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형편이 지장 없으리라는 낙관은 지속 가능한가?!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by 사각공간

앞으로 어찌 될지 가늠할 순 없지만 당장 나의 형편을 좌우할 만큼 영향을 끼치진 않으리란 낙관은, 내 사는 형편에 지장 없으리라는 믿음은, 지속 가능한가?! 소위 '뉴노멀', 격리마저 감내해야 하는 거리두기의 일상化. 이미 도래한 현실 속에서, 과연..


와중에 제 '모름'을 성찰하는 바 없이 '다름' 만을 앞세워 주장하는 식. 제가 쌓아 올린 편견의 벽 속에서 정저지와井底之蛙 한다면 모르겠으나 오히려 선을 넘고 수위를 높여 넘나드는 게 다반사. 그런 사례, 일부러 찾지 않아도 당장 일부의 좌정관천坐井觀天 몰지각이 빚은 폐단과 그로 인한 해악害惡을 직·간접으로 겪고 있으니. 게다가 이를 수습하는 데서 연대 책임을 벗을 수 없는 형국이라니..




"선전포고 없이 우리와 전쟁을 벌이는" 행위자는 인간 집단뿐 아니라 현존하는 전 지구적 사회경제 시스템이기도 하다. 그것은 요컨대 우리 모두(곧 인류 전체)가 참여하고 있는 전 지구적 현존 질서다. 이제 우리는 집합체 assemblage 개념의 진정한 전복적 잠재성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개념은 인간을 포함하면서도 '탈인간적' 관점에서만 고찰 (…) 진정 이론적이고 윤리 정치적인 통찰 (…) 베닛(Jane Bennett) 같은 이른바 신물질론 New Materialism 주창자들이 물질을 기계적 부분들의 수동적 혼합으로 환원하는 데 반대할 때, 그들이 주장 (…) 즉, 생성되는 속성들은 여러 행위주체 간의 예측할 수 없는 만남 가운데 생겨나며, 특정 행위의 행위자는 서로 다른 종류의 온갖 신체들을 가로질러 퍼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위자는 사회적 현상이 되며, 사회성은 그 경계들을 확장해 관련 집합체에 참여하는 모든 물질적 신체를 포함하게 된다.

(…) 인간이 일부 포함되지만 대부분은 비인간적 신체들의 집단이다. 이러한 태도의 윤리적 함의는 우리가 우리보다 더 거대한 집합체 내부에 결박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공적 존재들의 요구에 좀 더 민감해져야 하며, 자기 이해를 새로운 의미로 정식화하여 그것들이 처한 곤경에 반응해야 한다. (…) 인간은 그저 잠재적으로 무한정한 세력들의 네트워크 중 하나의 세력일 뿐이다. (pp137,138)

_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 中


이렇게 '특정 행위의 행위자'야말로 '서로 다른 종류의 온갖 신체들을 가로질러 펴져 있'는─이'것'이 '전 지구적 현존 질서'인─마당에 하물며, 이를 좁힌 인간界의 '사회성'이래 봐야 '집합체에 참여하는 모든 물질적 신체를 포함하'지 않을 도리 없을 것. 이런 현실을 직시, 나'로 국한하는 사정과 형편이 지장 없으리라는 낙관 내지 믿음은 일찌감치 내려놓아야 마땅. 오히려 불가피한 연대를 자발적으로 조직, 뉴노멀 시대에 들어맞는 새로운 형태의 소통을 선제적으로 구축함이 당면 과제이지 싶다.


여기서 잠시 旣구축 on-line 환경에서 맞은 뉴노멀이 인류 진화에 미칠 영향을 러프한 형태로라도 그려본다면 어떤 모습일까. 다소 간 극단을 무릅쓰고 이른다면 아니 점친다면 2개 방향으로의 전개를 가늠할 수 있지 싶은데. 이를테면 전두엽과 말초 중심으로 특화된, 자극 수용체로서의 인간形과 그야말로 '전인全人'과 같이. 상상을 조금 더 밀어붙이면, mass- 단위로 뇌동부화雷同附和 가능한 on-line 환경이 전자에 있어선 非이성의 비가역적非可逆的 반지성化를 부추기는 한편 후자에 있어선 오히려 지성을 발판 삼아 도약을 꾀하는 합리 생성, 개성 강화의 場으로 기능하지 싶다(이때의 양측 간 적대적 변증 구도나 그로써 갱신되는 合의 영구적 도출이라는 핵분열이야말로 '오래된 미래' 상일지 모르겠다. 또 양측 사이에 천태만상의 그라데이션을 입히면 그건 그것대로 현실에 가까운 모델일 수 있겠다 싶고).


비이성의 반지성화, 이러한 고착이 초래할 파국을 가늠하는 데에 굳이 시뮬레이션이 필요한 것도 아닐 듯. 그 비가역성만큼 증대되는 엔트로피의 끝은 아노미 상태 아닐지. 이런 디스토피아를 밀쳐내기 위해서라도 고착이 불가하도록 끊임없이 의미를 주무를 필요가 있겠다. 이를 주도하자면 (인간계를 비롯한 전 지구적 집합체의) 연성 증대를 함께! 꾀하지 않을 수 없겠고. 그러자면 미끄덩 미끌~ 미끄럼 연속 가능한 유연성 내재한 인간形의 51% 포진은 필수!! 이것이야말로 인간種의 존속을 가능케 하는 필요충분조건이지 않을까.




기왕 뜬구름 위 퍼스펙티브를 빌었으니 조감鳥瞰 아니 오감烏瞰하여 볼 일이다.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으로 인해 맞게 된 뉴노멀은 의도한 바 없이 아니 그 때문에, 화폐를 근간으로 하는 기존 요구불要求拂 시스템의 실상 곧 富의 원천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만 것!!


(…) 기업뿐 아니라 개인을 돕는 데도 쓰인 수조 달러의 지출이─그러한 몇몇 조치는 전국민기본소득 지급과 유사하다─경제를 활성화하고 극심한 가난과 기아를 막기 위한 극단적 조치로 정당화되는 경우인데, 여기에는 훨씬 더 급진적인 무언가가 결부되어 있다. 그러한 조치에 따라 돈은 더 이상 전통적 자본주의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돈은 가용자원들을 분배하기 위한 하나의 상품권이 되어 사회가 가치 법칙의 제약 바깥에서 움직이게 한다.(p139)

_같은 책


알렌카 주판치치가 지적했듯이, "일터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는 일견 노동자를 근심하는 듯한 트럼프의 말이 거짓임을 알려주는 대표적 사례다. (…) 저임금 때문에 스스로를 격리시킬 여력이 없(는) (…) "일터로 돌아"가게 될 사람들은 빈자들인 반면 부자들은 격리 상태에서 편안히 머물 것이다.(p147)

_같은 책


화폐 시스템, 곧 화폐의 요구불要求拂은 교환가치를 담보한다는 믿음을 모두가 공유하는 선에서'만' 작동한다. 산물産物의 축적은 한계가 뚜렷하다. 썩기 때문. 요구불 곧 언제든 내놓으면 액면 가치만큼의 산물(과 서비스 등)을 교환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썩지 않는 화폐를 소유/축적하는 것. 그러나 실상은 썩는다. 이렇게 썩어서 사라지는 공간/틈(화폐 경제는 실물 경제와 괴리될 수밖에 없다)을 메우기 위해서 쉼 없는 생산이 과정으로써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 24시간을 둘/셋으로 나누어 교대하여 생산에 임하기 때문에! 산물産物이 서비스 등등이 공급되어 늘! 언제나! 항상! 거기 있는 것처럼 보여 요구불 화폐와 대응 관계처럼 보일 뿐.


하지만 그저 착시에 지나지 않는 것. 그러니까 뉴노멀로 드러난 富의 실상이란 요구불 믿음에 의해 지탱되는 노동 연속의 산물 공급 시스템 자체인 것. 따라서 시스템 참가자 가운데 일부의 편취나 또 그의 상속/증여는 당초 불가. 그 일부가 편취한 교환가치의 무한 저장을 막는 건 간단하다. 참가자 다수가 그 믿음을 철회하면 그만인 것! 오히려 철회 없이 노동 종사 등을 지속하기에 편취한 부의 상속/증여가 증식이 가능한 현실로 자리하는 것!!


참여자의 능력 등과 무관하게 旣축적 요구불 화폐 규모대로 서열화, 이의 심화로 고착되는 형편이 공정할까. 아니면 참여자에게 고루 또 두루 분배하는 형평을 가능케 하는 시장을 계획하는 편이 나을까. 적어도 하이브리드 형태를 고려함이 외려 마땅하지 싶은 데 그를 실제로 실험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한 것!! 풍요와 빈곤 간 양극화보다 '수수한 삶'을 전반으로 누리는 형편이 훨씬 건강한 형태. 분배 형평을 토대로 교환가치에 역점을 두는 형태, 무한 저장/증식 등의 축적을 가능토록 하는 믿음을 대체/재구성. 일정 기간 미사용시 액면 가치 일부 감가를 약속/시행한 형태 등은 이미 있었다. '미하엘 엔데'가 『모모』를 통해 '시간 도둑'에 맞서라는 역설의 바탕에 자리한 '실비오 게젤'과 같은 인물이 거론했던 바나 그에서 비롯한 실험과 성공 사례들이 그것.




그러니 우리는 "바이러스 덕분에 우리는 진정한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집중할 수 있게 될 것이다"라는 뉴에이지 New Age류 정신주의자들의 명상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진짜 싸움은 어떤 사회 형태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신세계질서 New World Order를 대체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질 터다.(p153)

_같은 책


물론이다. 그래서 더더욱 그 믿음을 재구성해야 하리라는 데에 역점을 두어야 하잖나 싶다(여기서 강조하는 믿음이란, 과거 제국주의의 오만에 기댄 오리엔탈리즘이나 일본의 서구를 향한 사대주의 아니 굽신-ism에 바탕을 둔, 선禪을 물욕物慾으로 재영토화시킨 zen-style 내지 미니멀리즘에서 강조하는 정신.etc와는 그에서 脫영토화 된 것이라 데서 다르다. 자본제를 구성하는 물적 토대의 순환계를 실제로! 지탱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그를 대체하려는 것이기 때문). 믿음의 재구성. 이를 위해선 믿는 바를 공유하는, 곧 공명共鳴 가능한 신자信者 확보가 관건이라면 관건인데 이때 기억 중에 떠올려야 할 말씀이야말로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노라는 예수의 말씀이겠다. 류영모 선생 또한 이른 것처럼 육신 받아 나기 전[生前] 이미 '얼'로서 하나였으니 불경 가운데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을 풀어 '원래물불이元來物不二' 읽으면 서로 통하고. 비추어 '자귀의自歸依'의 내면 탐사 끝에 '얼'에 맞닿는 바가 다름 아닌 곧 '법귀의法歸依'. 가름끈을 닻처럼 붙잡고 제 내면으로 침잠하는 그 끝에서 마침내 '얼'에 닿으니, 다시금 그 '얼'로 하나인 형편을 깨달음으로 해서 '거듭남'이요, 이렇게 한 믿음 일으켜[起信] 제 한 몸 우뚝 세우니[起身] 이 기신이 짓는 파문이, 그 연쇄가, '얼'을 구심으로 하여 무수히 생성되는 동심원들이야말로 소통의 정체正體이겠다.


의도와 무관하게 맞닥뜨린 뉴노멀이야말로 인류의 의도로 빚은 문명을 벗고 그 그늘을 성찰할 기회일지 모른다. 넌더리 나는 超연결 따위;; '보이지 않는 손'에 매달려 춤추던 욕망의 꼭두각시놀음에서 돌이켜 화폐이든 랜선이든 on/off 주도권을 제가 쥐는 것. 편견을 돋운 끝에 홀로서기를 부추기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독자獨者 생존을, 보고 듣고 읽고 새기는 공부의 총체를 가늠하는 讀으로써 自生(/自活) 도모하여 生存 차원에서 自尊 차원의 도약으로 전환하는 그야말로 독자생존[讀/自生/尊] 기회일지 모르겠다.


하면 격리와 거리두기의 물리적 제약이야말로 절호絶好. 자기 내면에 만인의 객관을 들임과 동시에 1인용 주관을 경작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계기 아닐지. 아니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블랑쇼(모리스 블랑쇼)는 어째서 살아남길 바라는 우리의 절실한 희망이 "변한 것은 잊고, 지금 있는 만물의 상태를 안전하게 유지하면서, 우리 목숨만 부지하자"는 태도를 뜻하지는 않는지 보여준다. 실제로는 그 반대가 옳다. 우리는 인류를 자기파괴에서 구하려는 노력을 통해서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이 치명적 위협을 통해서만 통합된 인류를 그려볼 수 있다.(p130)

_같은 책

*개신교 성경 <마가복음> 9장 23절 中

keyword
작가의 이전글코로나19, 시험대에 오른 인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