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눈길, 손길, 발길. 눈/손/발이 마음 건너는 '길'을 내기도 할 터. 말 그대로 '몸 가는 데 마음 가'는 형국이겠다. 이렇게 걸리는 바 없이 서로 내왕하는 속에서 본래 한마음임을, 이것만 실감하고 살 수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을 텐데. 마음의 거푸집일 뿐인 육신을 경계로 너/나'를 구별 짓는 무익함을 연속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것(이기利己를 꾸리려는 욕망의 처소이자 신전으로 제 신체 아끼기를 무엇보다 우선하니 오죽하면, 예수 또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가 네 몸 아끼는 만큼만 하라'라고 따로 밝혔을까 싶고).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目]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은 모두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_개신교 성경(새번역) <요한 1서> 2장 15,16절
따라서 주의할 바라면, 욕망 또한 이 몸의 눈/손/발을 빌어 '길'을 내고 그 '길' 위를 건너 다닌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작태를 자신이 모르지 않음을 계속해서 마음에 일으켜 스스로 경계하여야 마땅하다는 것.
당초 '해탈解脫'이란 표현 자체가, 눈/손/발로 타他에게 건널 길을 구축하고 있는 기초가 다름 아닌 갖가지 나'의 욕망 임을 풀어[解] 가늠하게 되니 비로소 그에서 물러서고 벗어남[脫]을 뜻하는 게 아닐지. 이 자본제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자기 소외' 역시 여전如前, 곧 전과 다를 바 없이 제 몸을 그저 욕망이 정주할 공간으로 내어주니 그 안에서 빚어지는 괴로움을 어쩌지 못하여 결국 '가지려는 욕망(자본가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을 내면화하는 데 그치고 마는 게 아닐지. 때문에 비자발적 '소외'의 형편 만을 탄歎하는 데에 머무르며 그저 맴돌 수밖에 없는 게 아닐지. 그러므로 key는, 나'라고 여기는 이 육신을 더는 욕망의 거처로 내어주길 거부하는 태도와 그 실천에 있을 것. 나는 이처럼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개인의 국면 전환 시도를, 김진석 선생의 '소네疎內'¹라는 표현을 빌어 (좀 다르게) 이르고 싶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라 여기는, 곧 제 것이라 여기는, 욕망(육신을 거처 삼아 똬리 틀고 앉은)과의 결별을 주도하는 행위를, '소외'에 반反하는 '소내'로 이해하면 어떻겠냐는 것. 더하여 이것이 가능하다면, 비자발적 소외에 쪼그라들어 있지만 말고 저마다 자발적 적극적으로 제 욕망과 거리두기 곧 '소내'를 실천하기를 제안하여 보는 것이다. 이리하면 욕망의 가두리로 재편된 육신 內 '밀실'에 스스로 갇힌 바 된 구속 상태의 자아自我 또한, 비로소 해방解放을 경험하게 되지 않겠냐는 것. '-感'이니 '-心'이니 따위로 가르는 당장의 '자존自尊' 또한, 이를 거침으로 해서 '유아독존唯我獨尊'과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 다른 지경이 아님을 깨닫게 되니 '자유自由'일 밖에 없고 따라서 절로 '독립獨立'하게 되지 않겠냐는 것.
인생人生, 인간種으로서의 삶을 모두 제 형편에서 당연히 누려야 마땅하다는 식으로만 받아들이기 쉬우나, 이 같은 태도야말로 '천부인권天賦人權'을 단순 오해 이상으로 고의 왜곡, 이현령 비현령에 견강부회의 아전인수 낳기 쉬운 것.
당초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²라는 책임이 함께 주어진[天賦] 이상, 사람[人]이란 이를 마땅히 감당하려는 실천 속에서나 '사람'다운 존재로 자리매김될 수 있음이고 그러한 때에나 권리[權] 주장 또한 타당해지는 것. 그러나 욕망은 이를 끊임없이 침노侵擄하니 이 사리사욕과 부대끼며 다투느니 다름 아닌 사람의 삶. 이 쟁투에서 승리 아니 적어도 위태롭지 않으려니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엇보다 우선하여 자기라 여기는, 실상 욕망의 legion에 점거당한 상태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고.
따라서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라는 표현 또한, 나'라고 여기는 이 물건의 정체를 궁구하는 자기 싸움을 무엇보다 우선함으로써만 겨우 위태롭지 않은 지경에 처할 수 있게 됨을 뜻하는 바라고 나름 이해할 수 있겠다. 나아가 이런 저마다의 '극기克己'야말로 기득권旣得權 바탕으로 배열 이룬 커넥션의 매끄러운 표면, 기성旣成의 잔잔한 수면에 파문波紋 일으키니 기어코 義를 중심 삼은 禮(이든 道이든 이르는 바 무엇이든 그것이 가리키는 바 '진리'라고 여겨지는, 여길 수 있는 바)를 복원시키고야 마는 것.
사막을 홀로 걷는 듯싶은 인생, 오롯한 싸움이라면 결국 자기라 여기는 것들과 벌이는 싸움일지 모를 일. '죽으면 죽으리라'³ 는 사즉생死卽生의 격전지는 바로 자기 내면. 이 쟁투에서 지킬 것이라면 義를 향하고 가리키는 나침羅針으로써의 마음, 따라서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⁴는 말 또한 마땅. 의를, 그를 향하는 마음을 지키는 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 이에 이르기 위한 조건으로써의 적극/자발의 '소내'.
이를 수행하는 '인물'이 따로이지 않다는 것. 왕후장상의 씨가 아니라 오히려 잃을 게 없는, 입신양명하자고 각자도생 미궁으로 스스로 발 들이(려)는 욕망과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마음이 가난한'² 낱낱의 씨알이어야 가능하지 않겠냐는 것. 때문에 '상처 입은 치유자'³가 들어설 수 있게, 들어서게 되는 게 아닐지.
¹김진석, 『소외되기, 소내되기, 소내하기』, 문학동네
²개신교 성경 <마태복음> 6장 33절 중
³개신교 성경 <에스더> 4장 16절 중
⁴개신교 성경 <잠언> 4장 23절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