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개신교 성경 가운데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노라"¹는 말씀을 세속(에서)의 성공에 포개어 이를 수 있는가? 의구심 여전한 가운데 한국 교계에 이름 난 목회자일수록 이를 긍정하여 이르는 데 거침이 없는 듯싶으니 이거야 원. 설교는 이미 '부자 돼라/되기'와 궤를 같이 하여 성속聖俗의 경계를 지우고 무너뜨리며 등장하였다. 그네들이 주워섬기는 '하나님'께서 과연 그를 기뻐하실지 어떨지;;
여기 남부럽지 않은 배경, 누리던 풍요를 뒤로하고 끝내는 방황에 그칠지 모를 길 나서는 데에 주저하지 않은 사내가 있었으니 싯다르타, 사내의 이름이다. 앞서 언급한 내용에 시선 맞추면 그야말로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는' 짓이겠다. 산해진미에 물린 나머지 잠시 잠깐 몬도가네 식 일탈을 감행하는 정도로 여길 수도 있겠고. 고결한 신분의 탕자 경험 정도로 읽을 수도 있겠다(책/드라마/영화를 빌어 무수히 변주 아니지 반복되는 상투적 로맨스의 중심이기도 하다. 이런 남주/여주가 궁벽한 현실에 처해 있는 여주/남주를 만나 신분 상승하는 신데렐라 서사). 하지만 헤세는 싯다르타를, 자기 내면을 줄기차게 응시하는 자로 옮겨놓았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런 이가 아니면 갈급을 호소하는 제 영혼의 외침을 들을 수 없고 그 절박함을 실감할 수 없으므로. 그러니 그이의 입장에선 마음이 갇힌 바 된 상태를 벗고자 출가함이니 파옥破獄과 다름 없어 자유自由의 일보一步인 것. 하나님과 그 뜻에 귀의하는, 구속을 통해서만 자유함을 얻는다는 함은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면, 하나님께 가까운 것은 현 교계의 목회자인가 아니면 저 싯다르타인가.
한편 제 의지 바깥에서 이는 일들, 천변만화千變萬化로 무상無常한 제행諸行의 면면面面 따라 반응하지 않을 수도 없고 어느 때에는 급급하게 되기도 하니 이내 지치고 마는 갑남을녀 보통 사람의 마음 사정. '진리'라 이르는 바를 터전 삼고 그에 뿌리를 내리면 굳건할 수 있으리라 짐작은 하여도, 또한 그 터전이 자기 바깥에 따로 있지 않음을 느끼면서도 결행이 쉬운가 어디. 급여 생활자가 사표辭表 내는 만큼 어렵지. 그래서 대개 위로/힐링 서사를 붙들고 소비하며 자기 바운더리를 지키는 데에서 멈추게 마련. 타他에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하자는 것인데 실상은.. 사회에는 배려를 호소하는 한편 자기 외에는 배타적으로 응수하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형편이지 싶다.
반면 싯다르타. 그 역시 '나'를 중하게 여기는 건 동일하다. 다만 접근은 다른 층위. 예를 들어 직장에 예속된 형편에서 누리던 평안을 백수의 불안한 자유와 맞바꾸는 정도의 전환 시도가 사표라면, 싯다르타는 처음부터 이를 출사표出師表로 탈바꿈 시킨 것. 그러니까 속화된 소승의 거처로써의 자기 자신 지키기에 급급하는 데에 머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를 열어젖혀 대승의 수레바퀴로 전환을 꾀한 것. 그러니까 싯다르타의 출가 결행은, 세속의 관점으로는 무모한 광야 방황에 지나지 않겠지만 정작 그 자신은 천로天路의 첩경 곧 지름길이라 여긴 것.
처음 사문에게서 배워 익힌 바 스스로 궁구하여 터득한 명상 등을 통해 저를 옥죄던 육신을 벗어나 타他에 이입하는, 타자 속에 깊이 들어가 그로 호흡하고 사는, 마치 살아서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거듭하여도 결국 자기 속으로 귀환, 자신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음을 탄歎하는 내용은 마치 작품 아니 인생 전체를 담아놓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면면의 과정 중에 함몰되지 않고, 그 어느 과정 속에도 발 묶이는 바 없이 마침내 초월/불연속의 도약을 이뤄낸, 스스로 제 길을 조형해낸,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 이를테면 깨달은 자, 깨달은 바를 생활 가운데서 구현/실천하는 자를, 다름 아닌 변화된 제 모습으로 마주하게 되는 과정이야말로 독자로 하여금 전율케 하는 백미 아닐까 싶다. 사문을 떠나 다시 세간에 들어 '카밀라' 통해 사랑을 둘러싸고 안팎에서 이는 갖가지 감정/행위에 흠뻑 빠져도 보고 상인과 함께 이익 쫓는 서사에 발 들여놓아 보기도 하고 종국엔 제 혈육 통해 극단의 고통을 맛보기까지 모든 과정서 무상한 면면을 직시/관조함과 동시에 번번이 자신으로 회귀하는, 그러나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자신으로 돌아온 게 아니라 다른 층위(성장이든 도약이든 뭐라 이르든 간에 이르는 바는 중요한 게 아닐 터)로 이내 닿고 마는 이야기는 이 자체로 활자로 그려낸 십우十牛/심우도尋牛圖 아닌지.
『유리알 유희』의 요제프 크네히트가 그리는 서사(전기傳記 부분)는, 마치 싯다르타가 보이는 실전 '입전수수入焉垂手'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맞수이자 친우로, '두 개의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의 서로 다른 면으로, 거울상으로, 대등하게 크네히트 자신과 마주하였던 젊은 날 '데시뇨리家의 플리니오'에 대한 빚²을, 그의 아들 '티토'를 회심에 이르도록 하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의 자기 소멸(에 이르는) 서사는, 마치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그 운명을 긍정한, 해서 진정한 운명애(運命愛, Amor-Fati)를 보인 예수의 서사와도 겹친다. 이것이야말로 입신양명立身揚名 서사만이 유일한 길인 양 부추기고 매어 달리는 현대(人)을 흔들어 깨우는 깊은 울림 아닌지.
이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하다 보면, 앞서 처음 언급한 개신교 성경 구절 "능히 하지 못할 일 없노라"라는 말씀의 본의란 "극렬한 풀무 가운데 던져질지언정 그 가운데서 터럭 하나 훼손됨 없이 구하시리라, 내가 믿는 바이나 설사 그리 아니하실지라도!!"³와 다르지 않을 성싶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그러니까 "먼저 구하(라)"는 "그 나라 그 의義"에 기대어 일으켜진 사람의 뜻이고 믿음이니 만큼 제 존재의 사멸을 넘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심경을 초월하는, 각오로 굳건할 수 있게 되는 듯싶다.
이에 이르러야 비로소, 개신교에서 주 예수가 가르쳤다는 소위 '주기도문' 가운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바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씀을 자기 책무로 감당할 수 있게 되는 듯싶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 의義를 이 땅 위에서 이루기 위한 노력 경주함으로 해서. 당초 그 노력의 산물, 결과물을 제가 취하려는 데에서 이미 자유하니 그 이로움이 당대의 이웃은 물론 후세에까지 이르게 됨 아닐까. 홍익인간의 념 역시 자신이라 여기는 울타리를 스스로 걷는 데에서 비로소 실천으로 옮아가지 싶다.
일러놓고 보면 거창한 듯싶지만, 시대가 요하는 (어른의) 책무라기 보다 그저 사람답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당연한 얘기지 싶다. 그러니 제 의지로 출생한 바 아니니 누구든 이 부조리에 처할 수 밖에 없음인데 사는 동안 제 의지로 사람다움과 그에 따르는 책무에 걸맞게 자기 자신은 조형할 수 있음이니 이를 실천하려는 이야말로 그이가 어느 곳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제 운명을 그대로 껴안는 진정한 운명애를 보여주는 게 아닐지. 루쉰이 남겨둔 여러 말 가운데 다음의 한 마디는, 이 궤의 연장선에서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나 싶어 보탠다.
진화의 도중에는 언제나 신진대사가 필요하다. 따라서
새로운 것은 흥겹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건강함이다.
낡은 것도 흥겹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죽음이다.
저마다 이렇게 걸어가는 것이 진화의 길이다.
노인들은 소년들이 걸어가도록 길을 열어 주고 재촉하고 장려해야 한다.
그들이 가는 도중에 심연이 있으면 자신들의 주검으로 메워야 한다.
소년들은 심연을 메워 준 그들에게 감사하며 스스로 걸어 나가야 한다.
노인들도 자신들이 메운 심연 위를 걸어 멀어져, 멀어져 가는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_루쉰, 「수감록 49」, 『열풍』, 그린비, 『루쉰, 길 없는 대지』 재인용
¹개신교 성경 마가복음 9장 23절
그러니까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은 그것이 구하라 이르신 그 의義에 기댄 바일 때, 그에 해당할 때일 것. 그러니 이를 세속의 성공과 포개는 것이야말로 어불성설語不成說.
²"카스탈리엔은 이 유서 깊은 데시뇨리가에 빚을 지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카스탈리엔은 이 티토의 아버지를 전에 맡았음에도 충분히 철저하게 교육하지 못하였고 속세와 정신 사이의 곤란한 지위를 이겨 나갈 수 있도록 충분히 강하게 해주지 못했다. 그 결과 천분이 있는 사랑스러운 청년 플리니오는 조화가 잡히지 않고 잘 통제되지 못한 생활을 하는 불행한 인간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외아들도 위험이 드러나 대대로 물려받은 어려운 문제 속으로 끌려들어가 버렸다. 어느 정도 치유와 보상을 해주어 빚진 듯한 것을 갚아야만 했다. 그 임무가 다른 사람 아닌 자기라는, 고분고분하지 못한, 배신을 범한 듯한 자에게 과하여진 것은 기쁘기도 하고 의미 깊은 일로도 생각되었다."
_헤세, 박환덕 번역,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傳記)」, 『유리알 유희』, p370, 범우사
³개신교 성경 다니엘서 3장 10절~18절
"임금님, 임금님이 명령을 내리시기를, 나팔과 피리와 거문고와 사현금과 칠현금과 풍수 등 갖가지 악기 소리가 나면, 누구나 금金 신상 앞에 엎드려서 절을 하라고 하셨고, 엎드려서 절을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불타는 화덕 속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임금이 세운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는 임금께 경의를 표하지도, 세우신 금상에 절을 하지도 않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느부갓네살 왕은 노하여 그들을 데려오라 명하니, 그들이 왕 앞에 붙들려 왔다. 왕이 물었다. 너희는 들어라. 너희가 참으로 나의 신을 섬기지 않고,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았느냐? 지금이라도 너희가 신상에 엎드려 절을 할 마음이 되어 있으면 괜찮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즉시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을 것이다.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낼 수 있겠느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아뢰었다. 불속에 던져져도 우리를 지키시는 이가 저 활활 타는 화덕 속에서 구해주실 것을, 또한 임금인 당신 손아귀에서도 구하여 주실 것을 믿는 바! 비록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임금님 당신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을 것이고, 세우신 그 금金 신상에도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금金 신상이라니. 배금拜金의 오랜 미래라 할지. 토템의 상징조차 사라지고 금만 오롯하고, 이에만 혈안血眼된 세상이라면 우리 가운데서 복원해야 할 바가 무언지 더욱 분명하여지는 게 아닌가 싶다. 세 친구는 자신들이 믿는 바 그것이 사람인 누가 보아도 합당한 의義에 기대고 그에 뿌리내린 것임을 잘 알아, 현대로 무대를 옮겨 이르자면 배금하지 않고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었던 것. 비록 이 일로 제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할 것임이 명백하여도 굽히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