연히 들렀을 당시 책 증정 소식에 일정마저 즉석에서 변경, 받아가선 참석하신 분이, 왜 그러셨어요;;


또 책 함부로 다루는 모습, 보다 못해 처음으로 그냥 가시라 한 적도 있었지요. 사정은 이렇습니다. 현매로 사들인 이 공간의 자산이 아닌 위탁 조건으로 들인 출판사 자산이죠. 엄밀히 이르면 임치물. 반품 가능한 만큼 상태 보존 책임이 이 서점에 있잖아요. 네, 모를 수 있죠. 모르는 게 당연하다 여깁니다. 하여도 매너/예의 아닐지요. 함부로 펼쳐선 제자리도 아닌 상태로 두고 심지어 던지듯 팽개치는 걸 보다 못해 이르면 사면 되지 않냐 하면, 싸우자 작정하신 거잖아요;; 그거 팔아 남고 안 남고 떠나서 피차 유쾌하겠습니까. 그러니 팔지 않으니 그냥 가시라 하지요. 그 속사정 먼저 헤아리자고 편의 보아 드리자면, 서로 간 매너/예의 성립이라는 有조건(無조건 아닌!), 곧 호혜로나 평등할 때에나 그런 헤아림도 오가지 않겠냐는 거죠. 그렇잖아요;;


만4년 사이사이 이래저래 난감에서 불쾌에 이르기까지 아주 없지는 않아요. 그러나 여타 업종에 비하면 그래도 희박하다 싶으니 참 다행이라 여기고 이 팔자가 상팔자다 싶어 행복에 겨운 투정 쯤으로 이해해주심 좋겠어요. 다만 그러한 처사 빚은 주인공이 하나같이 중장년인 걸 떠올리면 못지 않은 세대로 뭐랄까 괜히 내가 다 부끄럽고 그렇습니다;;⁴그러니 그러지 말자고요.. 앞서 이른 것처럼 마흔 특히 중반 넘운 중장년이면 방향 선회, 관계를 새로이 설정하는 데 본을 보이며 적극 조형하는 태도로 시대의 어른으로 저마다의 자리에서 상像으로 굳혀야 마땅하지 않겠냐는 겁니다. 소유 자본을 바탕 약간의 화폐로 행사하는 시혜로써의 소비 차원이 아닌 접근을 기대한다 여겨주심 좋겠어요. 바람이랄지 알아주셨음 싶은 건 이게 전부입니다. 당장의 소유 자체가 죄다 빌어온 것으로 그저 점유/관리 중인 청지기 임을 깨닫는 것. 그래서 제각각 소용에 닿는 형편으로 가산으로 취한 바를 돌려 놓는 사회적 재분배. 이에 앞장서는 어른으로 자본제 하 타산의 습성 벗은 데서 새로이 관계 맺으려는 것이야말로 중하고 필요하잖나 싶은 거죠. 그렇단 얘깁니다. 그러니 '사준다' 할 것 같으면 그러지 마세요.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지 말자고요~ 그저 어른으로 사람답게~ 부탁드리며 일단 맺습니다. 독자 여러분께는(특히 우리 중장년 어른들께는) 딱 이 정도만 헤아려주십사 부탁드립니다(__)



¹예서 언급한 '독서'는 개념 한정, 장르 불문 재미로 소일하는 형태를 논외로 한다. 우열 가늠, 구분하여 배제하자는 것이 아닌 만큼 범주에 속하느냐 여부를 따져 묻는 것은 소모적 논쟁일 터이다.


²그래서 특출을 과장하는 몸짓은 안쓰러운 것. 왜냐하면 그럴수록 도드라지는 건 extra-와 무관한 그저 odinary이기 때문. 그런 와중에 자아도취로 담 쌓으니 아뿔싸 이 자아도취야말로 아류에겐 달콤한 아편일진대 소위 자존-감感 운운 연속하며 아편 제조에만 열심인 세태. 목도 불가피인 지경에선 그저 기함氣陷할 따름.


³정말이지 힘이 센 현실. 실상 매몰 지경의 전자가 후자로 변화하긴커녕 외려 세勢로 확장일로(하긴 '양화를 구축하는 악화' 메커니즘이야말로 자본제 본성). 습벽에 흐려진 판단으로 하나되기 일쑤인 무리로 군중. 때문에 우리가 화폐로 행사하는 소비의 쏠림 현상 곧 대마大馬 추종으로 드러남은 차라리 당연하다 해도 과언 아닐 것. 그러니 마케팅 비용과 대마 지위 획득/유지 구도 간 상관 관계는 강화되게 마련. 진일보 조망하는 처지면 비판 수용에 자발적이고 또 적극성 띠겠지만, 쓴 약은 불호不好를 거부권으로 행사하며 도망을 핑계 삼는 한편 귀에 달콤한 것만 취하려 유유상종. 이에 아첨, 아편 제조/공급하며 수익 환원에 몰두하는 거짓 선지자 득세. 유사 부류 팬으로 거느리며 수익 추구하는 이 득세를 목적 삼아 다시금 거짓 선지자-되기에 전념하니 도처에 하나 마나 한 말들만 무성.


물론 젊은 분들에게서도 아쉽다 이를 만한 게 아주 없진 않다. 여타 동네서점에도 빈번하게 거론되는 바 책은 오프 공간에서 살펴 눈(+스마트폰)에 담고서 들이는 건 인터넷 서점 이용. 주머니 사정 때문이라고 이해는 하지만.. 최근 일인데 주문 의뢰하며 품절판 아님을 확인함과 동시에, 대놓고 자신이 따로 구매할 수 있는가를 묻고는 결국.. 또 할머니/할아버지 문화누리카드(손주뻘로 가난과 무관한 입성인데..) 내지 이음카드(인천지역-전자화폐) 이용, 인터넷 서점에서 구하면 통상 10% 할인율을 밑도는 정가 판매 내지 5% 미만 할인율 대학교재 등만 구입할 적만 이 공간을 찾는 것. 알지요, 모르지 않습니다. 다만 너무 그리 약게만 굴며 스스로를 챙긴다 해도 종내엔 다치니, 자기 마음이더군요. 득실 따져 유리한 편을 취한다는 것이 의도치 않게 고립무원이게 되는 경우 적지 않으니. 뭐 그렇단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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