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방」은 그해 여름 비시(Vichy) 정부의 교육 당국이 보부아르에게 내린 해직 선고에 대한 응수이기도 하다. 1941년 겨울, 보부아르가 아꼈던 한 (여)제자의 부모가 보부아르를 상대로 교육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는데, 그녀가 수업 시간에 지드와 프루스트의 작품을 읽히는 등 미성년자에 대한 부도덕한 교육을 일삼았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1943년 6월 보부아르는 근무하던 학교로부터 해임 통지를 받는다. 「닫힌 방」은 부도덕한 부르주아 집단이 보여 주는 가식적인 가치 기준에 맞서서 동성애자의 도덕성을 복권하려 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세 명의 등장 인물 중에서 가장 명철하고 가장 죄질이 가벼운 이네스가, 돈 때문에 결혼하고 겉으로는 도덕을 내세우면서 뒤로는 간통을 일삼았던 에스텔보다 더 당당하게 그려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_작품해설(역자 지영래)
장폴 사르트르,『닫힌 방 · 악마와 선한 신』, 민음사
열린 방이라고 해서 밝기만 한 것도 아니오, '닫힌 방'이라 해서 어둡기만 한 것도 아니다. '밝은 방' 임을 저마다 주장할 수 있음인데, 다만 각기 처한 곳을 근거 삼은 형편에서 이르는 만큼 그 밝기를 판별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다. 다만 이것이 보편적 기준을 벗어날 때 진통은 따르게 마련. 보편이라 여기는 기성의 관념, 이것이 실은 그저 고착일 뿐인 것을 바람직하다 여기는 관성은 아닌지 의심하는 편과, 그러한 주장의 근거 없음을 밝히려는 편이 갈葛과 등藤으로 엮일 수 밖에 없고 이렇게 엮이는 속에서 '일반의지'의 줄기는 한뼘 자라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진(일)보.
⠀
먼저 나로서는, 변희수 前부사관의 (강제) 전역 처우와 숙대 일부의 입학 거부 표명 움직임을 같은 궤로 놓고 살피는 게 타당한가는 둘째 치고 살피는 게 가능한가부터 의구심 품던 차다. 그런데 거듭 생각하니 동일 궤로 살펴도 무리 없다는 데에 결론 이르렀고, 특히 전자의 경우 그이를 강제 전역 시킬 필요 있는가 의아하다는 데에까지 이르긴 했다.
⠀
처음 전자의 시시비비를 문제라고 여긴 건, 군이라는 특수집단에서의 절차 등을 무시한 개인의 선택을, 자유 특히 성소수자로서의 지위와 결부지어 확대하려는 의도를 이기적이라 보았기 때문. 어쨌거나 성-차별 아닌 성별 간 보편적이라 여길 법한 능력 차가 존재하니 그에 따라 군무軍務 또한 분장分掌된 셈. 그러므로 젠더 전환이야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나, 이미 원칙으로 자리잡은 업무 분장의 기본틀을 무시하고 주장 관철하려는 접근이야말로 마치 예외를 허용하라는 무리한 요구로 비칠 수 있는 만큼. 더하여 이를 소수자 배제라고 주장함은 억측으로 여겨질 수도 있고. 해서 나로서는 여군으로 지원하면 되지 않는가 하는 등의 여론 또한 나름 타당하다 여긴 바다.
그런데 이를 판단하는 배경에 자리한 그 기본이 '힘'과 같은 천부적 차이라면, 그것이 반드시 성별일 필요는 없을 것. 보편적일지언정 확고한 진리는 아니니. 능력 차를 기본으로 안배하는 것이면 보편적이지 않은 존재의 능력은 능력대로, 그 능력만 놓고 판단하여 활용하면 그만인 것. 그이의 성별이 어떠하든 간에 말이다. 그러니까 변희수 씨가 여성으로서 보편적 차이에 기대어 조금 더 편한? 보직을 맡겠다는 것도 아닌 바에야 (국방부에서는 그이로 인해 빚어질) 남군과의 숙식 등등 여러가지 면을 따로 구성해야 하는 데서 이는 비용을 비롯한 각종 문제를 솔직히 이르는 편이 훨씬 납득 용이할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는 딱히 변씨가 전역 처우를 그것도 당하는 형편으로 감당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
성전환이라는 보편적이지 않은 경험을 지닌 소수자에 대한 숙대 일부 학생들의 입학 거부 움직임은 그래서 동일한 궤로 살필 수 있겠다 싶다. 그러니까 관점 차이에 그치지 않고 차별 의식을 바탕으로 제한 주장하며 그이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형편이니 말이다. 실상 제 견해의 당위를 의심치 못하는 다수의 (부지불식간이든 간에) 횡포로 중대한 생존 조건을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함과 다를 바 없는 것. 이것이야말로 문제 삼아야 할 고정관념, 편견 아닐지..
붙임: head 삽입, 사르트르 희곡 「닫힌 방」 극 포스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