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e confusion 미드 메시아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by 사각공간

진리, 인仁 또는 의義 이르는 바가 무엇이든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명가명名可名 비상명非常名. 이름의 겉옷 입히니 보이지 않는 실체도 가늠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름 자체를 실체로 여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이르는 바가 제대로 가리키는지 그러니까 맞지 않는 옷은 아닌지도 불명확. 따라서 앞서 진리 등 이르는 바를 면면으로 하는 총체를 신神이라고 어림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명확한 파악 임을 단언할 수는 없음과 마찬가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개신교를 비롯하여 전통 오랜 종교에서 설명하는 바를 빌어 이르면, 불명확한 감각의 이유는 다름 아닌 몸이 짓고 쌓은 죄업이 들보 되어 눈 가린 사람의 (태생적) 한계 때문. 해서 자빠지기 일쑤인 인간이란 것인데.. 맞고 틀리고 차치하고 과연 고갤 끄덕이게 되니. 비틀거리며 광야를 더듬는 이 내' 방황에 주석을 달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임은 분명한 듯싶다가도 내' 안의 내'가 여럿처럼 느껴지는 때도 적잖으니 하는 말. 적이든 아군이든 조금이라도 확실하게 가늠하여 휘둘리지 않으려는 약소한 의지? 이따금 DNA에 프로그래밍 된 혈연의 명도 약간의 지분을 주장하는 듯도 하고, 인간 종種 전반을 아우르는 숙명의 서사가 49에서 51 사이를 오가며 개입하니 그에 휘둘리는 듯도 하다. 이를 핑계 삼아 술판 거듭하는 것도 지겹고.. 이제 좀 규명하려는 의지의 그 약소한 지분이나마 조금이라도 더 키워보자 싶다. 철不知를 벗어나게 됨인지, 여전히 운명의 손바닥에서 노니는 형편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이토록 불완전한 시야 지닌 자그마한 존재이나 이따금 '너 자신을 알라'는 명을 따르려고도 하고 '자귀의自歸依'의 부름에 응하여 이끌림으로 답하기도 하니 이는 저마다 마음 밭에 씨알이든 달란트든 뭐라 이르든 간에 그 신神의 파편이라 일러도 좋을 어떤 것이 이미 잠재 그러니까 심기워졌기 때문인지도. 그렇다면 달란트고 뭐시기고 간에 가만히 묻고 가마니로 있다 인생 종 치든, 먼저의 명과 부름에 올-인 하든, '차든지 뜨겁든지' 양단 간 한 쪽을 택할 밖에(탐진치 궤도를 정주행 역주행 하느라 지친 육신, 때문에 부조리에 무덤덤 무감각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만 그러면서 실존 운운은 역시 꼴 사나운 짓).


잘 모르지만 하나님 내셨다는 이성/지성을 연마하는 후자의 편에 계속해서 끄달리는 건 진리에 이르는 길 복원에 목숨 올-인한 예수의 피로 거듭난 때문일지도. 따라서 DATA의 만다라, 삼라森羅의 빅-데이터 채굴[data mining] 또한 지속가능한 게 아닐지(어쩌면 강원도 탄광촌 거대 도박장이 들어서게 된 건, 이 피의 부름을 고의로? 오해하여 세속적으로 번안한 데서 이뤄진 건 아니었을까?! 모를 일이다 -_-;;).


따라서 그러하기에 분야分野 곧 말 그대로 각자 딛고 선 자리, 나뉜[分] 들판[野]을 내달린 끝에 감각한 면면을 취取하여 돌아와 다함께 패치워크. 사이 불가피하게 개입되니 오해. 하나의 진리든 뭐라 이르든 간에 그 상을, 각기 감각한 면을 바탕으로 제각각의 이해利害를 겹쳐 제 입맛에 기울도록 편집하여 내려는 힘이 종교의 기원에 개입되었을지도 모를 일. 다만 그렇게 인간의 편에서 개입함으로써 모난 각角을, 또 다른 편에서 시행착오 거듭하며 깨달음[覺]의 무수한 절/차/탁/마 연쇄로 마침내 매끈한 원에 근접..하게 되는 건 아닐지. 그럴 수 있겠다 여긴, 지갑 속에 고이 접어둔지 오래인, 느낌이 점점 확연해지는 이즈음.


우연찮게 얻어걸린? 미드 메시아.

어, 이거 봐라?!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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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_개신교 성경(새번역) 마태복음, 10장 34절 ~ 39절


여지를 발견, 논란의 장場을 생성하는 제품은 상투성에 함몰되기 일쑤인 자본제 공산품 가운데 최상품 아닌가?! 사실 이는 전위로 예술/철학 정의에도 부합하는 것일 텐데.. 박한 것은 차치하고 적그리스도 운운 극단의 평은 뭐랄까, 좀 한심하다 싶다;; 근본주의와 범신론 간 맞서든가 말든가 NO관심이지만 그런 식의 절대/유일/포괄 주장이래봐야 원리주의 환원, 도그마에 스스로 갇혀선 부자유의 전형을 그대로 증거하는 형편 임을 이제 좀 깨달을 때도 되지 않았나. 좌정관천坐井觀天인 편에서 전도傳道라니 어떤 마음이, 感이 그에 動할지 온전한 떨림으로 응답할지. 심지어 자본과 짝하여 일 벌이는 종교 지도자, 아편쟁이와 다를 바 없는 모습. 그러니 저들이 하나님의 백성 내지 중생 또 민중이라 이르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에서 자꾸 물러서게 되는 게 아닐까.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케 하면 연자맷돌을 목에 걸어 던지우는 편이 낫다'라는 말씀도 기억나는데, 거 그래가지고 괜찮으시겠습니까들~~;


먼저 언급하였던, 종교의 기원을 이루는 중에 그 상의 면면을 중심으로 편집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었을지 모른다, 라는 의심은 일단 젖혀두자. 이리한 연후에 다시 보니 오히려 드라마 속 메시아는 공백, 마치 백지 위에 찍어둔 점과 다를 바 없음을 환기시키는 듯싶다. 제각각 마음이야말로 신념의 처소. 거기 한 점으로 등장하는 대상. 그곳으로 모여드는 각각의 신념, 신념들. 이들 간 스크럼 짜 이루는, 연대로 뭉쳐 이루는 신념의 총체 안에서 신神이 복원되는 과정을 시연하는 것처럼 보이니 흥미롭다는 것.


새로운 관점perspective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주체들은 어떤 한 개인이 이미 본질적으로 왕이기 때문에 그를 왕으로 대우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주체들이 이 사람을 왕으로 대우하는 한에서만 그가 왕인 (후략)

_지젝, 『삐딱하게 보기』 中


참, 적그리스도.


이상한 일이다. 하나하나를 보면 모두 소심하고 말이 드문 애들이다. 그런데 모이기만 하면…… 우리 열 명이라는 밀가루는 반죽이 되면 엉뚱하게도 찐빵이 된다. 하나하나 가지고 있는 분위기는 서로 비슷하면서도 그들이 모였을 때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되어버린다. 조용한 밀가루들은 떠들썩한 찐빵이 되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게 싫은 건 아니다. 가끔 감당해내기에 벅찰 때가 있을 뿐이다. 그 자체로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찐빵은 대대로 우리를, 찬 겨울날 밤에 남산 꼭대기에 올려놓기도 하고 종3 골목 속에 몰아넣기도 하고 술집의 사기그릇 든 찬장을 뒤접어엎는 데 끌어내기도 하고 또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눈깔사탕 봉지를 안고 양로원들의 썩어가는 대문을 두드리게도 한다. 모두 찐빵의 횡포 때문인데 우리는 찐빵에게 질질 끌려다니기만 한다.

찐빵, 두려운 찐빵, 나는 다방 입구에서 처음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자의 상판때기를 똑똑히 보았다. 그 왕초의 주먹이 내 등을 아프도록 치는 것을 이따금 느끼기는 했지만 그날 오후에야 나는, 왕초의 푸르딩딩한 얼굴을 똑똑히 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왕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음도 동시에 보았다. 마치 원숭이가 부처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음과 같이 귀여운 데가 있는 찐빵의 표정, 내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듯한 그의 눈짓. 오오 거룩한 찐빵이여, 라고 소리내어 외치는 것이 차라리 현명할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_김승옥, 『다산성』 中


좋은 비유다. '_' 적그리스도 묘사에 이보다 더 적확한 표현이 있을까. 공백으로 동일한 궤 아닌지. 앞서 성직자의 타락에 빗대면, 그것은 신도의 맹목/방관과 짝한다 할 수 있겠다. 그릇된 믿음의 거울상.


결국 (적)그리스도 상을 빚는 건 지상에 난 자로 살아가는 사람 아닌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 같이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믿음은 '먼저 그 나라 그 의를' 구하는 실천 속에서 비로소 구체화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나름의 생각과도 상통하는 듯 여겨진다.

그런데 반대로 치닫는 형편이니 앙증맞던 '찐빵'도 각자도생과 살 섞으며 얼마나 끔찍한 모습으로 변했는지. 물구나무 섰던 니체를 바로 세우면 이미 괴물'인 나'이고 바로 내'가 타자'의 지옥'.


적으로 양분하는 근본주의자의 흑백논리로 먼저 겨눠야 할 대상이라면 다름 아닌 자신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 내키는 대로 하겠다고 이를 빌어 짓눌러 죽인 생명들 얼마나 많은지 국사에도 기록된 바다. 실은 그게 패착, 크나큰 실수. 대상을 없애면 공백은 외려 두드러지게 마련. 의도와는 정반대로 영원히 메울 수 없는 소실점, 부재를 끊임없이 소환하여 그 위치를 점했던 대상을 무한대로 부활시키고 만다. 왜냐하면 그네들이 점한 위치, 공백이야말로 기억 속 백-도어 back-door이기 때문. 그러니 지우려던 실체는 여러 모습으로 부활/접속하게 되는 것. 기성의 매트릭스를 끊임없이 교란하는 소수자 이반(異般, 일반一般에서 탈영토화를 자칭하는 성소수자 별칭을 의미 확장시켜 대입해봄)의 출현은 그래서 계속되는 것이다. 호접지몽의 기획, 부단히 이뤄지는 것이지.


전조선 반도의 모든 길이 비단 트랙으로 덮일 날 온다 그때도 유불선 합일 아니하는 자들은 익은 벼락 맞으리라

_진이정,詩 「앗싸, 호랑나비」 中


조선 반도를 가르며 깔리니 사상의 실크로드. 그런데 자생하다시피 한 유·불·선 조차 합일 일구지 못하는 이성/지성의 '낙타'라면 그이에겐 그저 '바늘귀'에 불과할 밖에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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