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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공간 Mar 03. 2022

서점일기 - 어떻게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인가,에 붙여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서점일기


<알쓸신잡2> '어떻게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인가?'에 대한 박사들의 생각


부는 바람도, 펄럭이는 깃발도 아닌 흔들리는 네 마음 ← '일체유심조'의 골자는 먼저 6조 혜능 선에서 이렇게 정리되었다 하겠다. 그런데 유시민 선생의 표현, 참 그럴싸하지만 결국 입말로 겉도는 '일체유심조'를 그대로 수용, 당장의 문제로 불거지는 '사회구조'와 대립시킨 것일 뿐. 그러니까 애당초 위로니 치유니 등등으로 외주화 곧 힐링이 산업화 되는 자체가 바로 그 사회구조/경제체계에서 비롯한다는데 인식이 미치지 못한 때문이겠지. 때문에 정正으로든 반反으로든 하나의 인자로 대립, 인정투쟁 벌이는 변증 관계로 파악하는 것. 형성되는 관계의 총체를 '사회'라 한다면 '구조'는 그 관계들 가운데 단단하게 굳어 뼈를 이루는 것일 터. 그런데 만일 그를 구성하는 낱낱의 인자들로서 사람들의 욕망이 말처럼 백인백색 '다르다'면 굳이 그 욕망의 '다름'을 이해해야 하니 마니 이를 필요도 없다. 그것이 뼈대를 형성하더라도 유연함을 잃지 않을 것이기에. 바꿔 말하면 그야말로 '느슨한 연대'일 테고 그로써 이미 제각각의 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이기에.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개별 욕망은, 자본의 '선택과 집중'을 그대로 내면화한다. 베블렌과 지라르는 이 면면을 각기 부분적으로 바라보았달 수 있겠지. 각각의 욕망이 이미 화폐에 의해 서열화! 됐지. 구조가 욕망 간 경쟁을 촉발하고 있다고;; 이를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니 외주화 이룬 힐링이고. 입말로 겉도는 '일체유심조'를 실체로 붙들려는 노력은, 유사 체험 위한 소비로나 휩쓸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제 무명無明/무지無知을 깨운다고 따르는 선지先知/선각先覺이 가리키는 방향이 저러한 데 다른 선택지? 그것은 발견되지 못한 미지未知로 여전如前. 와중에 앞서 이른 것처럼 유사 체험으로 쏠리니 힐링 산업의 성장동력으로 기능하는 것.


욕망의 '다름'을 이해하라는 말은 얼마나 달콤한가. 그러나 그에 안주할 게 아니라, 어째서 그렇게나 가지각색인 욕망이 자본수익환원이라는 보편에 함몰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의문을 쫓아야 하지 않을까. 특히 상대적 자유를 누린 식자층이라면, 이러한 의문에서 자기 자신을 떼어 거리를 두려는 것이야말로 책임 방기, 아닐까? 유연성을 간직해야 마땅한 골조는 왜 고착되는가? 대체 왜 이 사회구조 내 층위 간 이동은 점점 제한되는가? 어떤 연유로 구조를 이루는 구성체가 시대를 가로지르며 계급으로 굳어 내리 세습되는가? 이같은 의문을 소거시킨 채로 행복 찾기라니.


영상 가운데 유희열이 재미삼아 이르긴 했지만, 만일 강남 무늬 좌파라면? '빌딩 소유라면 좀 다르지 않겠나'라는 식으로 재미삼아 이야기 할 순 있겠지. 그렇지만 소유 과정에서의 정합성 판단이, '합리合利야말로 합리合理'라는 식에 의식 수준에서 분명하게 인식하였든 그저 부지불식간 의지/의존이든 앞서 언급한 의문을 제기하는 바 없이 그대로 수용할 뿐이면, 유시민 선생과 같은 견해로 얼마든 '중도'를 표방 아니 가장할 수 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실제 중도일 수 없음은 말해 무엇. 중도라는 믿음은, 불완전 존재로 이도 저도 아닌 상태의 실존적 불안을 잠재우는 처방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어차피 피차 간 틀릴 수밖에 없다면 좀 더 분명한 태도를 취할 수는 없는 것일까? 애는 '자기주도학습', 어른은 '자기OO경영' K-시류에 항시 탑승하였던 존재들로 그거,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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