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재부(財富)의 많고 적음을 가시적 성과로 가늠하는 세속의 잣대를 의심하려 들지 않는다면, '노인'의 '사자꿈', 헤밍웨이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은 요원하지 않을지. 격랑에 휩쓸리는 동시에 맞서기도 하면서 부침을 거듭한 끝에 다다르는 운명애(運命愛)를 긍정의 힘으로 전도시켜 처세의 달인 됨을 꿈꾸는 것 또한 자유라면 자유이겠으나, 세간의 구획된 틀거리 밖으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형편을 참 자유라 이르기는 아무래도 무리이겠다. 그렇다고 악의악식(惡衣惡食)의 빈처(貧:處)야말로 군자(君子)의 처소(處所)라 여김을 강조하는 것 또한 외형이랄지 표상에 집착한 나머지 착각에 걸리는 바임 물론이지 싶고.
헤밍웨이가 자신을 투영한 것처럼 보이는 '노인'은, 이 경계 위에 서서 남다른 모습을 보인 운명애의 화신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앞서 이른 대로의, 성패를 가늠하는 기저의 인정 욕구를 아주 부정하지 않으니 그에 끄달리는 생각들로 괴로워도 하면서 다만 그에 함몰되지 않고 마침내 스스로 어떤 도약이다 싶은, 다른 차원으로 들어선 것처럼 느껴진다. 이에 이르는 과정을 헤밍웨이는, 노인이 청새치는 물론이거니와 상어 그리고 바다와 사투를 벌이는 형태로 생생하게 전달한다. 그야말로 이 이야기가 지닌 힘, 매력(魅力)으로 마음 이끌린다.
곁에 있다면 좋았을 누군가가 곁에 없을 때, 사람은 자신이 처한 당장의 시간이나 처지는 물론 세기를 넘어서까지 말을 걸 수 있게 되는 듯. 후세를 밝히는 빛은, 확실히 당대 자신이 처한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데서 비롯하는구나 싶다. 불쏘시개의 숙명을 감당하는 그네들의 운명애가 아니었으면 오늘 내가 이런 내용을 옮기며 마음 다지기 어려웠을 것. 점화 후 저가 거두어 들일 결과를 기대하는 욕망보다 제 한 몸 사르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을 삶을 꾸리는 태도로 먼저 취하는 이. 이런 사람이면 감히 재조산하(再造山河)를 옮기기 앞서 자기 이후의 세상을 전망하는 자세로 사즉생(死卽生)을 필히 새기리라 본다. 어디에? 제 가슴팍에! [革命:가죽 곧 저마다의 육신에 새겨진 명命으로 소명召命과 같은 궤로 새겨 보는 것]
그래서 당장의 제 운명을 사랑하는 '리얼리스트만이 (역시 당장 구현) 불가능한 꿈을 품'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지금 없는 꿈의 영토로 자신만 건너가는 망명에서 대승(大乘)적 초대:invite를 기획하는 이. 꿈과 현실의 역전을 도모하는 자. 가만히 그려보니 이야기 속 '노인'과 닮은꼴 역사상 제법 있다. 이 시대라고 없겠나 싶고. 다만 그 닮은꼴은 영웅 같은 '님'과는 좀 다른 모습이다. 그런 heroism에 경도된 상을 오히려 미분한 수다(數多)한 범인(凡人)이다. 유령으로 배회하길 그치고 '리얼리스트'로 복귀하는 보통 사람.
계절이 바뀌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생(生)의 기미(機微)를 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_정현종,詩 「고통의 축제(祝祭)」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