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책 서문 살피며 책이 꾸려진 계기를 가늠해봅니다.
'5월에서 8월까지 저자와의 만남을 신청한 동네책방은 어디든 찾아가겠다는' 사계절 출판사 공문에 응한 곳, 그렇군요. 그를 중심으로 출판사 대표분과 만남 통해 책이 탄생한 듯싶군요. 들추어 잠시 훑은 바로 들어본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고. 들고 나길 거듭하는 업계인 만큼 당연하다 싶습니다. 하기야 안다는 것도 이름을 들어 안다는 것이지, 관내 지근거리도 아니고 대체로 마주한 적 없는 곳이니 실상은 모른다는 게 적확한 표현이겠어요.
전부 읽은 것도 아니니 뭐라 이르긴 어려우나 '가장'이라는 수사로 꾸밈이 가능한가, 어차피 꾸릴 책이면 단정이 아니라 의문일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은 합니다. 매일 도처에서 서로 간 부대끼는 속에서 크고 작은 악전(惡戰) 빚으니 이를 일러 일상(日常). 세간(世間)의 실상이 이러하니 따지고 보면 죄다 저마다 딛고 선 바로 그 자리에서 분투(奮鬪)하는 고군(孤軍). 체계를 수긍, 솟는 의문을 도외시 하면서 '자기 소외'를 내면화하니 이미 '인격화된 자본'. 물화(物化)로 격하된 인격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자본 소유에의 의지'인 만큼 당장의 자본 소유 여부로 구별짓는 건 무의미할 테고. 분열된 자아상이 고스란히 투영되니 체계는 고착, 전장(戰場)으로써의 일터와 휴식 취하는 공간 구별. 이러한 분리에 의문 부호 하나 떠올리지 못하는 상태로 자발적이라 여기니, 갈급의 정체를 모르고 방황하는 소비 활동을 거창하게 '노마드'라 칭하고. 공간을 비롯하여 새로움만 추구, 사냥하듯 쫓으며 SNS 전시해봐야 잦아들긴커녕 더욱 커지니 덧없음. 이를 실감하면서도 불분명하니 다시금 새로움을 사냥하는 소비 연속. 애당초 여읜 자족(自足) 임을 모르고서 만족(滿足) 만을 추구하니 곤고한 삶이요, 피폐해지는 영혼. 이게 '중독'이 아니면 무엇인가. 마치 개신교 성경에 언급된 사마리아 여인처럼, 갈급함의 정체를 모르고 방황 연속하던.
세간의 사정과 형편이 이러하건만, 왜/어째서로 옮아가지 못하는 시선이야말로 문제이지 않나 생각은 합니다. 해서 어느 곳을 특정하여 마치 그곳에만 이를 테면 이 '서점/책방'이라는 곳에만 '문화'를 비롯하여 '낭만'이니 '아름다움' 등등 갖가지 수사가 가리키는 바가 고인다 여기는 자체가 허위의식 아니겠나 싶고요. 나아가 이를 자처하는 곳이라면 그야말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지경되는 게 아닌가 싶을 따름입니다.
'눈 밝은 독자'라는 표현처럼, 작자는 물론 출판계 또 출판물 유통하는 서점 업계에 드는 치들은 바로 이 '눈 밝은 독자'에서 전화되지 않나 싶습니다. 자본 수익 환원은 물론이거니와 입신양명 서사와도 거리두면서까지 덕업일치의 궤에 오르는 자체가 애당초 그야말로, 도처의 비명인 세음(世音)에서 눈 돌리지 못하고 자꾸 보게[觀] 된 때문 아닌지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자고 들어 아는 것만으로 요원하던 실천을, 당장 소수로 배제되기 일쑤인 이웃과 자기 안의 그 어떤 소수성(少數性)이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는 '감수성'으로 해서 동기화 되니 자연스레 옮아가지 않냐는 겁니다. '눈 밝'다는 표현은 이처럼 관(觀)-세음(世音)의 보살행과 맞닿아 있지 않습니까? 설법(說法)을 담는 그릇으로 글에, 눈이 익은 이들이라면 자연 이리 되지 않나요? 하면 계속해서 분리를 낳고 조장하며 기어코 양극으로 가르고 찢어놓는 체계와 그 체계를 확대재생산하는 문법과 방식을 그대로 아무 생각없이 따르진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물론 '악전고투'로 '아름다움'을 영예로 취할 수 있겠으나 그러자면 더더욱 (누가 되었든 간에) '표리부동'과는 거리를 두어야 할 겁니다.
인천에서 사각공간(思覺空間)이라는 서점을 5년 째 운영 중입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훑었을 뿐 제대로 살핀 바 없으나 다만 한 곳, 눈에 드니 '북극서점'. 구립도서관에서 마련하는 '서점 간담회' 비롯하여 이런저런 기회로 몇 차례 마주한 적 있어 유일하게 읽어내렸습니다. 그런데 내 마주하여 겪어본 바와 책 본문 내용에서 내비치는 모습 간 차이가 너무 커서 괴리라 해도 과언 아닌 느낌. 오해여서 불식됨이 아니라 외려 일었던 의구심 더하니,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넘기는 것 만이 능사는 아니지 싶어 겪은 바를 바탕으로 남겨봅니다. 소위 '객관', 빌고픈 심경 없지 않으나 딱히 기대는 않습니다.
[부평구문화재단] 관내 문화공간 등을 '명소'로 소개하는 책자 제작 관련 ─ 2018년 4월 개점 후 부러 나서서 개점 사실 광고에 힘을 쏟던 그렇지 않던 홍보, 특히 외부 기관 등에서 먼저 알아보아주는 것처럼 반갑고 고마운 일도 없을 겁니다. 다음해인 '19년도 2월께였지 싶습니다. [부평구문화재단]에서 문화공간 등을 '명소'로 소개하는 책자를 제작하기 한 듯싶었어요. 관내 공간 취재부터 글로 다듬어 앉히는 편집까지를, 기존 그러니까 먼저 자리해있던 문화기획자를 표방하는 등 관련 여러분께 맡긴 것 같았습니다. 우리 사각공간 취재는 북극서점 대표분이 맡았고. 사전, 직접 통화 후 일정 픽스. 그런데 픽스했던 일정 해당 시각에 오질 않으니 전화만 세 번, 문자를 해도 답 없는 상태로 흐르길 2,30여분. 이때가 공간주로는 첫 대면(서점 차리기 전 수 차례 방문, 책도 사고 스티커 등 얻기도 해서 나름 호의를 품고 있었음)인데 그러고보니 이날부터 이후 '서점 간담회' 등 나는 '북극서점' 대표분이 단 한 번을 제 시간에 자리한 모습, 보지 못했군요. 왜 어떻게 늦었는지 사과는 없었습니다. 크게 중한 일 아니니 나로서도 넘겼고. 그런데 본격 인터뷰 전 '꼭 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겁니다. 앞서 언급했듯 광고도 나서서 발로 뛸 판에, 들어온 홍보 기회를 내가 나서서 걷어치울 이유, 없지요. '아닙니다, 해야지요' 했습니다. 이날 저 '베드로'도 아니고, '인터뷰, 꼭 하지 않아도 된다' 세 번을 거듭하는 만류(?)에 '아니 제가 왜요;; 안 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역시 세 번을 부인하면서 하겠노라 의지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대뜸 첫 질문이 '대형서점에서 일하다 어떻게 이곳에 자리하게 되었는가?'였는데 나로서는 당시 누구에게 떠든 바 없고 떠들 생각도 없었기에(관에 계신 여러 선생님 말고는, 여타 독자분께 떠들 만한 배경도 아니거니와, 그쪽과는 다른 길을 모색하며 꾸려보자 나선 것이니 더더욱 함구할 생각이었으니) 좀 놀랐습니다. 어떻게 알았을까 잠시 떠올리다 아마, 서점전수조사 후 직접 찾아주셨던 구립도서관 사서 선생님 통해 이야기가 된 것일지 모르겠단 나름의 짐작으로 넘겼지요(후에 미루어 짐작컨대 전화번호 레터링 서비스에 등록해둔 걸 내 잊고 삭제하지 않은 때문에 알게 되었나 싶긴 했고). 그래서 설명은 하되 '오프 더 레코드' 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이후 책이 되어 나온 내용 살피니, 버젓이 올라 있는 겁니다. 그것도 도입, 첫 문단에. 의아했습니다(후술하겠지만 이 책을 받아들기까지도 매끄럽지 않았고). 이후 인터뷰 잇는 데, 이름짓게 된 연유부터 자리하게 된 배경을 계속해서 설명하려니 중간에 끊고는 저가 염두에 둔 콘셉이 아니랍니다. '인터뷰어가 인터뷰이의 사실 관계 확인 비롯하여 듣기 전부터 재단을??', 당황스러웠습니다. 딱히 중언부언 내용도 아닌 데다 '명소' 이전에 자리한 공간 나름의 색은 정체성으로 분명하게 전해져야 마땅하지 않나 싶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닐며 들르는 여행이 콘셉'이라면서 자르니 지금 떠올려도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사각이 그저 네모로 각진 사각(四角)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思)+각(覺)의 조합으로 확장을 뜻하는 데 이게 중한 데 이것이 정체성 이루는 핵심이건만 이를 빼고서 전하겠다? 그걸 왜 자기 눈높이에서 마음대로 마름질하는가. 왜 '인터뷰,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거듭하여 일렀나. 이것이 공간주로 처음 대면 후 인 내 첫 의구심이었습니다. 그래도 인터뷰 마치는 순간까지 공공기관 납품 관련 당면한 현실과 필요성에까지 언급하였습니다. 했더니 '자신은 모르는 일'로 간단히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럴 수 있지요. 저야 이쪽에서 밥을 빌어 온 터이고 제쪽에서 보면 이런 사정에 전무한 신생이야말로 '북극서점'이니.
제작 후 보내주겠다는 책자가 두어 달이 지나도록 닿질 않던 차. 마침 해당 문화재단에서 마련하는 <브런치 콘서트> 담당 선생님께서 임시 가판 두어 동네에 서점이 자리해 있음을 알리는 게 어떻겠는가 제안 주셨습니다. 역시 마다할 이유 없으니 흔쾌히 아니 이렇게 살펴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지요. 4월부터 6월까지 섭외된 관내 서점/책방이 콘서트 관람 주민과 마주할 기회. 당시 4월 첫 콘서트 자리가 '북극서점'(당시 선생님께서 어느 때가 괜찮은가 묻기에 이렇게 자리 마련해주시는 것만도 고마우니 편하신 대로 말씀달라 했었고. 일자를 주장한 편을 우선 배정하였지 싶으나 이건 문제 아니니). 예의 그 '명소' 소개 제작 책자 진척도 문의할 겸 가판은 어디서 어떻게, 또 실제 주민과는 어찌 마주하게 되는가도 살필 겸 해서 '북극서점' 나오는 4월에 문화재단 공연장 찾았습니다. 당시 대표분이 팔을 크게 흔들며 내 상완 부위를 툭툭 치며 세상 반가운 것처럼 맞아들이긴 했는데 '인터뷰, 하지 않아도 된다'를 세 번 거듭 이르던 때의 느낌과 너무 달라 어떤 위화감에 사로잡히긴 했어요. 어리둥절한 대로 그저 나도 웃으며 예의 그 책자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제책 마치고 이미 전했다고;; 아직 못 받았는가 하면서 담당 선생님께 확인해주겠다 하기에 연락처를 주시면 제가 직접 통화하지요 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가판 신경쓰고 바쁠 터인데 이런 건 제가 직접 통화해도 되는 것이니까요. 담당 선생님과 통화하니 잊은 건 아니고 전해야지 하다 놓치신 것 같더군요. 그래 내 오늘 왔으니 받아가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렇게 받아들고 살피니 앞서 언급한 바대로 '오프 더 레코도'해줄 것을 당부드렸던 내용이 떡하니 자릴 차지하고 있더군요;; 죄를 범한 것도 아니니 그러려니 수긍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심야책방 등 모임은 물론 오시는 분들과 무슨 말이라도 나눌라 치면 스스럼없이 이야기, 내쪽에서 꺼내들긴 했어요.
그럴 수 있지 했습니다. 처음 인터뷰(?) 이후 녹취본 공유 부탁, 받아보니 그 부분은 없었으니. 복기하며 잊었나 보다 했어요. 그리고 6월 <브런치 콘서트>를 앞두고. 담당 선생님께서, 사전 섭외가 되었든가 아니면 섭외가 되지 않았든가, 아무튼 서점이 자리하지 못하니 4월, 5월 진행하셨던 '북극서점'과 '사각공간'이 함께 자리하면 어떻겠나 하셨지요. 역시 마다할 이유 없지요. 아니 외려 어떻게 해서든 지역민과 마주할 기회라면 부러 나서서 마련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할애된 기회를 저어할 이유가 없잖아요. 나름 신생인데. '고맙습니다!!', 했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날아드니 비보;; '북극서점'에서 마다해서 어렵게 되었다고. 나름의 사정이라면 어쩔 수 없다 여기면서 조심스레 여쭈었습니다. 혹시 '어떤 사정으로 못하겠노라 하든가요?'라고. 그랬더니 '콘셉이 달라서'라는 말씀 전해듣고는, 내 뭘 잘못 들었나 싶어 한 2초 멍~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지역민과 만날 기회로 보면 목마른 형편이긴 오십 보 백 보일 터인 데. 콘셉이 같아 겹치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게 왜 문제가 될까요? 동일한 의문을 떠올리며 그대로 선생님께 딱히 묻는 것도 아닌 말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웃음 짓게 되더군요. 당시 담당 선생님께서도 듣고 그냥 웃으시더라고요. 이러니 좀 4월 맞이하듯 반겨 맞는 듯한 태도에서 느꼈던 위화감이 괜한 건 아니었구나 했습니다. 이상하더군요. 인터뷰 당시 첫 질문, 그래서 '오프 더 레코드' 당부에 따라 녹취도 하지 않은 내용을, 떠올려 글 첫머리에 남긴 것이나 하지 않아도 된다 강조(세 번 거듭하니 강요처럼 느끼기도 했고)한 것도. 뭔지 모르게 석연찮은 느낌. 사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뭐 대단한 잘못씩이나 되는 것처럼 그러는 게 외려 과한 처사일 겁니다. 문제삼을 정도의 일은 아니죠.
사실 서점 오픈 후 얼마되지 않은 때 <휘파람 마켓>이라고 이 '북극서점'이 소위 기획하여 [부평구문화재단]과 함께 마련한 행사가 있었지요. 지척인데 열리고서야 알았습니다. 다시 찾아보니 2018.5.26.이군요. 생긴지 한달 남짓 신생인 '사각공간'이 참가할 수야 없지요. 사전 신청 등 이미 받아두었을 테고(빠져서 섭하거나 삐친 거 아니니 오해 마시고요). 전 다만 우리 '사각공간'에서 들였던 독립출판물 작가분도 참가함을 알고 조용히 가서 직접 추가 매입해왔습니다. 그런데 가서, 해당 작가분 찾는 동안 잠시 둘러보니 셀러로 참가한 몇몇 삼삼오오 무리지어 볼맨 소리를 하는 걸 뜻 아니하게 듣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POP!!으로 UP!!되는 페스티벌을 기대하고 참가한 분들이면 그럴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사실 그런 건 쉽지 않지요;; 주최하는 편도 참가한 편도 모두 이해하는 한편, 저는 저대로 다만 '누구를 위한 행사인가'를 다시금 새기는 계기였지요. 저자도, 독자도, 서점원도 아니하는 것보다 그래도 낫지 않는가 해서 마련하는, 불가피한 사인회 같은 자리는 제발 말자는. 나아가 1:多 구도, 다수를 갤러리&들러리로 결국 저와 제 경력/이력을 비롯하여 브랜드고 뭐고 간에 자기 중심 지형 만을 돋우는 따위는 애저녘에 말자 하고. 이건 아니다 싶거든요. 이를 제게 가르치고 가늠할 향방 가리킨 게 다름 아닌 책이고. 현업 종사 당시부터 거듭한 고민, 이를 우린 끝에 겨우 가까스로 닿은 형편. 그러나 바람직하다 싶은, 지금 필요한, 옳은 바이기에 '박리(博利)'여서 '다매(多賣)'하지 않고는 생존 곤란한 업(業)에 임하면서도 외려 '사즉생(死即生)'이면 '궁즉통(窮即通)'이려니 꾸릴 힘으로 화(化)한 것이고요. 때문에 지원 사업 비롯하여 국민 세금 소위 혈세를 지원받는 입장으로 제공해 마땅한 가치에 우선하여야지 사업 영위 위해, 뒤로 수익을 타산하면서 겉으로 문화~ 접근은 아니라 수차례 언급하였던 것이고요. 이를 '19년 11월께부터 다음 <브런치>에도 남기기 시작했으나 그보다 오래 전 모 서점 종사 당시 '마케팅 게시판'에 읽은 책 내용을 병기하며 서점이라면 서점인이라면 좀 이러저러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저러 했음 한다 남겨두기도 했고. '라떼는 말이야' 되는 듯싶어 이만 줄입니다만 아무튼. 그런데 앞서 인터뷰 당시 납품 관련 문제나 그래서 필요함을 역설하는 데에 '모르겠노라' 이르던 '북극서점'주의 변천이라 해도 좋을 변화(?), 하도 기가 막혀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저로서는. 페스티벌도 그렇거니와 '연수구책축제' 때도 마련된 무대에 나와 앉아 기타를 손수 치면서 노래를 읊조리는 모습까지. 그에는 하나같이 나/자기/자신으로 세간의 이목을 그러모아 추수하려는 열망에 남다르게 열띤 것으로 저는 보았습니다만. 앞서처럼 한창 서점의 책무를 강조하니 언젠가부터는 난데없이 '독립출판 스테이션'을, 제가 주도하겠다는 식으로 던지더니 작년 말께 '서점 간담회' 자리에선 이 모든 고민을 홀로 깊이 안은 끝에 낸 답인 것처럼 문화를 제공하기에 지원을 받는 것이라며 기성 서점 한 곳 대표분에게 웅변. 내 늘 이르던 말이요, 남겼던 글이 남의 입에서 그대로 재생되는 바를 목도하니 기도 안 차긴 하더군요. 그냥 웃으며 지켜봤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럴 정도로 고민 깊었다면 모를 리 없는 '도서정가제'와 그 안착에까지의 배경이나 왜 들어서게 되었는지 연유 등등. 그렇게 열변 토하더니 좌중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었다 여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의 그 매입율 낮은 '온라인 서점 알X딘'을 이용하면 좋다면서 구체적인 요율까지 언급하더군요. 이게 처음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두 차례 그러니까 그때까지 총 세 차례 언급. 이러니 이른 말의 진위를 굳이 따져묻지 않아도 간단히 그리고 충분히 짐작가능하지 않겠어요? 타인이 오래 겪으며 고민한 데서 비롯한 바를 저를 우선하여 세우려니 급급하여 가져다 쓰는구나. 이런 거 '아전인수'의 전형 아닐까요. 구립도서관장으로 새로 오신 분은 이에 맞장구 치면서 일본의 동판·서판 운운(저 또한 이미 오래 전 주워들은 풍월로 앞서 언급한 서점 몸담았을 적 해당 게시판 게시글로 내용 남긴 바 있고, 브런치 등에도 언급한 바 있고)하면서 '교보'가 들어와 문제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더군요. ─ 아, 그전에 저는 이 분이 부임하고 가장 눈에 띈 변화는, 이전 관장분(이희숙 관장님)이 개방, 다른 사서 선생님들과 함께 사무 보던 공간이 통으로 '관장실'로 바뀐 것이었습니다. 그럴 수 있지요. 관장으로 찾아주시는 손님 접대 위한 응접 기능을 염두에 두고 복원. 그렇잖아요? 이를 염두에 두면 충분히 그럴 법 합니다. 그런데 회기 년에 그렇게 맞아들여야만 하는 손님이 얼마나 되는 것일까요? 애당초 그런 손님의 격은 또 어떤 레벨일지 저로서는 가늠이 되질 않습니다만;; 시민으로 그렇게 찾아가 그 자리에서 대면할 수 있,다고는 하겠지만 과연;; ─ 제가 이 업계에 들 당시 도매처 가운데 상위 그룹(어차피 그래봐야 손가락으로 꼽는 정도가 전부)에 속한 '송인'이 자빠진 것만 세 번째입니다. 들은 것으로 한 번, 목도한 것으로 두 번이군요. '인터파크'도 곤란한 지경되어 실상 놔버리는 현실서 도매처 '북센' 급을 어떻게? 누가? 무슨 돈으로?? 와중에 오프에 그래도 탄탄히 뿌리내린 '교보' 들어와 (출판사로는 딱히 어떠하다 이르기 어렵지만;;) '북센' 독주를 견제하니 매입율 자체도 조정되다시피 하는 판에, 이게 '조삼모사'면 알*딘/Y*s24 B2B 거래하며 손 안 대고 코 푸는 형식으로! 동네서점 돕자고 내민 손길에 코빼기 한 번 비추는 바 없이 알*딘/Y*S24 박스째 (작은)도서관 등에 택배 보내는 작자들이 '나 동네서점주입네' 떠드는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 아닙니까? 모르면서 아는 척, 관심 바탕으로 저를 돋우고 제 수익으로 환원 거두는 데에만 혈안이니, 남이 이른 말 가져다 임기응변 연속하게 됨 아닌가요? 혈세가 재원이라니, 자신 같은 이가 받아서 누려 마땅한 것으로 여기니 '혜택' 운운하는 것 아닌가요? 이를 보고도 그저 '문화기획자'이니 더하여 '여성CEO'라고 조명하고 살펴주는 관내 구립/교육청산하도서관 실무진은 물론이거니와 구청/시청 관계자 여러분. 답답합니다. '여성'이란 출신 성분이면 태생적 페미니스트인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인터뷰 당시에만 납품 관련 이른 것도 아닙니다. 인근 새로이 자리한 독립서점 비롯하여 부평구 관내 10여개 서점이 뭉쳐 서로 간 보완하면서 납품 문제도 적극 대처 이상 대안 찾고 제안해보자 협의체 꾸렸던 게 2020년. 나/자기/자신 그런 중심주의 저로서는 참 그래서 협의체 속한 서점 가운데 연장자이신 '어!서점' 대표분이 협의체 성격과 지향하는 바를 바탕으로 함께할 것을 제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답인즉, '딱히 관심 없고, 언제 서점 그만둘지 모르겠다'는 것. 그런 이가 얼마 뒤 '서점 간담회' 자리에서 마치 관내는 물론 모든 서점주/책방지기의 대표인 것처럼 저리 말하는 모습을 곁에서 목격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아니 사이에서 '어!서점' 대표분이 다른 말을 전했거나 혹은 거짓을 일렀거나 그랬을까요?! 글쎄요, 기성 서점주로 어떤 면이 드러나는 바를 저도 느끼긴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요? 역지사지 해보아도 저가 '어!서점' 대표분이면 '북극서점'주에게 다른 말을 전하거나 또 말과 다른 내용을 제게 전할 것 같진 않습니다만. 그렇잖아요?!
미처 이르지 못한 내용 수다하건만 중간에 건너뛰고도 이 정도이니 좀 더 디테일한 부분 세세히 짚어 이르자면 끝이 없을 듯싶으니 우선 이만합니다. 아, 공교롭게도 이 책 본문에 '북극서점' 대표분이 언급한 '돌멩이 수프' 내용 역시 제가 서점을 공동체와 결부지어 이른 바, <심야책방>을 비롯하여 <동네서점은 문화사랑방>, <북타운 부평> 등 모임에 참석한 분은 아실 겁니다. 애당초 본문 분량 한정이어서 내용을 축약한다 해도 직접 읽어 아는 것이면 내용이 달라지진 않겠지요!! 더구나 제 서점을 그와 결부지어 설명할 정도라면 말입니다. 아닙니까?!
단답이든 논술이든 중요한 건 답지로 내는 주부가 아니라 술부로 실천함일 터인데, 자기 삶을 우선하여 도모하자고 입말로 겉도는 형편을 임시방책으로 모면해가는 치들. 이런 이들이 승승장구하게 마련인 세상?! 그게 바람직하진 않더라도 다 그런 것?? 이럴 거면 책을 뭐하러 가까이 하며 읽습니까?? 곡학아세하려는 제 뻔뻔함과 맞서자고 배움을 연속하는 것이잖아요? 소위 배웠다는 이들은 이미!! 편히 앉아 배우는 데 들일 시간을 상대적으로, 사회로부터 할애받아 누린 축에 속한다 여김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권리보다 책임으로 우선 동기화하는 것이고!! 할 수 있고!! 아닙니까?! '남부럽지 않게'를 필두로 각자도생이 답인 것처럼 매몰된 지경의 사회에서, 그게 아니라!!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를 세울 수 있어야 하지 않냐는 겁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죠!! 안다는 자체가 이 부끄러움을 먼저 의식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평범한 민낯들로 가담/공모하여 구성하는 악(惡)과 거리두는 사회를 구축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