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민/관 어느 편이든 '인물 중심 구도'에 익숙한 나머지 그 한계를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도 새로운 '인물' 찾기만 거듭하는 데, 이래서야 '오너-리스크'와 같은! 그러니까 제 사리사욕이 꿈틀대는 '밀실'과 거리두기 실패하는 '인물'과 그이가 저지른 과오로 인한 위험을 계속해서 부담으로 떠안을 밖에 다른 도리 없을 것.
때문에 '우리'라 이르는 집단을 이루는 낱낱의 개인들이, 어느 때에든 어떤 상황/일이 벌어지든 흔들림을 최소화하고 다시금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자각이랄지 일종의 각성과도 같은 과정을 반드시 거치는 게 필요하지 싶다. 적어도 뜻 아니하게 부딪는 사안들에 그저 정신적 피해 그리고 상처 또 그에 따르는 고통만 호소할 건 아니지 않냐는 것. '인물'의 가해라는 것에 '어찌 그럴 수 있는가' 하는 식의 피해를 호소하는 듯한 대중의 의식이랄지 집단의 정서, 이에만 머물러서는 무엇도 바뀌지 않음을 조선'왕조'시대부터 겪은 바라면 이러한 역사의 교훈을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DNA에 새긴 바 된 民의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교훈을 일깨워 자기 속에서 책임을 의식하는 21세기형 시민/국민상을 일으킬 때, 이제는 맞았노라 여겨야 하지 않나 싶은 것.
누구든 저지른 과오가 있다면 만천하에 명명백백 뚜렷하게 밝힐 것을 요구하여 공/과를 뚜렷이 함으로써 구분, 공이라 여기는 바를 새로이 담아내어 계속 나아가길 멈추지 않아야 하리란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지 않겠나?!
때문에 사실에 입각, 저마다 딛고 선 자리의 입장과 처지를 분명히 하여 '아닌 건 아니'라고 뚜렷하게 선을 긋는 단호함과 강단을 보이는 데에 물러섬이 없어야 하겠고, 동시에 벌어질 이견의 각축장에서 격론 펼칠 각오를 당연 시 하여야 하지 않겠냐는 것. 해서 자명해지기까지의 지난할지 모를 과정을 응당 거쳐야 하는, 겪지 않을 수 없음을 모두 제 마음판에 다시금 새겨야 하지 않겠냐는 것.
이것이 두렵다고 벌써부터 피로를 호소하며 물러나 앉아 제 영역 내에만 머물려는 자체가 복지부동의 내면화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그 자체로 소위 '내로남불'이라는 이기적 안주에 지나지 않을 것. 사람이 이루는 역사, 불가피한 변증의 과정을 피하려고 들면서도 제 유익 만을 쫓겠다는 처사, 이렇게 양손에 떡만 쥐려는 행태에 더는 굴복하지 않으려는 개인이 아니고서는, 그 의지 발현 없이 '민주民主'는, 그야말로 입말로만 떠도는 유령으로 내내 겉돌 뿐이니!! 이 '지상'이라는 공간에 '당장'이라는 이 시간의 옷을 껴입지 못하면 도무지 이 '현실'이라는 육신에 깃들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민주'이기에!!
통상 대의제代議制의 표면에서 이뤄지는, '권리' 이양 만을 중심 삼는 데 실상은 '책임' 또한 동시에 소위 그 '인물'들에 이양 아니 떠넘겨지다시피 하는 구조임을 더는 회피하지 말고 직시하여야 할 것. 당초 이 구조/체계의 실상이야말로 '우리'로 뭉뚱그려진 모습일 뿐 파고들어 살피면 낱낱의 개인들이 이룬 것으로 다소 비약하자면 너와 내가 이룬 협잡의 연결고리야말로 이 거대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는 본질이 아닌지 필히 반성 우선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하나하나를 보면 모두 소심하고 말이 드문 애들이다. 그런데 모이기만 하면…… 우리 열 명이라는 밀가루는 반죽이 되면 엉뚱하게도 찐빵이 된다. 하나하나 가지고 있는 분위기는 서로 비슷하면서도 그들이 모였을 때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되어버린다. 조용한 밀가루들은 떠들썩한 찐빵이 되는 것이다.
_김승옥, 『다산성(多産性)』 中
그러니까 네거티브 내지 낭만에 지나지 않는 모형으로 거꾸로 세운 이 '찐빵'(자본제에 기생하는 개인들의 자조가 뒤섞인 모양새인)을, 이성理性을 바탕으로 포지티브 하게 좀 바로 세워보자는 것.
1인 등 소수에 집중되는 권력 구조 이면에서 책임 또한 그렇게 넘겨지듯 하는 것을 당연 시 여기던 데에서 물러나 당초 저마다의 권리가 자신이 지는 책임을 바탕으로 걸음 옮기자는 것. 지금이야말로 이를 행항여야 마땅하지 않겠냐는 것이고. 낱낱의 책임 자각과 실천이야말로 '일반의지'를 떠받치는 객관 형성의 근간 임을 인식, 이를 다시금 장전할 때에야 비로소 이 결집의 힘으로 역사는 진(일)보하지 않냐는 것이다(마치 새로운 것처럼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block-chain의 근본은, 바로 이 낱낱의 책임 의식과 이의 연대 속에서 절로 조형되게 마련인 반성/성찰의 공간 내지 절차를 가리키는 게 아닐는지).
인간種으로 인류에 바람직하다 싶은 義를 취하여 기대는, 개인들의 책임 의식이야말로! 제멋대로 내지 함부로 제 뜻대로 하려는 위인爲人의 그릇된 행보를 저지하는 억제력으로 실재하게 될 것.
1인과 소수에 귀속시킨 책임을 다시금 자신이 떠안으려는 그이의 태도에서, 가슴속 잠재태로 머물던 단호함과 강단은 비로소 바깥으로 활개를 치게 되는 것. 어쩌면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 곧 혈연 서사 바깥을 지향하려는 낱낱의 개인이 아니면, 각자도생의 각개격파가 그리게 마련인 인류 공멸共滅의 암울한 미래상을 피할 도리 없을 것.
책임을 뚜렷하게 의식하고 감당하는 작은 개인들의 각성이야말로 다시금 대문자 인류의 역사 진보를 가능케하는 것임을 새로운 과제로 세울 때이지 않나 싶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_개신교 성경(새 번역), 마태복음 7장 21절
자기 안에서 예수를 부활시키긴커녕 제 가문의 안녕과 혈연의 입신양명 위해, 하나님 아버지 뜻을 완성키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예수를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는, 아니 아예 사산死産시키는 걸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치들을 크리스천이랄 수 없음과 마찬가지.
단호함, 강단이라는 건 바로 이러한 때에 보이는 태도로 드러날 게다. 재벌을 문제 삼으면서 내 자식은 그 반열에 올라서길 바라는 데에서 물러나기. 그에 미련 두지 않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라 호의호식의 반대인 형편에서도 義에 기댄 바를 끝끝내 굽히지 않는 것(개신교 성경에서 비슷한 유형을 찾으면 '다니엘'이겠다).
소신所信, 그러니까 인간의 육신은 당초 믿음의 거처인 것!! 육신은 무엇보다 우선하여 그 모두의 義라 여겨지는 바람직한 데를 향하여 가리키는 나침의 그 믿음이 거居하는 처소로 기능하는 때에만 사람의 육신은 의미를 지니는 게 아닐지. 더하여 이렇게 사람이 사람과 함께하는 속에서 비로소 복원되는 것이 다름 아닌 신神의 형상.
'기억'한다면 '그립다'는 데에만 머물면 안 될 것이다. 이는 소위 개개의 인생에 주어졌으리라는 '달란트'를 땅에 묻었다는, 어리석은 이의 비유와 다를 바 없을 터. 이미 없는 존재를 그립다 이르면서도 한편에서 끊임없이 부활하는 이를 바로 보지 못하고 공정히 대하지 않는, 고작 제 편의와 이권의 안마당을 수호하기 위해서!! 제가 벌이는 이런 따위의 수구 행태를 뚜렷하게 자각하지 못하는 이라면(그러면서 진보 스텐스를 자처하는) 치들이야말로 인류 진보의 역사를 퇴행시키는 주된 요인.
지금 세대가 후세에 물려줄 유산이라면, 故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른 바대로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일 것이다. 적어도 기억한다는 이들, 그립다 이르는 사람들이라면 자문을 거듭해야 할 것. 당장 그이와 같은 이가 다시 등장하면, 그래서 제각각 처한 곳에서 바람직한 대로 하고자 하면 그이를 더 잘 보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공정하게 대할 수 있는가 하고. 모르는 새 당신 곁의 예수, 부처, 바울을 비롯하여 노무현을 배제하고 그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무시하며 이전과 다를 바 없는 행태로 그저 기득권에 봉사함으로써 제 안위, 혈연과 가문의 평안을 구하고 있지나 않은지 끊임없이 아니 죽는 날까지 반성하고 태도를 고쳐야만 겨우 이루는 역사 임을 더는 뒤로 하지 말자는 것. 분명하게 인식하고 운명으로 받아들이자는 것. 인간種으로서의 책무를 자각하자는 것.
자유自由, 스스로(에게서) 말미암는다는 것. 이는 그이가 義에 기댈 때이겠다. 그래야 마음을 내어도 걸리는 바가 없겠고, 이로써 공정은 그이의 행함 속에 절로 구현될 것이므로. 그러니 개신교 성경에 옮겨진 예수의 말, '먼저 그 나라 그 의를 구하라'는 표현은 나아갈 바를 가리키는 푯대로 서서 사람으로 하여금 길 내게 하는 것이리라.
언제 어느 때에 변할까. 때가 따로이지 않은 것. 악전惡戰 중에도 분투奮鬪를 멈추지 않는 고군孤軍 되길 감당하는 것. 두렵고 괴롭지만 끝끝내 감당하며 물러섬 없는, 사즉생死卽生이 아니고서야 바뀌길 기대하는 자체가 무임승차를 염두에 두는 것. 이것이 부끄러운 줄 아는 어른, 장성한 세대가 지금 취하지 않으면 안 될 태도이지 않을지!!
물적 토대를 점령한 제 빈곤을 벗기 위한 ready-made가 아니라! '자루' 없고 '보섭' 잃은 내면의 외롭고 쓸쓸함조차 철학의 기둥 삼는 빈자貧者의 운명愛 만이 저와 다를 바 없는 이들 받치는 '상처입은 치유자'로 ready-made인 형편이겠다.
붙임 : head 삽입 이미지는, 19년 1월께 국외 무료 이미지 사이트에서 옮긴 것인데 출처가 명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