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愛 vol.3
김수영의 詩 X 루쉰의 아Q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by 사각공간

현대[人]의 초상


아Q: 당장의 곤란을 벗으려는 열망은 있으나 이를 객관화하지 못함. '현재'에 예속된 노예/포로. 이와 같은 지경에 처하여 있음을 느끼긴 하지만 직시하기보다 외면하고자 함. 개선 노력은 정면으로 응시하는 데서부터 비롯하는 것. '정신 승리'는 이에서 비켜서고자 하는 정신이 빚은, 가짜 출구가 아닐지. 세勢에 휘둘리어 그때그때 평評을, 태도를 달리하는 마을 사람들 역시 자기 삶을 살지 못하는 '구경꾼'에 지나지 않기는 아Q와 마찬가지. 따라서 그의 거울상으로서의 마을 사람들은 그들대로 '쪼그라든 개인의 군집' 같기도.


반면 김수영의 詩: 급변하는 사회, 첨예한 갈등 속에서 휘둘리지 않으려는 개인의 몸부림이랄지.. 번번이 실패하지만 아니 실패할 줄 (역사로든 개인으로든 직·간접, 이미 겪은 바에 비추어)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끝끝내 굽히지 않으려는 '위대한 개인의 탄생'. 구경꾼에 지나지 않던 삶의 '국면을 전환시키는 기획이 곧 그의 시' 아니었을지. 자음/모음으로 꾸린 대오를 이끌고 견고한 현실에 의미의 먹칠을 시도하던 그이야말로 참 기획자일 것. 어쩌면 '혁명은 되지 않고 방만 바꾸었'노란 시구야말로 자기 혁명을 선도한, (바로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 답답한 현실 위에) '거꾸로 선' 기획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한편 작위, 곧 위선이든 위악이든 방편의 주도권을 제가 쥐는 형편에 서고자 끈덕지게 매달린 인간의 몸부림은 그 자체로 얼마나 매력적인지). 따르던 의례나 전범典範에 대해 의구심을 촉발시킴으로써, 기성旣成의 짜임새에 연성을 가함으로써, 느슨해진 가운데서 자유를 복원 내지 재구성하는 것. 이를 기획하고 실천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 '초인(위버멘쉬)' 아닐지.


저마다 자기 안에서 '작은 김수영', '작은 루쉰' 등을(그네들이 견지했던 믿음과 가치, 의를) 일으켜 세울[起信] 때 비로소 성공을 쫓는 삶의 구경꾼이 아닌, 자기 삶의 주체로 살아갈 수 있는 듯. 실패를 거듭하는 제 운명을 사랑[Amor Fati, 운명애]할 수 있게 되는 듯. 비교우위의 서사 속에 포섭된 '용기'를 잡아 뜯어 재배치하는, 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Wounded Healer'일 것. 왜냐하면 상처傷處, 상傷의 처소處所인 자기 내면에만 거하지 않고 아픔을 오래도록 응시, 그 시간을 다시 살아내는 동안 일으켜지는 불쾌/불편 이상의 갖가지 감정 등등을 외면하지 않고 그 면면을 살펴 가며 마음 빗질에 힘을 쓰는 사람이라야 결 고르던 그 경험, 거기서 취하게 마련인 섬세를 바탕으로 저와 같은 지경에 처한 이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그러니까 곧은 소리 만이 곧은 소리를 계속해서 일으켜 낼 수 있음이다. 곧지 않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일으켜 낼 수 없음이다. 제 안락을 먼저 구하는 이, 자신이 단에 올라 드러나길 바라는 욕망을 앞세우는 자의 입바른 말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음과 매한가지. 생각해보면, 성인과 군자가 늘 강조한 바 천로天路는 언제나 '좁은 길'이었으니.. 자기를 버리고 의義를 쫓는 이, 과정에서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는 궁벽한 처지를 감내하는 것. 상처를 입고도 치유자로 거듭남은 이러한 운명애에서 비롯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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