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한 마을이 있다. 관광수입으로 살아가는 마을이다. 그런데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관광객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모두가 마을의 앞날을 놓고 점점 비관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드디어 관광객 한 사람이 와서 호텔에 방을 잡는다. 그는 100유로짜리 지폐로 숙박료를 지불한다. 관광객이 객실에 다다르기도 전에 호텔 주인은 지폐를 들고 정육점으로 달려가서 외상값 100유로를 갚는다. 정육점 주인은 즉시 그 지폐를 자기에게 고기를 대주는 농장 주인에게 가져다준다. 농장주인은 얼른 술집으로 가서 여주인에게 빚진 해웃값을 지불한다. 술집 여주인은 호텔에 가서 호텔 주인에게 진 빚을 갚는다. 그럼으로써 돈이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첫 사람에게 돌아온다. 그녀가 100유로짜리 지폐를 카운터에 내려놓는 순간, 관광객이 객실에서 내려온다. 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냥 나가겠다는 것이다. 그는 지폐를 집어 들고 사라진다. 돈이 돌기는 했으나, 번 사람도 없고 쓴 사람도 없다. 그래도 마을에는 이제 빚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위기라는 것도 결국 이런 식으로 해결하고 있는 게 아닐까?
다리우스 워즈니악의 스탠드업 코미디 <기본적인 시사 분석> 중에서
_베르나르 베르베르,『웃음』2권 中
인용문에서의 화폐는 제 본 기능인 교환에 충실합니다. 외려 위기를 촉발시키는 실물경제와의 괴리를 극복 아니 해결하려면 이 기능에 무게를 얹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이로써 모두 행복. 사실 이거면 되는 걸,
현실은‘just in time’ 하자고 24시간‘stand by’ 상태;; 제시하는 화폐의 액면 가치에 해당하는 재화/서비스가 마치 그에 1:1로 대응되는 것처럼 착시 불러일으키는 이면에 바로 여러분이 자리해 있는 것이지요. 24시간을 2교대 3교대로 쪼개어 생산/제공 지속하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그 덕이라 표해도 좋을 만큼의 몫은 누리지 못하지요. 당초 그렇게 분배되지 않잖아요, 시장에서는. 왜? 팔 것이라곤 노동력뿐이라는 도식. 하면 자본주의 바로 그 자본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개인의 노력만으로 형성한 것일까. 그러니까 된 것과 한 것 간 차이, 전자의 비율이 높을수록 축적 과정의 공정성 여부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오늘(현재) 당겨쓰는 부채負債는 내일(미래) 갚으리라는 믿음, 곧 신용信用을 근거 삼습니다. 해서 채권債權과 채무債務 관계關係 성립. 화폐 역시 이 같은 믿음을 토대로 성립된 일종의 프로토콜 때문에 통용될 수 있는 것. 언제든 제시하면 즉시 액면가만큼의 가치와 교환 가능하리라는 믿음. 이 믿음, 프로토콜의 일종일 뿐인 이 믿음이 견고하고 굳건한 시스템으로 자리할 수 있는 자체가 앞서 언급한대로 24시간을 구간으로 나누어 종사하는 여러분 덕이지요.
미래를 당겨 오늘의 부채로 쓸 수 있다는 믿음, 이 신용을 바탕으로 그 부채를 생산하는 주체가 은행입니다. ‘지급준비율’ 바탕으로 말이지요. 이 지준율과 같은 것이야말로 뻥튀기 팝콘 이상의 화수분이나 다름없음을 주제도서로 삼은 『자본주의』에선 언급되어 있습니다. 만일 예금주 모두 일시에 은행에 인출 요구한다면 어찌 될까요(뱅크런bank-run이라고 하죠). 지준율 이상 보유할리 없으니 bankrupt. 네, 은행은 파산. 그런데 보통은 그 반대이지요. 채권자인 자본주는 희소한 데 반해 채무자는 다수이니(개인의 욕망이 무한한 데 반해 자원이 희소해서?! 아닙니다, 아니고요). 은행이 기존 대출을 콜call하면 채무자는 갚지 못하면 파산. 이를 거시로 살피면 금리가 개입되는 것이죠. 인상이면 실상 콜 기능을 하게 되는 것. 기존 금리보다 비싸니 얼른 갚으려 들게 마련. 비근한 예로는 양적완화라 불리는 통화팽창 책策으로 시중에 풀렸던 화폐량이 갚으려드는 만큼 감소하는 상황이겠습니다. 이는 한편 하락했던 통화가치(반면 그만큼 물가는 인플레 국면이었겠죠) 상승을 견인. 원화 가치가 높아지는 만큼 국내 수입 결제 시 지불은 유리하겠지요. 반면 수출은 불리. 한편 원화 자제에 대한 수요공급 변동 있을 수 있겠죠. 이를테면 기존 원달러 대비 환율이 변화하는 것이니. 사실상 기축통화인 달러에 대한 잠재수요를 가정하면, 쥐고 있던 원화를 환율시장에 내어놓고 달러를 사들이려는 변화 예상할 수 있겠죠. 1000원에 1달러이던 게 900원이면 1달러인 상황이니. 원화는 풀리고 달러는 줄고. 외국 투자자 입장에서 금리 인상분만큼 득이 된다 판단하면 외자 도입이 수월해 이를 상쇄할 수도 있겠고. 이런저런 변동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즉시적 반응이 가능한 건 왜일까요? 소위 저 신용을 바탕으로 하는 유동성 때문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유동성이 무엇인가. 이를테면 ‘달’이라는 부동자산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서의 등기권리증으로 만드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랄까요. 왜냐하면 이를 담보로 ← 바로 이 순간!! 이 실세계, 물자체로 존재하는 자산은 마치 물성物性 변화 겪은 양 화폐로 탈바꿈합니다. 비로소 융통融通 가능해지니 이러한 활동 총체를 곧 금융金融이라 일컬을 수 있겠죠. 이것이 21세기에 접어들며 더욱더 활황 중인 연금술의 기본으로 유동流動의 본질이겠습니다. 이 형식 안에서 무수히 파생 거듭하는 금융상품들. 파생상품이란 게 뭐 별게 아니지요. 이런 겁니다. 흐르지 못하는 물성을 탈영토화 시킴과 동시에 지금 흐르는 화폐 곧 돈으로 재영토화시키는 것(금본위제→脫금본위제 역시 같은 맥락). 물론 이를 토대로 하니 교환 속도는 비약적으로 증대될 밖에요. 이로써 소위 세계의 경제는 어쨌거나 발전이란 명목 하 풍요를 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소 간 비약을 무릅쓰고 이르자면, 이러한 비약적 신장 이면에 자리하는 것이 바쁘게 열심히 살아도 빠듯한 여러분의 삶이겠죠? 가난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구속일 수밖에 없는 흙수저의 삶, 옴짝달싹 못해요. 이 판에서 무얼 어쩌겠어요?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_’
그러니 노동력 외 팔게 없는 무산자가 자산을 형성하려면 제 미래를 담보로 하는 자산의 조력이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 대출은 공정한가. 여기서 룰이 중한데, 이게 대마大馬일수록 불사不死이도록 조력하니 문제. 대마를 구성하는 노동력 또한 여러분 가운데 낱낱의 개인이기도 하니, 구조 와해 시 파장 곧 기존 종사자 다수가 입을 피해를 고려하면 회생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돕는 걸 문제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또 구축에 따르는 역량을 평가 비교하는 측면으로 보자면, 회수 불가 내지 담보자산 부실로 인한 손실을 미연에 방지하자니 나름 엄격한 기준으로 심사함이 마치 개인에 엄격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면 그도 일리 있어요. 하지만 IMF 겪으며 다수 국민이 목격한 실상은 그 바람직하다 평가 받은 대마, 곧 규모의 경제를 이미 달성한 곳에서 확보한 막대한 부채야말로 사고의 원흉인 경우 태반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앞서의 ‘덕분’을 담당하던 무명씨 여러분은 고통분담 차원에서 (명예)퇴직, 비정규직 전환 이후 오늘날까지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고. IT벤처를 비롯한 창업 붐에 명퇴 등으로 밀려난 분 가운데 일부 자영업으로 성공한 소수 말고는 딱히. 조상부터 내리사랑의 유산 상속이나 생전 부모세대 증여 내지 그 그늘에 거하며 덕을 보는 형편 아니면 영혼을 끌어 모아도 기본 의식주조차 해결 어려우니 이거야 원;;
이러니 대출 자체가 진입 불가의 막힌 장벽이거나 아니면 뚫기 어려운 병목으로 느껴짐은 당연하잖나 싶습니다. 게다가 고용보장불가가 당연한 분위기에 떠밀려 뭐라도 해보자니 적은 이익[薄利] 추수에도 다매多賣 구조 갖출수록 유리하건만. 소위 규모의 경제 달성, 총생산 혹은 공급 규모만큼 원가부터 비용 절감으로 가격 경쟁력 우위 점한 상태로 시장 공급하는 측을 누가 감히 꿈꿀 수 있을는지. 그러니까 이러한 구조의 시발始發부터 그 바탕인 자본 형성을 돕는 대출 내지 투자가 어렵지요(이러니 한편에서 엔젤 창투니 하는 형식과 클라우드 펀딩이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지만).
그런데 저는 말입니다. 여기서 ‘가난을 벗으려면 그를 얻어서라도~’라며 동일한 궤 곧 기존 자본주의 프레임대로 스스로를 끼워 맞추는 것이 타당한가 아니 필요한가 싶은 겁니다. 그보다 당초 부채로 부양된 경기야말로 속도전 자본주의 풍요의 실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란 가난한 다수는 묶여서 생산하지 않고는 지탱될 수 없는 구조임을 먼저 성찰함이 중하지 않나 싶은 것이죠.
그렇잖아요, 여러분도 나도 어차피 피차 늙음을 맞아들일 밖에 다른 도리 없는 육신. 이 육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모든 요소들, 전부 그 구체성을 실감하는 동시에 낡고 사라집니다. 썩지요. 하면 이리 상각償却 되게 마련인 실물에 대응하여 화폐 역시 감가減價가 이뤄져야 마땅하잖아요. 이러한 데서 비롯한 개념이‘Aging Money' 곧 노후하는 돈일 겁니다. 여러분 피부로 실감 가능한, 유사한 예로는 바로 일정 시한 후 소멸을 전제하며 공급된 지역화폐, 곧 최근 재난지원금이지요.
그런데 썩어질 육신에 젊음을 붙들겠다고 벌이는 그 안티-에이징Anti-Aging처럼 사라지고 썩게 마련인 실물경제에 대응하는 화폐경제, 돈은 오히려 이자interest를 낳습니다. 기묘하지 않습니까? 부자연스럽잖아요. 그런데 이를 마치 자연스러운 양 스스로를 속이며 일구는 인간사라니. 지구가 비명을 지르는 것도 당연하다싶습니다;; 그렇죠? 물론 이자 발생의 기원을 놓고 보면 임차賃借 곧 약속/계약에 의한 것이긴 합니다. 지대地代처럼 얹어 지불, 그래요 합리. 그렇지만 합리적이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우연에 기대어 금수저 태생만 바라는 것 또한 아주 그른 건 아닐 겁니다. 내생이 확실하다면 외려 이생망(이번 生은 亡했음을 줄여 이르는 말) 인정 후 리셋 또한 선택지로 그럴듯해요. 손색없죠. 그렇다면 우선 이제까지 이자의 총량이 사적 소유물(유동/부동자산) 임차에 따른 합리적 대가 지불 총량과 과연 같을까요. 앞서 바람직하다 싶은 대마들이 사고 치고도 불사를 위해 투입되곤 하던 공적자금 등은 어디서 온 걸까요. 어디에 근거하여 조성할 수 있던 것일까요. 다시금 다수의 미래가 차압된 형편과 다를까요? 우선 열쇠부터 꽂고 문만 살짝 열어보자 했는데도 이렇게 깁니다;; 차압된 미래가 뭐 별 건 아니죠. 앞서처럼 24시간을 쪼개어 종사, 매뉴펙처에서 마트 캐셔/배송/콜센터 등으로 다시 플랫폼 종사 등으로 근로 형태는 변화, 하지만 조건은 글쎄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미하엘 엔데 『모모』 아시죠?! 변화라면 그렇게 자기 시간을 되찾으려는 데에 있지 않나 싶어요. 자세히는 다시 기회가 있겠죠? 이런 이야기를 함께 고민하며 계속해서 진전시키면 어떨까 싶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살짝 소개할게요. 그 미하엘 엔데가 ‘모모’의 입을 빌려 정작 무엇을 말하고파 했는지를 남긴 『엔데의 유언』과 이 책 내용 가운데 언급된 실비오 게젤의 『자연스러운 경제질서』 정도?! 제가 알기론 실비오 게젤, 이냥반 저작이 꽤 된다는데요. 가까운 일본에만 번역 열나게 되어 있답니다. 우리나라에선 언제쯤 마주하게 될까요. 극일克日해야 하는데. 쩝.
한편 유동화 거치며 관계의 중심을 차지하는 화폐금융에 밀린 인간은 노동유연화로 또 내면화한 욕구가 추동하는 감정의 거푸집으로 외려 물화物化, 물성에 잠긴 채 다만 움직일[動] 뿐이지 않나 싶어요. 생각이 인간의 뇌에서 ‘젠트리피케이션’ 대상이 된 형국이랄까요. 정말이지‘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의 실상이란 이 인면獸심에서 인면資심으로 시프트한 데 불과하달까요. 이런 와중에 자본의 형편에서 기획되는 기본소득이라면 정말이지 사육 환경 조성에 지나지 않나 싶어 씁쓸하군요.
자본이 재편한 질서에의 편입이 매끄러울수록 영악함은 명민함으로 탈바꿈되는 한편, 편입 기회를 얻지 못한 상태에 처한 명민함은 미욱함으로 평가절하 되게 마련. 명민한 두뇌 예리한 판단만으로는 끊어낼 수 없는 이 세간의 그물. 참 완강하지요. 시간을 단위로 다시 화폐로 계량하는 시스템 구축에 거침도, 지침도 없이 꾸준하기만 한 이 ‘무한육면각체’계. 여기서 흙수저 개인이 저가 자유로이 들고나고 할 출구를 마련한다?! 이계異界[ex machina]에서 신[deus]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하면 모를까 판타지에 불과하죠. 그러나 판타지에로 망명, 유사 체험으로 누리는 데 그치지 않는 인간이라면.. 어쩌면 그 판타지를 이 세계에 구현하려는 인간의 손이야말로 프로메테우스가 전하려던 불의 실체 아니겠습니까? 이 고해苦海의 매트릭스를 탈-코딩하는 주체. 이 또한 술이부작述而不作이어서 사표師表이자 전범典範이라면 붓다와 예수이겠고 행위의 기원은 해탈이자 십자가형 치름으로써 기어코 보인 그야말로 ‘사즉생死卽生’이겠습니다. 이것이 자리이타自利利他 구인救人의 바탕이겠고요.
노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중심이 여러 개 있는 원."
나는 똑바로 고개를 들고 상대의 얼굴을 보았다. (…) 노인은 같은 말을 역시 조용한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중심이 여러 개 있는 원."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당연히 나는 알 수 없었다. 혹시 이 남자가 좀전의 기독교 선교 차량을 몰았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 "원요?" 나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 "중심이 여러 개, 아니, 때로는 무수히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 노인이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런 원을, 자네는 떠올릴 수 있겠나?"
아직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지만 예의상 한번 생각해보았다. 중심이 여러 개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 그런 것을 그려보기란 불가능했다. (…) "그래, 물론이야. 당연하지. 학교에서는 그런 걸 안 가르치니까. 정말로 중요한 건 학교 같은 데서 절대 가르쳐주지 않거든. 자네도 알다시피."
"그런 원이 정말 실제로 있나요?" 내가 물었다.
"있다마다." (…) "알겠나, 자네는 혼자 힘으로 상상해야 돼. 정신 차리고 지혜를 쥐어짜서 떠올려보라고. 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그렇게 진지하게 피나는 노력을 하고서야 비로소 조금씩 그게 어떤 것인지 보이거든."
_무라카미 하루키, 「크림」, 『일인칭 단수』 中
‘중심 여럿’이면서 동시에 ‘둘레를 갖지 않는 원’, 욕망의 처소로 기능하길 그치고 탐/진/치 회로에 폐색인 지경에서 믿음 일으키어[起信] 저부터 일어서는[起身]의 구인[救人]과 동시에 이 기신[起信-起身의 연쇄] 경험이 짓는 여럿. 저마다 스스로 일으켜 세워 이루는 물결. 이 가상의 공동체를 ‘구인회救人會’라 일러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