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만찬 MC 하차와 숙대 입학 포기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by 사각공간

거리의 만찬(이하 거만') 프로그램 MC 하차와 숙대 입학 포기 간 공통점.

당사자(들)의 비자발적 선택.




하차 거론에 앞서 거만'과 같은 플랫폼이 지닌, 지닐 수밖에 없는 문제를 잠시 떠올려봄. 신선한 시도. 어디까지나 공중파 공영방송이라는 틀거리 내에서. 사실 내방가사 스몰토크 양식이라면 소위 범진보라 해도 과언 아닌 공공/민간 가릴 것 없이 이미 광범위하게 쓰였고 여전히 쓰이고 있다. 당사자를 客으로 모셔(이 전환이야말로 소외의 전범 아닌지) 이슈 소비(이것이야말로 소비의 전형이겠고). 영상 콘텐츠라는 상품商品으로 탈바꿈 후 다양한 형태의 액정으로 송출, 이를 시청. 소비, 말 그대로 소비일 뿐. 이슈 소비를 전제하는 시도의 신선함이 부딪게 마련인 한계(그래서 신파新波, 신파라는 표현이 괜히 상투성과 짝하게 된 게 아니지. 전형이 되어버린 뉴-웨이브). 따라서 구태, 낡은 양식의 혁신은 불가피. 그런데 책임을 진행자 측에 지우는 것과 다름 없는 태도. 이건 좀 비겁하다. 여러 각도로 살피면 문제 의식부터 해결하려는 노력까지 함께하지 않을 수 없음을 느낄 텐데.


여기서 난쏘공 한 장면.


윤호는 말했다.
"여러분은 십대 노동자 문제를 놓고 삼십 분 동아닝나 이야기를 했습니다.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십대 노동자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 한국은 죄인들로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이야기를 하다 말고 윤호는 기타 소리를 들었다. 남자아이가 구석 쪽으로 가 기타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계속하세요."
여자아이가 말했다.
"아주 작게 쳐."
다른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말했다. (…) 윤호는 단념하고 이야기를 끝내버렸다. 아이들은 다음 프로그램을 원하고 있었다.

_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모르는 십대 공원工員에 대해 아는 것처럼 이야기를 주고받는 식, 이것은 이상하다라는 데에 기타 현을 타며 음계로 재단하는 그 방식(이렇게 뻔뻔할 수 있다니 인간은 정말 기괴한 종種 아닌가).

이런 식의 안일로 기성화/고착화되는 상태야말로 문제로 의식하고 (3개로 분화된 주체의 지위를 당장 어찌할 수 없음을 수긍하는 선에서라면 특히) 함께 먼저 고민했어야 하고, 늦더라도 해야 하지 않나. 그러니까 제작자 뿐 아니라 진행자는 물론 소비자인 시청자 역시. 그런데 어느 편도 그럴 생각은 없어 보인다. 소비되는 이상 이슈는 이슈로 겉돌 뿐. 관심이든 기억이든 등등을 하겠노라는 수사로 가상 공간만 달궈질 뿐이다. 그마저도 아니 그렇기에 빠르게 식을 밖에. 세 주체 간 상호불가침 주장이 이루는 아슬한 균형(대개의 불균형)은 시장의 그것과 닮았다. 아니 그 자체라는 편이 적확하겠다. 아무래도 좋은 데, 문제는 소재로나 삼을 뿐 정작 주主여야 마땅한 이슈에서조차 저마다 불가침의 거리를 확보하려는 것. 오히려 그 피해로부터 자신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그 간격을 가늠하며 제 입지를 확인하려는 욕망 때문에 소비 활황 이루나 싶을 정도. 그래서 해장국 언론(*강준만)은 황색 찌라시즘(옐로우 저널리즘을 나름 풀어쓴 표현)과 짝한다. 때문에 온라인 카페 좌파가 살롱 좌파를 갈음하고, 동정同情의 tea-time 갖던 귀부인 역을 현대의 소위 소셜-테이너들이 대행하는지도. 진보의 분업화랄지 아니 분업의 한 영역으로 재영토화된 진보랄까. 시청자는 둘째 치고 거만'을 위시한 플랫폼 안주인으로 활동하는 등등의 배역을 소화하는 소셜-테이너들이래봐야 제 혈연 서사 안쪽으로 팔 굽히고 토지/건물 부동산 소유에 발 묶이기 십상. 이는 이네들의 진보적 관심이 동정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이자 배경. 이런 연유로 관심 등의 이름을 업고서 소비는 불꽃처럼 일지만, 해결은 마냥이어서 요원한 상태로 지속가능이다. 겉도는 세상을 정상 범주로 판단하는 건 공모와 협잡에서 자유롭지 못한 스스로를 내심 고백하는 것일지도..


한편 숙명여대 입학 거부 움직임으로 인한 당사자의 미등록 결정. 과거 퀴어문화축제를 두고 취지에 걸맞는지 여부를 의심케 하는 사례를 들며 반대하는 목소리들, 그 심경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건은 다르다. 아니 명백한 혐오와 배제인 만큼 틀렸다. 페민- 명찰 달고 거부 주장을 펼쳤다니 다소 충격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앞서처럼 소비에 익숙하고 길들여진 형편이면 무리도 아니겠다 싶긴 하다. 아마도 그이의 입학 거부를 주장한 이들 가운데는 미드 보며 gay 남사친을 액새서리로 거느리려는 욕구를 품었을지 모를 일. 명품 소확행 누리는 Sex and the City 급 언니들을 꿈꿀지도. 하울 유튜버를 추종하는 한편에서 '잊지 않겠'노라는 말을 거듭하는지도 모를 일. 일부라곤 하나 이렇게 이르니 여성 만을 문제 삼는 늬앙스로 느낄 수 있겠다. 전혀!!


외려 전자(거만' MC 하차)를 문제로 의식하는 편은 다양한 시각을 보이는데 유독 여성(만)이 강조되니 난 그게 이상하다. 동시에 여성성 정의를 두고 논란인 후자(숙대 입학 거부와 당사자의 포기) 역시 기묘할 따름이고. 쿨하고 핫하게 진화했다는 21세기 인류의 실상이란 마땅히 감당하여야 할 책임을 불편으로 바꿔 이르며 회피 일삼는 퇴행을 거듭하고 있는 게 아닐지.. 비자발적 선택을 강요하는 다수의 얼굴에 성별이고 세대고 학력이고 무슨 차이가 있냐는 것이다. 이런 인간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부끄럽다 여기지 않으면 거기에 무슨 희망이 있나. 성찰하는 인간을 기대할 수 없는 사회, 그런 인간 하나 생산하지 못하는 대학을 어떻게 사회라 이를 수 있고 대학이라 이를 수 있겠나. 부끄러운 일이다.


난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난 우리 또래의 친구를 새로 알게 되면 꼭 꿈틀거림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얘기를 합니다. 그렇지만 얘기는 오 분도 안 돼서 끝나버립니다.

_김승옥「서울 1964년 겨울」


입 속의 칼은 먼저 자신을 겨눈 이후에나 낼 수 있음이다.

말이 많고 탈이 많은 건, 말이 많으니 탈도 더불어 많아지는 것이리라. 자신을 먼저 겨누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음인데 그러지 않으니 생각이 없고 생각을 거듭하는 연단을 과정으로 거치지 않으니 그 칼들로 인해 마음 다치는 이들이 는다. 그래서 배우는 것이다. 상잔의 비극을 거듭하는 인류사를 새로 쓰기 위해서 과거를 다시 살아보는 것이 배움이다. 사해동포의 연대 위해 입 속의 붓을 놀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고작 호의호식과 맞바꾸는 테크닉으로 전수하는 기성의 (교육)제도, 제도권 내 부속들. 하.. 이건 좀 아니지 않나;;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