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 번째' 조약돌 (봉준호)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by 사각공간

조약돌 하나가 일으키는 파문을 바라보는 것처럼 흥미로운 일이 또 있을까. 매끄러운 수면이야말로 팽팽한 긴장 상태였음이 폭로되는 현장. 균형 붕괴와 동시에 출현하는 다원多元. 경이로운 찰나의 경험. 다른 측면으론 난방難防의 사태랄 수도. 그런데 꼭 여럿[중구衆口]이어서 막기 어려운 건 아닌 듯. 그러니까, 향방 가늠키 어려운[難:方] 발산이어서, 경우 없이 뻗기만 하기에 막지 못하는 건 아니란 얘기. 발산의 한계 흩어지고 마는 흐지부지 상태로 맺는 게 아니라 공명共鳴으로 수렴하기에 막을 수 없는 게 아닐지. 하나 됨에서 비롯하는 힘으로 새로운 결 이루니 그로써 장악하는 게 아닌지. 생각할수록 신기.


이 같은 경험, 사람 간 관계에서도 빚어지는 듯. 조약돌에 불과한 일개의 인간 존재가 다원 각성을 유도 내지 견인하는 현장. 이를 목도.. 전율, 상상 만으로도 짜릿하다. 잔잔한 시간의 흐름이 고여 이루는 일상. 지리멸렬의 권태 속에 잠식당하기 십상인 존재. 그런데 거기서 이 고요의 실체야말로 무명無明은 아닌지 하는 의심 돈발頓發한 존재가 출현. 제 속에서 일으킨 믿음을 바탕으로 오롯한 존재임을 각성한 이. 이로 인하여, 저마다 제 꿈틀 곧 잠재태態인 알[卵]을 깨부숴 마침내 자성自性 발현의 지대로 나아간다!? 이 낱낱의 운동성이 기성의 '나타懶惰와 안정을 뒤집'고 새로운 무늬/흐름을 조형?! '정말이지 후천개벽이 별 것이더냐' 이처럼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미인]이 득실대'니 '강대국'.


후천개벽이 별 것이더냐 미인이 득실대는 나라가 강대국이로다 전조선 반도의 모든 길이 비단 트랙으로 덮일 날 온다 그때도 유불선 합일 아니하는 자들은 익은 벼락 맞으리라 (…) 호랑나빈 날지 못하는 켄터키 치킨관 격이 다르노라 켄터키 후라이드가 남반부를 휩쓰는 대신에 남조선 인민들은 켄터키주에 절을 세우노라 조선식 절을 세우노라 아메리카 합중국을 필마로 돌아다녀 봐도 어즈버 켄터키 산수만 한 곳이 없구나 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한 조선스타일 명당이로다 앗싸 양키들은 닭을 튀겨 팔고 신식민지 국독자의 선승들은 노린내 나는 코배기들의 영혼을 튀긴다? 아메리카에서 부처가 나올작시면 다 나머지 조선 사람 덕인 줄이나 알아라

_진이정,詩 「앗싸, 호랑나비」 中


때가 무르익은 듯. 이를테면 시인의 시구처럼 '영혼을 튀'겨낼 시점이랄지. 한류韓流의 본류(다른 걸 지류로 무시하잔 건 아니고;;)랄까. 아무튼 근원에 해당하는 말글 자체가 지금보다 더 활발하게 건너다닐 때가 도래한 듯. 언어 장벽을 무너뜨리는 시도 거듭하는 기술 진보 또한 계속되는 마당이니..


이 시점에서 감독 봉준호, 앞서 언급한 조약돌에 겹치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이라면 이러한 때에 그이라면 그리 보아도 무리는 아니겠지 싶다. 하면, 그이의 의도(라고 여겨지는) 안팎을 살펴 화두 삼는 데서 저마다 다원으로서 스스로를 주조/de-formation/생성 뭐라 이르든 간에 이를 꾀할 수도 있으리라(관련 없는 데서 이미 견성見性의 그래디언트 오가는 중에도 이를 꾀하는 양반들, 드러나지 않아 그렇지 도처에 적지 않을 것임은 물론이고).


1. 《기생충》과 같은 영화가 탄생하게 된, 배경으로써의 양극화 특히 한국의 특수성을 살펴 이를 성찰.


(前제국주의, 現)초국적으로 깝치는 자본의 꼴값에 맞서는 그 이상以上으로 사유의 폭과 넓이 확장을 도모함이 필요하겠다. 그리고 이 성찰을 실천으로 현실계로 옮겨 심어야 할 것. 이를테면, 부동자산의 유동화를 파생으로 가속하며 형성하는 투기의 main stream에서 과감하게 돌이키는 것.


(ex. https://news.v.daum.net/v/20200211043308303 "여행상품권 장당 14만원 차익" 가족이라서 믿었던 꿈 같은 수익률

해당 기사 내용 살피면 대번에 사기 짐작할 것. 비약을 무릅쓰고 아쉬운 대로 간단히 이르면, 한 걸음만 물러서서 바라보면 실상 금융권의 여·수신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 같은 형식이나 차이라면 화폐 차입에 따르는 이자 비용 곧 다른 편으론 대부 수익이겠는데 이를 보장하는 실체가 뚜렷하게 존재하기에 성립. 고쳐 이르면, 노동 종사 생산 체계가 후자를 지탱하기 때문에 경제가 계界로 선다는 것. 실상 다수의 미래,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이야말로 이자interest의 실체. 맑스가 이른 '잉여 노동'을 대입하면, 장시간 또 단위 시간 당 노동강도 높은 데 반해 비용으로써의 임금이 제한될 수 밖에 없음이 드러나기도. 이에 대해선 좀 더 면밀히 파고 들어 설명해야겠지만.)


2. 단檀에 오르는 한 사람을 주목하는 탈-바꿈, 그 단을 고르게 만드는 여럿 그 낱낱을 무겁게 여길 수밖에 없음을, 존중 마땅함을 보인 것.


밖으로 내보여진 영화 콘텐츠를 둘러싼 과정 전체 함께하는 자체가 사람과 사람이 이루는 진정한 작품作品 임을 모델로 드러낸 바이니 이처럼, 이를 본本 삼아 저마다 딛고 선 자리에서 그 탈-바꿈을 가능한 대로 지속하는 것.


3. 집적 통해 규모 이룬 자본을 필요로 하는 (영화) 체제의 변이를 꾀하는 것.


괄호 표기, 사실 분야로 구획되어 그렇지 전 분야 해당하지 싶어서. 그렇다면 2와 같은 형태로 무게 중심 옮김과 동시에 1과 같은 비자발적 집적/집중의 현 구도를, 다원의 자발적 축적으로 시선부터 옮겨야. 아직 거죽에 불과한 경우 적지 않으니 온전하다 이르긴 어렵겠지만, 부족한 대로 다채로운 펀딩의 한편에서 이는 조합 형성 움직임을 이러한 실례라 이를 수는 있을 것(당초 아이디어는 다르지 않으니).


4. 지속가능한 영구적 변증 꾀하는 것.


감독 봉준호에 집중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저마다의 속에서 그와 같은 면면을 끄집어 내어 살아내는 것. 계속 걷기 위해서 오른쪽 왼쪽 무릎 꺾고 접으며 끊임없이 스스로 균형 무너뜨려야 하는 것처럼, 기성의 균형 고수하려는 제 안의 보수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자기 혁신에 부단하여야. 이는 감독 봉준호의 몫인 동시에 저마다의 몫.


요는, 누구든 파문 짓는 조약돌인 동시에 파문 구성하는 운동 인자로서 다원 임을 자각함이겠다. 호모 루덴스 Homo Ludens와 호모 익스피어런스 Homo Experience가 한 주체 안에서 짝하지 못하고 갑을甲乙로 나뉘어 소외된, 심지어 양 극단으로 치닫는 당장의 판세를 바로잡아야 할 것. 그러니까 지지자知之者/호지자好之者/락지자樂之者는 처음부터 따로[不如]이지 않다. 외려 이 면면이 하나를 이루니 비로소 전인全人의 주체인 것. 그러니, (설명하려는 편의에 기대어 나눈) 이 둘/셋을 그 상태 그대로 고착시키(려)는, 이를 올바르다[正] 주장하는 이 시스템에 反으로 설 수밖에 없는 형편이겠고. 이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존재가 다름 아닌 인간種이겠다. 어쩌면 이 시대, 반자反資야말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메니페스토 menifesto 아닐지. 이렇게 둘셋으로 쪼개진 면면을 하나로 봉합하려는 시도 그리고 이 과정 중 겪게 마련인 경험 자체가 소외의 간극을 좁히게 마련.


'n 번째' 조약돌 (○○○), 괄호를 채우는 이름은 다름 아닌 네/내 이름 '_'


당신은 흐름, 난 이름, 당신은 움직임 아주 아주 미세한 움직임, 나는 고여 있음 아주 아주 고여 있음, 멀고 먼 장강의 흐름 속에서 무수히 반짝이는 <나>의 파도들이여 거품 같은 이름도 흐르고 흐를지면 언젠간 당신에게로 다가갈 좋은 날 있을 것인가요 움직이시여 어머니 움직임이시여 고여 있는 <나>의 슬픈 반짝임, 받아주소서 받아주소서

_진이정,詩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中

붙임: 작은 따옴표로 갈음한 'n번째'라는 표현(본래 'n번째 ○○'로 형식 자체를) 빌어다 쓴 것으로 내게서 난 바가 아님. 잠시 잠깐 스쳤을 뿐인 그이에게 전해받은 영향이 적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고마움 표하고 싶어서. 이냥반 글 출판하면 대박일 텐데.. 참..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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