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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공간 May 04. 2022

욕망의 거처를 신념의 처소로 탈바꿈, 조력하는 사각공간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서점일기 - 지난 달 30일자 <한겨레> 지면에 실린? 실은! 내용을 다시 옮겨본다.

분량 제한으로 못다한 말을 덧붙이면서, 어색한 부분들을 조금씩 다듬었다.



지역에서 소규모 서점을 업(業)으로 꾸리며 밥을 비는 처지로, 운영 간 어려움이나 그와 맞바꾸어 일구는 낭만에서 연대까지, 등등의 이야기는 벌써 여러분(*서점주/책방지기)이 남긴 바이니 저는 좀 다른 얘길 해볼까 합니다. 물론 범람하다시피 하는 ‘자존’. 제각각 오롯함을 겨루듯 주장하는 속에서 한낱 서점주로 더 무슨 말을 보태겠어요. 그저 ‘술이부작’(*논어), ‘여시아문’(*금강경)과 같은 표현처럼, 기댈밖에 다른 도리 없지요. 그런 한편 그로써 족한 줄 아니 다행이라 여깁니다.


애당초 말을 글로 앉히는 과정부터 조명과 무관한 형편을 자처함이니 소위 음지, 그늘 또 낮은 곳이야말로 그 처소로 더할 나위 없는 것. 이미 우리에게 ‘오래된 미래’로 자리해 있는, ‘원효’ 스님이야말로 탁월한 모델 아니겠어요? 글 짓는 일이 마음 실어나르는 수레[乘]를 짓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보인 바이니. 이리 지은 글을 읽는 건 지은이의 말을 가만히 듣는 훈련. 더하여 사이사이 이는 나름의 생각 견주니, 그 자체로 주고받는 대화 시뮬레이션. 동네와 마을에 자리하는 서점/책방은 이를 조력하는 공간으로 스미면 그만. 그러니 점주든 지기든 무어라 이르든 이를 소임으로 여기면 절로 충실할 뿐.



 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우리 자신의 작은 자아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 삶이 전체와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을 꾸려가는 것이다. (…) 유일한 실재는 전체성(oneness) (…) 우리는 과연 자기 중심(self-centered)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의 세계에서 어떻게 이 자기 중심주의를 뿌리뽑을 수 있을까?

_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中  


읽은 바가 대체로 이러하니 굳이 애쓰지 않아도 절로 떠올라 수시로 동기화. 때문인지 ‘부는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6조 혜능) 아닌 형편으로 굳는 데 그래도 좀 수월한 편이랄까요. 그렇지만 이런 저 역시 저라는 터울 벗어나면 곤란을 절감합니다. 모자란 그대로 서로 간 도반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덤빈 세월 만4년에 이르지만 내내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 다른 누구의 문제라기보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음을 고백하는 노래(*가시나무) 가사처럼 이 마음에 구석구석 똬리 튼 숱한 ‘나’의 아우성이 문제. 이렇게 부족한 면면을 내내 실감하는 중에도 언급한 대로의 서로 간 도반 되는, 그 관계야말로 민주의 요체임을 느끼는 바여서 두드리길 가능한 지속할 따름이죠.

 



사각공간(思覺空間)이라 이름하게 된 연유. 처음은 대학 등록금이나 벌 요량으로 공익광고 공모전에 응하며 지은 것인데요. 해우소를 모티브로, 한 평 남짓 화장실의 쓸모를 떠올리면 깨끗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지 않냐는 식. 전역(1997년) 후이던가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합니다만.


그런데 이리 지어두고 지내보니 일구는 생활인즉 죄다 육면체 공간 속. 각을 세워 부딪는 전장(戰場)은 물론 그와 구분 아니 분리되는 쉼터 모두 육면체 공간 속(한편 이리 짓는 구분/구별/분리는 사람의 ‘자기 소외’와 꼭 닮은 꼴). 혈연 서사를 바탕삼는 가정과 맞물리는 집이니 그야말로 신토불이(身土不二)여서, 그렇게 아파트 위시한 부동자산 축적에 혈안이요, ‘육면각체’(*시인 이상) 쌓아 올리는 ‘건축’을 ‘무한’으로 거듭하는구나~ 해요. 전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쉼 얻는 그 터를 마련하는 데에만 스트레스 이만저만 아니니 그 물성 고스란히 내면화. 따라서 날카롭고 완고해지는 인간의 격(格).


여기에 유연함 일깨워 틈을 자력으로 내게끔 하니 다름 아닌 감성과 이성 간 조화 이룬 말글. 이로써 내면에 구축하니 영혼 정주(定住)의 ‘밀실’(*최인훈). 이것 없이 ‘광장’(*최인훈) 사회 만으론 아연실색, 죄다 공황에 이르지 싶어요. 해서 사각(四角)의 ‘광장’ 사회에서 정주할 공간을 내면에 가꾸도록 돕는 말글 전하는 곳이란 의미를 새로이 새겨 사각공간(思覺空間)이라 이릅니다.




 어차피(於此彼) 피차(彼此) 간 빈번한 거래(去來)로 순간을 채우는 삶이어도 종국엔 빈손[空手]. 그러니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 하면 사는 동안 이 육신을 욕망의 거처에서 탈바꿈, 신념의 처소로 가꾸는 이들로 세상 또한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는 듯싶어요. 그러니 ‘단 위에 오르는 한 사람을 주목’하는 방식을 그대로 답습, 미시 단위로 쪼갠 무대 마련보다 그 ‘단을 고르게 만드는 열 사람’(*그람시/신영복)들로 함께하는 공간, '동네서점은 이거면 돼!!’라는 데 닿아 있긴 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문화거점으로서 서점 비롯한 공간의, 운영상 수익을 도모하자고 세간의 이목을 끄는 방편으로 각 지자체 기관 등에서 거듭하여 제작하는 지도를 비롯한 등등의 사업은 이제 충분하지 않나 싶어요. 그보다 중한 건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자력(自力)으로 그려내는 영혼/정신의 지도일 테니. 서점/책방은 이를 조력하는 말글 전하는데 힘쓰는 서점으로 책방으로 독자 여러분께 가닿는 게 당연하다 싶어요. 규모의 대•중•소를 막론하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스타'가 아니니까요. (자본 수익 환원을 염두에 둔) 관심을 추수하자고 마련하는 무대와는 가장 거리가 멀고, 또 멀어 마땅한 곳이 동네에 그리고 마을에 자리하는 서점/책방이지 않나 싶어요. 스타를 프로듀싱하는 시스템을 인입시키는 식? 그런 단상과 무대를 마련하는 듯싶은 데에 지원하는 예산이면 차라리! 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 등에 전문사서 한 분 들이는 데 쓰는 것이 백년대계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게 민주의 토대를 형성하는 밑거름, 아닌가요?     


 ‘헤세’가 『유리알 유희』 서문에서 예견한 대로의 ‘잡문 시대’ 도래를 느끼는 이즈음(물론 시대마다 유사한 모습으로 귀환 거듭하는 것이겠지만). 저로서는 이를 건너기 위한 지혜의 방편 역시 바로 그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취해 들였는데요. 내용은 간명하니 아래와 같습니다. 


“저는 깊은 명상에 잠기고, 끈기 있게 기다릴 수 있습니다. 또 단식도 할 수 있구요.”

_헤세, 『싯다르타』中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되묻는 ‘부자 상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시선. 이런 시선으로 서점/책방 등의 소위 '문화거점'이라 이르는 공간을 바라보는 수요/지원 해당기관의 결정권자/실무자. 심지어 동네서점주/책방지기로 제가 꾸리는 공간을 이렇게 바라본다면 글쎄요. 저는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되묻고픈 거죠.

갈급하나 좀처럼 해소되지 못하니 넘치는 ‘자존’이란 표현처럼, 바라마지 않는 인간미 또한 앞서 인용한 내용처럼 절제를 배경 삼은 소박함에서 겨우 드러나는 만큼. 그런데 이로써 풍만해야 할 판에, ‘상인’과 다를 바 없는 눈높이로 팽배라면, 이런 접근으로 크게 다를 바 없으면서 마치 그게 아닌 것처럼 보이는 데 치중. 표리부동에 위화감 느끼지 않을 독자, 있을까요?! 다만 크게 다르지 않은 형편으로, 자신이 찾는 바를 선명하게 인식할 수 없는 답답함을 안고서 방황을 연속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때문에 바로 그런 공간들을  찾는 것이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작가와의 만남' 등에 접속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독자 여러분, 그러고나서 돌아서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 그에 얹힌 마음, 갈급함이 가시던가요? 정말?! 외려 헛헛함이 크기를 키워 덧없음/부질없음으로 구체화되진 않던가요?! 자아상을 양극으로 찢어놓는 '자기 소외'를 기반으로 구축한 체계에서 '양극화'는 필연. 한 사람이 공급/수요 그러니까 생산자로 또 소비자로 49:51이든 51:49이든 엎치락뒤치락 미세한 차이일 뿐 전반적으로 균형 구가하는 체계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실상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번번이 배제/따돌림 당하는 일편이 24시간을 둘 셋으로 쪼개어 생산을 전담하다시피 하고. 바로 그 '손'에 의해 숨겨진 다른 한편이 거의 일방적이라 해도 과언 아닐 정도로 누리는. 이게 '양극화'라 이르는 이 체계의 실상 아닌가요?! 소규모 공간을 꾸리며, 소위 자영自營에 임하는 서점주/책방지기로, 책을 매개로 문화 등등을 필두로 세우는 이들이 다를 바 없는 표리부동으로 제 이해를 먼저 타산하는 형태. 그 헤아리는 수익이 미약한 플러스이거나 마이너스여서 딱히 문제로 겨눠지지 않는 것뿐. 그러니까 애당초 '다를 바 없는' 접근으로 과연 서점/책방!? 이게 지금 마땅하냐는 겁니다.¹




주제넘은 말을 늘어놓은 듯싶어 부끄럽지만 계속해서 남깁니다. ‘미움받을 용기’만으론 부족한 듯싶어요. 자아도취 함정을 ‘자존’으로 오해, 스스로 빠지게 마련이니. 꼬리 물고 이는 물음을 쫓는 모험에 게으르지 않기. 그로써 방황할지라도 기꺼이. 어쩌면 시대가 소환 거듭하는 사표(師表)는, 바로 이러한 태도를 당대에 책임으로 의식한 사람이지 않았나 싶어요. 그렇다고 어떤 특별한 이만 가능하냐면 그게 아니라고 일러주는 것이 이미 인류의 유산으로 전해지는 말글. 그것이 가리키는 바이고. 그러니 누구든 제가 가꾼 ‘밀실’ 바탕으로 거하는 곳곳에서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수행 가능.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는’, 특히 '어른'이라면 이제 좀 그래도 되잖아요.


사각공간(思覺空間)과 이를 꾸리는 저 또한 부족하나마 손/발 되겠노라 새삼 다집니다.

함께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__)




¹ 이를 두고 지난4년 이곳 브런치에도 꾸준히 올려두긴 했습니다만. 고민 없이, 그저 저를 돋우려 이를 가져다 제게서 비롯한 말인 양 구사하는 소위 독립서점주 또한 이곳 인천에서 목도한 바 잠깐이나 염오가 끝간 데 모를 정도로 뻗긴 했습니다. 이는 조만간 분명하게 짚을 생각니다. 작자의 작태가 뻔뻔함을 넘어 과해도 너무 과한 만큼. 끼치는 영향 생각하면 절대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싶고, 그리 좋을대로 두면 안되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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