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냐 '존재'냐 그것이 문제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by 사각공간
소유 양식과 존재양식의 차이는 대화의 두 가지 예를 통해서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x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 A와 y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 B (…) 견해가 자기 소유물의 하나이기 때문에 (…) 상실하는 것은 자신의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 사람 다 자신의 견해가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 대화에서 자신을 상품으로 내놓는 것이다. 그런 일을 훌륭하게 잘 해내는 사람은 실로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주지만, 그 감명 중에서 아주 적은 일부가 개인의 연기에서 나온 것이며, 대부분은 사람들의 판단력 빈곤에 기인하고 있다. (…) 이와는 달리

아무것도 미리 준비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신을 무장하지 않은 채 상황에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반응한다. (…) 지위에 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아에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들이 다른 사람과 그들의 생각에 충실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_E. 프롬,『소유냐 삶이냐』, 홍신문화사


적확! 답은 이미 오래전 나와 있음이다. 어떻게 살지를 선택함과 동시에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는 데에서 자유를 누리느냐 그렇지 못하냐 갈음될 것. 물론 때에 따라선, 제 이익을 셈하는 형편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치가 이용하려 드는 데에는 자기 내탕고內帑庫를 잠그고 지킬 필요도 있겠다. 왜냐하면 수익 환원 서사를 돕는 형편에 이용됨은 '나'보다 모르는 이들 다수에 피해 끼치므로. 이렇게 보면 사실 일반적으로 지킬 게 많은 형편일 연장자는 물론이거니와 이에서 무언가를 앗으려 드는 사정에 처해 있을 연소자 모두 얼마든지 '꼰대'로 드러날 수 있음이다. 실제로 '젊은'을 수식어로 단 꼰대 출현이 공공연함을 언론 통해서도 제법 거론된 바이니.


반면 존재형은 이와 다르다는 것인데 멀리서 찾을 것 없이 조선시대만 살펴도 터울 지는 나이에 걸림 없이 이理/기氣를 중심으로 서신 논쟁 펼쳤던 이황(당시 50대)과 기대승(당시 30대)을 실례實例로 들 수 있겠다. 두 사람이 신분제와 장유유서長幼有序를 국가 존립의 주된 축으로 하는 시대에 살면서도, 출생의 우연을 가치로 매기는 습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던 건 (의도한 바는 아닐지라도 분명) 존재형의 면이 드러난 바라 여길 수 있겠다. 양자 모두 목적하는 바가 자기를 세우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가능하지 않았을까. '자아에 방해를 받지 않'는 '존재'로 서로 통하지 않았겠냐는 것.


어쩌면 존재형으로 살아간다는 자체가, 생물학적 출생보다 진리를 궁구 하는 데서 마주하게 되는 사태 곧 그 자신의 '거듭남'이라는 제2의 출생에 더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그래서 '선생先生'이다. 이렇게 먼저 거듭나야지만 참 '선생'이겠다). 그러니 '나중 된 자 먼저 되'*는 상황 또한 너끈히 받아들임은 물론 그이에게서 배우려 들고 배울 수 있겠지.


'무엇을 할 것인가'에 앞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 이는 기성 제도를 바탕으로 하는 이 세계, 그에 속한 존재이면서 저를 둘러싼 그 바깥세상을 자기 사유의 뜰 안쪽으로 들여 성찰을 전제한다는 것. 이를 자궁으로 하여 비로소 태동하니 곧 '존재'이겠다.


그러니까 요는, '꼰대'로 살 것이냐 '존재'로 살 것이냐 이것이 문제라는 것.

바른말 일삼지만 제가 드러남을 목적으로 하는(그로써 환원될 수익을 기대하는) 실상 '자본가'인 치들이 유튜브를 위시한 다양한 플랫폼과 그 채널 통해 득세하는 요즘이라면 더더욱 앞세워 생각해볼 일이지 싶다.




한편 그 '자본가' 득세를 염두에 두고 어떻게 살지를 다시 살피면 아래와 같이 이를 수도 있겠다.

부富를 척도로 입신立身을 판단하니 너도 나도 양명揚名 서사에 몰입, 이 흐름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는 삶을 산다? 보통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살겠노라 다짐하며 애를 쓴다 해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님은 분명. 아니 그러니까 그럴수록 각오는 뚜렷해야 하고 분명해야 하며 굳건해야 하지 않느냐 할 수 있겠는데 그런 태도로 임하지 않을 수 없는 때를 거쳐야 하니 부분적으로는 옳다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궁극은 역시 이와는 무관하지 싶고. 무엇보다 어떤 분야든 저 자신, 즐거워야 꾸준할 수 있지 않은가 말이지;; 소유에의 집착을 존재형으로 전환하는 데에는 전환 자체에서 오는 기쁨을 몸소 느껴야 비로소 가능하지 않겠나. 그러니까 나름 궁구 끝에 옳다고 여기는 바를 직접 체험하는 데서 맛본 첫 기쁨. 이 기쁨이 랑데부로 이어지며 이 자체를 스스로 누리고 즐기는 과정이 자연스레 꾸준한 실천으로 비치게 되는 게 아닌지. 이것이 억지로는 지탱할 수 없는 굳건이 절로 삶의 태도로 자리하게 되는, 비밀 아닌 비밀 아닐까.


이를 단박에 깨쳐 닿게 되면 좋겠지만, 저마다 다른 존재로 한날한시 하나인 양 깨칠 수야 없는 노릇(솔직히 나로서는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싶긴 하지만 ㅎ). 그렇다면 관건은 역시, 각자 처한 형편 따라 그 처지에서 보이는 나름의 노력이지 않겠냐는 것. 그러니까 굳이 단계나 과정으로 표하자면 이 단계 이 과정에서 앞서 이른 것과 같은 '뚜렷하고 분명하고 굳건한 각오'가 필요하지 않겠냐는 것. 이로써 목적하는(존재로 거듭나는) 바에 닿는 기간이든 거리든 간에 당길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당기진 못하여도 이르기까지 지치기도 할 텐데 그때 포기 않는 끈기로 드러나는 원천임은 틀림이 없겠다.



*'나중된 자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 나중 되리라' 개신교 성경 마태복음 20장 16절

붙임: head 삽입, 영화 《비열한 거리》스샷에 글자 얹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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