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사회갈등 잠금해제(로컬+독서공동체 구인회救人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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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공간
결국, 학원 없는 학창 시절을 보내고 상대적으로 수월하고 평등하게 대학 문턱을 넘었던 386세대가 지옥 같은 입시 경쟁 체제를 만들어낸 셈이다. 사교육에 쏟아부을 여윳돈이 없으면 서울 소재 대학 진학, 이른바 '인 서울(In-Seoul)'을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교육 세습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서울대 · 고려대 · 연세대의 고소득층 재학생 비율이 전국 평균보다 2배 가까이 높은 46%나 된다는 점은 이를 방증한다. 그들은 '어쩔 수 없었다' 말하고 싶겠지만, 교육이 고역(苦役)이 되는 수십 년 동안 적극적으로 부화뇌동해온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교육 전문가로서, 또 학부모로서 말이다. (…)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운 좋게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바로 386세대다. 그들은 균질화한 부동산 개발 정보를 이용해 앞선 세대보다 더욱 기민하고 대담하게, 그리고 전면적으로 추월차선에 올라탔다. 다른 세대와 달리 386세대 구성원들은 차별 없이 아파트 구입에 나설 수 있었다. 점차 투자와 투기의 경계도 모호해졌다.

_『386 세대유감』中

<조건 2> 비경쟁성 그리고 가치와 목표의 분리
높이 평가되는 재화와 역할 중 최대한 많은 것이 비지위재(또는 지위적 성격이 약한 재화)와 비경쟁적(또는 경쟁적 성격이 약한) 역할이어야 한다. 또한 다양한 재화와 역할이 한데 결합되기보다는 분리되어야 한다. (…) 부모는 언제나 자기 자녀에게 발달 기회를 비롯한 유리한 조건을 제공함으로써 기회 불균등을 조성한다. 단지 사람들이 추구하는 재화와 역할의 일부가 비지위적이거나 비경쟁적이라고 해서 가족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조건 2>의 방향으로 이동하면 판돈이 줄어든다. 제로섬 경쟁과 지위재는 각각 절대적인 유리한 조건과 상대적인 유리한 조건의 구분을 무너뜨린다─즉 어떤 사람의 유리한 조건을 다른 누군가의 불리한 조건으로 뒤바꾼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재화와 역할의 대부분이 경쟁적이거나 지위적인 것이라면, 자원을 가진 부모는 이 자원을 자기 자녀를 위한 유리한 조건으로 바꿀 동기가 강해진다. 경쟁하는 다른 아이들이 가진 유리한 조건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부모가 유리한 조건과 기회를 넘겨주기 위해 하는 모든 일은 자기 자녀의 (절대적) 지위를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이 접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과 기회를 줄이기도 한다. 높이 평가되는 재화와 역할(중 더 많은 것)이 비지위적이거나 비경쟁적일 때, 이런 효과는 사라진다. 남의 유리한 조건은 이제 더 이상 나의 불리한 조건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가족 문제는 상당히 완화된다. 또한 '무기 경쟁' 효과, 즉 더 많은 자원을 가진 부모가 점점 더 많은 자원을 추가적인 유리한 조건으로 전환해서 자기 자녀가 다른 아이들을 계속 앞지르게 만드는 효과를 방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_조지프 피시킨, 『병목사회』 中

혈연에 집중하는 내리사랑이 진입장벽과 다를 바 없는 병목을 빚고 당장은 물론이거니와 후세마저 자기 착취를 일삼는 능력주의에 매몰되게끔 만든 게 아닐까요. 더하여 이에 분노하는 청춘의 목소리가 기성 정치 마당[場]으로 유입과 동시에 거세되는 형편이라면, 이러한 때 별개의 출구/장을 마련하는 것이야말로 장성한 세대 곧 어른의 책임이겠지요. 마치 진영을 대표하는 듯싶은 인물을 중심으로 짜이게 마련인 구도는 당장 어찌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 한계가 뚜렷함을 매번 실감하며 살아온 마당에 그저 귀차니즘/먹고사니즘 각자도생에만 충실한 건 본보기 삼기엔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진보/보수 운운해봐야 개념 소비에 그칠 뿐이니 민주民主가 패션이나 액세서리가 아닌 바에야;;


인격人格보다 가격價格 중심으로 구성되는 일상을 삶으로 영위하자면 정말이지 테스형, 사는 그대로 생각이 끼워 맞춤되는 게 아닌지요;; 그러니 실체 없는 유령으로 겉돌 밖에 다른 도리 없는 것이고. 어쩌면 기성세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할 시기는 이미 지났음을 인정해야 마땅하지 싶습니다. 기왕 죽음으로 다가서는 형편에서 사즉생死即生의 死를 각오하는 책임을 우선하는데서 비로소 후세로 닿는 生이 지속 가능한 형편 되겠지요. 불로장생 내지 영생 꿈꾸듯 그야말로 도처에서 '악의 평범성' 곧 '평범한 악'의 축으로 '내로남불'에 일조하는 것보다 낱낱의 씨알로 썩어져 비옥해질 후대를 기대하는 편이 뭐랄까 멋있지 않나요. 하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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