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자리가 만드'니 '사람'의 격格이 그에 끼워 맞춰져 좌우되기 십상. 트리클 다운~♪ 따위의 피리 부는 자본 서사에 부합하는, 그러니까 이윤 추구의 합목적적인 그렇게 합리적(合理的X, 合利的O)인 형태로 마련된 '자리'. 거기 앉은 치에게 (비록 그이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을지언정) 인간적인 결정을 기대하려는 자체가 당초 난센스일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그 '자리(지위.etc)'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 '자리'를 점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 또한, 실상 '자리'가 '인격'을 사육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있을 뿐인지도.
어쩌면 맑스가 이른 '인격화된 자본'을 '자본가'에 한정하려는 시각 자체가 이미 낡은 것일지도. 무산자無産者에 이르기까지 자본 서사를 내면화한 21세기, 오로지 '돈'의 시그널 만을 주목하며 수신하려는 5感+α 기관의 신체가 (그야말로 좀비처럼) 활보 중인 마당에.
취取하려는 데에만 취醉해 있는 사람들 사이는, 병렬된 차이나 (그에서 비롯하는 연쇄와 다발 그러니까) 생성의 영구적 변증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서늘한 긴장 대신, 상대의 같잖음을 폭로하고 깔보며 저와 내가 같지+않음을 끝끝내 세워야 하는 (그러나 그 때문에 별 다를 것 없는, 천편일률!) 동이부화同而不和의 연속체 곧 서열로만 설명 가능한 게 아닌지. 이처럼 너/나 할 것 없이 취하려는 데에만 온 신경이 쏠린 판이니 "내 (고작) 이러려고 그 고생(?) 하며 이 '자리'에 앉았나" 따위의 토로 또한 그냥 우스개로만 읽히지 않는 것.
따라서 이즈음이라면 오히려 무엇보다 책임을 우선하고 이를 무겁게 여기(려)는 '사람'을 '자리'에 앉혀야 마땅! 이를 당연하다 여기는 여럿의 믿음이 상식으로 법으로 들어서니 '자리'는, 이 여러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그 본의를 찾게 되는 것. 이 '자리'에 앉고자 하는 '사람' 또한 그 상식으로 가늠하는 기준과 법에 들어맞도록 스스로를 재단할 것이므로 매사 절로 경계하게 될 것.
당초 이 사회의 분업체계에서 생산/근로 현장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풍부한 자유를 누리며 공부한 치들은 저가 누린 자유 이상으로 다시 재부財富룰 취하려는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자 나아가 적반하장賊反荷杖이겠다. 이 여러 사람이 마땅하다 여기는 형편으로 재구성된 '자리'에 들어맞는, 앉을 이의 덕목이라면 마치 개신교 성경 레위기에 기록된 바처럼 제례의 책무를 담당하는 대신 생산/근로 현장에서 열외 되는 것임을 선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우선! 다음으로는 제 삶을 영위하는 생활 조건으로써의 최소한이란 걸 당연시하는 것!! 곧 십시일반十匙一飯, 생산/ 근로 현장에 참예하지 않은 자신이 떠 넣는 밥 한 그릇 자체가 그에 참예한 다른 열 사람이 제 몫으로 취해 마땅한 한 술을 양보한 것임을 뚜렷하게 아는 것. 사리사욕과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이들로 채워야 이 수성獸性의 끝 모를 부박浮薄을 멈출 수 있을 것.
이제 저 꿈의 세계로 망명한 채 머물고 있는 정의를 이편으로 불러 세워 작금의 '거꾸로 선' 현실을 다시금 바로 세울 '필요' 아니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바람직한 義가 개념槪念으로 공유되는 바탕에 자리하게 마련인 낱낱의 믿음. 나로서는 이 '믿음'을 저마다의 속내에서 '불러일으키는' 그러니까 '기신起信'이 필요한 때라는 걸 강조하고 싶다. '기신起信'하는 저마다 제 한 몸 '바로 세우고'자 그러니까 '기신起身'하게 마련이니 이 기신의 연쇄/파동이 결국 '나타와 안정'으로 고요한 기성의 수면을 뒤집는! 파문波紋의 구성요소일 테니.
'믿음' 운운하니 무슨 속설 같아 되려 믿기 어려운 얘기처럼 느껴질지 모르겠다. 그래서 덧붙임. 당초 신용이라 일컫는 화폐의 창출, 창출이라 이르는 그 실상은 다름 아닌 미래를 그 시간을 당겨 쓰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 '믿음'에 기초하지 않으면 불가능이지 않냐는 것을 새삼 새겨두고 싶다. 누가 됐든 통장에 찍힌 수치만큼의 화폐, 이를 제시할 때 그에 부합하는 산물/서비스와 교환 가능하리라는 약속에 대한 '믿음'(화폐 뒤에 은폐/엄폐한 소수의 과소비와 바로 그 화폐에서 배제된 다수의 과소소비 간 균형 이루니 양극화 진행 중에도 사회는 탈 없어 보임. 이는 사실 착시이나 공공연하니 마치 당연하다는 듯 현실에 자리매김). 이 '믿음'에 기초한 (경제) 시스템임을 폭로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붕괴 현장. 기형의 신토불이身土不二 '믿음'이 투기 과열을 억제하려는 정책의 실패를 낳는데 문제는 이로써 유동성 함정 liquidity-trap에 빠지게 되는 경우. 인위로 부양된 유동성이 담보로 하는 부동자산에 가치로 끼어들며 거품화. 기축통화 아닌 원화의 유통에 필히 수반되는 외채. 확장된 신용 상태에서 천정부지의 가계부채를 실감 못하나 외채라는 트리거가 콜로 당겨지는 순간 신용으로 연결된 자산의 매각/처분 또한 연쇄, 와중에 거품 빠지며 자산 가치 폭락. 금융권 등에 유동자산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시 도래, 금융권 붕괴(이 균열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게 신용의 무한팽창식 확장에 제동 거는 '지급준비율'일 것). 러프한 대로 이런 붕괴 시나리오를 예상할 수 있겠다(이것이 故김수행 교수를 위시한 몇몇 분들이 강조했던 '신용 공황' 상태랄 수 있겠고).
요는 의례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체계야말로 체계로 설 수 있음이 바로 그 '믿어 의심치 않는' 여럿에 의한 것이지 않냐는 것. 몽매의 어리석음조차 부지기수의 믿음이라면 이를 바탕 삼아 현실에서 힘power으로 작동할 수 있고, 이를 부리려는 치들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얘기.
당초 자본 서사에 걸맞게 마련된 '자리'에 오르는 '사람'부터 이미 그 자본주의의 독신자篤信者이지 않겠냐는 것. 따라서 바람직한 바를 앞세우는 이들이 여럿인 형편에서 그 제각각의 믿음을 블록체인으로 '자리'를 재구성하고 감시/견제 지속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 다만 한꺼번에 여럿일 수 없으니 이를 배움으로 깨달아 알게 된 '사람'부터 먼저 투신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채 백 년이 못 되는 연한의 자기 삶 가운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이다.
*개신교 성경 <디모데후서> 4장 2절 중,
새 번역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
음.. '술 권하는 사회'라지만 서로에게 권커니 잣거니 할게 비단 술[酒] 뿐인가 싶고, 취[醉/取]할 것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아서 술이든 돈이든 따위뿐일까 싶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