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愛 vol.2
그리스인 조르바 X 이방인 뫼르소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by 사각공간
뫼르소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그는 사장이 승진을 제안해도 거절한다. ‘그런 것은 아무런 중요성이 없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그보다 얼마 전에 카뮈는 《결혼》(〈제밀라의 바람〉)에서 그러한 거부의 이유를 설명했다. “포기와는 아무런 공통성이 없는 거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여기서 미래라든가 더 잘되고 싶다든가 출세라든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마음의 진보라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세상의 모든 ‘훗날에’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것은 나의 눈앞에 있는 현재의 풍요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이기도 하다.”(《결혼 · 여름》, p.27, 책세상)

“문명된 백성의 반대는 창조적인 백성이다. 바닷가에 팔자 좋게 사지를 뻗고 누운 이 야만인들은 아마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하면서 인간의 위대함이 마침내 그 참다운 얼굴을 발견하게 되는 어떤 문화의 모습을 다듬고 있으리라는 좀 어처구니없는 기대를 나는 지니고 있다.” (《결혼 · 여름》, p.46, 책세상)

_피에르─루이 레, 카뮈와 《이방인》 중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이방인』, 책세상 판에 수록된 글)


'포기'와 '거부'가 다르다는 건 체념과 해탈이 같지 않음에 견줄 수 있겠다. '거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표현은 이렇게 나누어 살필 수 있지 않을까.



1. 거부는 가능성으로 잠재 상태로 머물러 있다.

2.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信]이 이를 일으켜[起] 실상으로 드러난다.

3. 앞서 1에서 촉발되는 2단계, 이렇게 옮아가는 프로세스의 총체를 이해하는 사람에 의해서, 그이를 통해서만 가시적으로 드러남을 함축한 표현으로 볼 수 있지 않겠냐는 것.


하지만 이 또한 사족에 불과. 굳이 설명하자니 이리되는 것뿐. 실實이라면 불립문자不立文字이겠고,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니 '마음의 진보라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듯.


비록 처음부터 의식하여 접근한 것은 아니지만, 만상萬象을 엮는 삼라森羅를 net-work로 재현/재구축하고 있음과 마찬가지로, 파편화된 개인 간 스크럼을 짜려는 소통의 노력이야말로 존재의 '참다운 얼굴을 발견하게 되는 어떤 문화의 모습을 다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


조르바, 내 말이 틀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소위, ①살고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돈 벌고 명성을 얻는 걸 자기 생의 목표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또 한 부류는 ②자기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인류의 삶이라는 것에 관심이 있어서 그걸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지요. 이 사람들은 인간은 결국 하나라고 생각하고 인간을 가르치려 하고, 사랑과 선행을 독려하지요. 마지막 부류는 ③전 우주의 삶을 목표로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나무나 별이나 모두 한 목숨인데, 단지 아주 지독한 싸움에 휘말려 들었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요. 글쎄, 무슨 싸움일까요?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싸움이지요.

_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 부류'라 표했지만 ①⊂②⊂③과 같은 형국이지 싶다.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싸움'이라면 앞서 언급한 대로의 '참다운 얼굴을 발견' 내지 복원하는 과정에서 일게 마련인 변증 구도로 갈음할 수 있으니.


중력에 붙들린 육신 안에 갇힌 채 일생을 다해 수형 생활하니 발붙이고 사는 모든 숨 붙은 것들에게는 이 지상, 지구야말로 다름 아닌 지옥地獄이겠다. 육탈肉脫 앞에서 '아무도 (…) 죽음을 슬퍼할 권리 없음을' 깨달은 이만이, '무관심'을 '권리 없음'으로 읽어 '다정'하다 여길 수 있지 않을까.


뫼르소가 저지른 살인 사건을 비유로 읽으면, 아랍인을 이유 없이!('작렬하는 태양빛'이야 '맥거핀 이펙트'로 넘기면 그만) 쏘아 죽인 저를 단죄하여 거듭 살인하는 사람들과 그를 둘러싼 이 세계의 이유 없음을 이해하는 과정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하면 뫼르소의 행위는 삶의 '포기'가 아니라 수형 생활 '거부'로 읽을 수 있겠고. 다만 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음을 알고서 완벽한 타인으로서, 이해를 '포기'한 사람들이 '거부'한 이방인異邦人 지위를 그 구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는 왜 인생이 다 끝나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생애를 다시 시작해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죽음 가까이에서 어머니는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무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_알베르 카뮈, 『이방인』, 책세상




한편, 조르바와 두목,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혹자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혹자는 악마라고 부르는)이 우리를 쳐부수려고 달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부서지지 않았다.

외부적으로는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 외부적인 파멸은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_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뫼르소와는 다른 방식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지대에 닿은 듯싶다.

어쩌면 이들(뫼르소/조르바/두목)은, 자신에 충실코자 이방인-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최초의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최초의 인간'이란 별개의 다른 존재로 '나' 바깥에서 '님'처럼 오는 게 아닌, 누구든 이제까지의 수형 생활을 거부하는 데서, 이전의 자신을 그치는 데서 그 자신 '최초의 인간'으로 변모한다는 것, 할 수 있다는 것. 이렇게 멈추고 돌이키는 데서 벌어지는, 닥칠 일을 기꺼이 감당하는 이야말로 아니 그런 이들 만이 제 운명을 온전히 사랑(운명애運命愛, Amor-Fati)하는 자일 것.

이를 감행하는 사람 만이 '최초의 인간'이자 '초인(위버멘쉬, Übermensch)'.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