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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공간 Mar 02. 2022

앱노멀 이승에서의 우울증? 뉴노멀 출세간 '통화구'路!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위계와 반복에 대한 비판에 기초한, 산업노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평은 1970년대 말 무렵, 자본으로부터 에너지를 취했다. 모든 욕망들은 자본 외부에 위치해서 자본의 지배에 거리를 두는 세력들을 끌어당겼다.

정확히 그 반대의 것이 신新경제의 새로운 정보생산적 현실에서 일어났다. 욕망은 새로운 에너지들을 노동을 통한 기획[모험심]과 자기실현으로 불러들였다. 어떠한 욕망도, 어떠한 활력도 경제적 기획[모험심]의 외부에는, 생산적 노동과 사업의 외부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은 특히 창의성, 욕망, 그리고 자기실현을 위한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추동들을 흡수한 덕분에, 자신의 정신적, 이데올로기적, 경제적 에너지를 갱신할 수 있었다.
 (…)
경쟁은 신자유주의의 보편적 믿음이었다.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공격적인 에너지의 강력한 주입 ─ 즉 정신적 에너지의 부단한 이동을 창출하는 일종의 영구적인 전기충격 ─ 이 필요하게 되었다. 1990년대는 정신약리학의 10년이었다. 소위 프로작-경제의 시기였다.

열광적인 리듬들이 1990년대 중반의 금융, 소비, 생활양식을 지배하게 되면서, 신경프로그래밍적 물질들을 포함하는, 행복감을 유발하는 마약을 체계적으로 사용하는 결과가 발생했다. 붕괴의 지점까지 다다른 중단 없는 정신적 과(도)흥분에 시달린, 서구 사회의 점점 더 많은 나라들이 한판의 굿판에서처럼 밀레니엄 버그라는 도시의 전설을 불러냈다. 일단 그런 공상적인 위협이 사라지자, 실재의 붕괴가 닥쳐왔다. 그러나 신新경제의 집단 심리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지점에 다다랐다. 1999년 앨런 그린스펀이 '시장의 비이성적 과열'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의 말은 금융진단 이상의 임상진단이었다. 과열은 마약의 효과였고, 이용 가능한 정신적 에너지의 과도착취의 효과였으며, 사람들을 공황의 극단까지 몰아가는 관심[주의] 집중의 효과였다. (…) 마침내 프로작 파산crash의 순간이 왔다. (…) 2008년의 최종적 파국의 어렴풋한 전조에 지나지 않았던 이 위기는 더욱더 많이 정신병리학적 징후들과 스트레스에 영향을 받은 인지노동자 무리들이 가한 몰락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다니엘 에렌베르크는 자신의 책 『피로의 원인』에서 우울증[불경기]이 (특히 경쟁을 특징으로 하는 상황에 의존하는) 사회적인 병리학적 신드롬이라고 주장한다.

'우울증[불경기]은, 사회계급들과 젠더에 어떤 운명을 할당했던 금지들에 대한 권위 및 복종 규칙들과 규율[훈육]적 행위 모델이, 새로운 규범들─즉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개별 행동을 취하도록 밀어붙여 개인들에게 정체성을 강제하는─에 직면하여 붕괴된 이후에 전개되기 시작한다. 이 새로운 규범들로 인해, 우리 삶의 책임은 이제 우리들 각자에게 완전하게 할당된다. 우울증은 이렇게 해서, 부적절하다는 느낌에 의해 지배되는, 책임의 병리학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우울한 개인들은 과제를 감당하지 못하며, 자신의 정체성에 싫증을 낸다.'

우울증은 자기실현 이데올로기와 행복 명령에 깊이 연결되어 있다. 다른 면에서 볼 때 우울증은, 경쟁적이고 생산적이며 개인주의적인 맥락 외부에서 병리적인 것으로 확실히 간주되지 않던 행위를 심리학의 언어로 규정하는 방식이다.

'우울증은 도덕적 고통보다는 금지, 나태, 무력증에 의해 더 지배되는, 문제의 장場의 일부이다. 고대의 '슬픈 수동[열정]'은 행동의 블록으로 변형된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의 주도권이 인간의 척도가 되는 맥락 속에서 발생한다.'

경쟁은 위험한 자기도취적 자극을 수반한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 경제의 맥락, 특히 신新경제의 맥락과 같은, 대단히 경쟁적인 매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지만 오직 소수만이 선택되기 때문이다. 사회규범들은 실패의 가능성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이러한 실패가 정신병리학적 맥락에 할당되기 떄문이다.

(…) 신新경제의 또 다른 측면은 당연히 정신자극제나 항우울제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은폐/무시되고 배제되는 측면이지만 매우 결정적인 측면이다. 신新경제의 투기사投機師들 중에 프로작, 졸로프트, 또는 더 나아가 코카인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약국과 거리에서 살 수 있는 향정신성 물질들에 의존하는 것은 정신병리학적 경제의 구조적 요인이다.

경제적 경쟁이 사회 컨소시엄의 지배적인 심리적 명령이 되면 우리는 대중적 우울증의 조건들이 창출될 것이라 확신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이 실제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_프랑코 베라르디, 『노동하는 영혼』 中


☞ 전 이렇게 읽었어요오~ '0'/


'창의/창발'이 자본제에 내삽. 이후 '자기실현'의 '모험' 또한 벡터에서 스칼라로, 기투企投에서 투기投機로 제한. 자본으로 계측되는 성과, 자본 환산 목적이 아니면 무용한 것으로 치부되는 시간 두고 자기 영성을 자발적으로 소외시키는(시킬 수밖에 없는) 21세기형 인간. 소외, 따돌리는 데서 일게 마련인 불안을 병리로 가늠, 약으로 다스리는(?) 신新경제. 눈에 쉬 들지 않을지 모를 내용 당장 젖히더라도 '실패' 관련 주목. '정신병리학' 내로 배치─아니 위리안치─된 '실패'를 탈脫구축 재再배치 필요하리란 것.


김승옥(단편 「서울 1964년 겨울」) 빌어 고쳐 이르면, '채 오 분' 잇지 못하고 '끝나버리'더라도 '꿈틀거림'과 그'에 대한 얘기를' 지속함이 마땅하다 싶은 것. 시도, 가능한 한 지속하는 데서 찾으려던 주체 또한 복원된달지.


소셜 인정투쟁에서 밀려난 루저, 이를 자인하는 이상의 피해 의식 자체를 떨치지 못하는 상태로 불안. 한편 그에서 비롯하는 우울을 다스리노라 낭만적 정서로 접근? 이를 테면 "실패해도 괜찮아, 의연(?)한 당신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아름답다'라든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당신은 그 자체로 옳다'라든지, 힘을 내라 하다가 또 빼라 이르고, 하고픈 거 다 하면서 꽃길 걸어라 마라~ 서로 '다른' 우리 아끼고 존중하자~ 등에 이르기까지. 직면하는 사실로, 부대끼며 생채기 입는 사정과 상황은 제각각. 그에 반해 저와 같은 말글은 추린 보편이요, 여과된 추상으로 그 자체가 솔루션일 수 없음이다. 그러니까 유사 힐링은 현혹에 불과, 바로 그 낭만적 정서를 부추겨 소비를 촉진하려는 것뿐. 환원될 자본 수익이 최종 목적이란 건 '변함 없'다. 그러니까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이 '변함 없'음 아닌지. 이 '변함 없'음으로 해서 겉도는 것이고, 다시금 지각하게 되는 그 공허감/부질없고 덧없다는 느낌을 떨치려 유사 (힐링과 같은) 체험에 몰입.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소비를 지속가능케 하는, 이 시대의 아편 아닌가. 이것이 수다한 중독(-addiction)의 배경이지 않나 싶다. 타자는 물론 자신 착취에 여념 없는 챗바퀴 일상, 고단하지 않다면 이상하지. 안팎으로 첩첩-피곤, 그야말로 '피로사회'가 아닐 수 없지. 루저 낙인은, 밀려난 개인이 자기 '실패'를 책임지면서 오히려 도태 마땅한 처지를 유예시키는 인간적 처사에 따르는 사회적 비용을 일부라도 보전/경감시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내면화. ← 이런 의식 저변에 자리, 정신병리학 상 접근으로써의 처방 이뤄지는 구조.


하면 '실패'라 명명하여 구획/제한하는 세속의 맥락을 간파, 깨닫는 동시에 탈주 곧 출세간出世間─욕망으로 구축된 매트릭스에서의 이탈─이야말로 근본 해결책이지 싶기도. 이를 염두에 두고 세간世間에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새기자면 그만큼 출세간 지향에 열심이자 진심으로 출력되는 게 아닐지. 이 세계에서의 생동生動 자체가 출세간의 저편을 향하며 활발할수록 이편의 화폐-탈곡에는 절로 무덤덤이게 마련. 그러니까 자본 수익 환원 주류에는 느리지만 출세간.etc 쫓는 모험에 전심전력 절/차/탁/마. 어렵다 여겨지지만 막상 겨자씨만한 진심이면 충분. 이에 충실하려니 자본재 매트릭스에 저당 잡히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그만큼 쉼[休]을 오롯하게 실감하는 시간이 는달까. 그래서 E·P·L(Eat·Pray·Love) 인생 자체가 공부로, 이로써 밝히니 비로소 발견되는 주체요, 이 주체들 상호 간 빚는 교류야말로 이성理性 간 사랑. 이것이 이성異性 비롯 곧 육신에 기초한 사랑과 결부될 때 비로소 본래 깃들어 있던 신성神性이 우리 안에서 깨어나는 것일지 모른다.


음.. 이것이 어쩌면 지상에서 이루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거울상일지도. 중생 간 일체 되어 복원하는 불성佛性, 아닐까.


인용하면서 쉼표 일부, 위치를 달리 하였고(원문 충실 원칙 때문일지 모르겠다. 난 그저 우리 말로 풀어낼 적에 어순 고려하면 이쯤? 하는 생각으로 달리해본 것에 불과), '신경제'에 굳이 '新'을 덧댄 건 희박하지만 혹 '신경(안정)제' 같은 걸로 오인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네 뭐 그냥 그렇단 얘깁니다, 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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