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굴포,천변풍경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by 사각공간
IMG_20180927_130518.jpg 굴포,천변풍경(여름)
걷기가 추락의 시작이라는 것, 추락의 발단이라는 것. 추락은 촉발되었다가 이내 저지당하고, 다시 시작되다가 또 저지당하고……. 그렇게 무한히 이어진다.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놓는 건 거의 자신을 넘어뜨리다가 균형을 회복하고, 다시 거의 넘어뜨리다가 만회하기를 끊임없이 이어가는 일이다. 변함없이 시도되었다가 중단되는 이 추락을 시작으로 움직임이 생겨난다. 우리는 그걸 직감적으로 안다. 매일 걷지만 우리 중 대부분은 이런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_로제 폴 드루아,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中




IMG_20181105_155210.jpg 굴포,천변풍경(가을)
걷기는 생각하기와 동일한 활동 (…) 진실의 빛을 향한 이 여정은 ‘걷는’ 일이다. 한 발을 다른 발 앞으로 내딛고, 한 생각 뒤에 다른 생각을 내미는 노력이다. (…) 이중의 걷기 (…) 하나는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무지에서 앎으로 가는 걷기다. 다른 하나는 반대로 앎에서 옛 세계로 돌아가는 걷기다. 무지를 일소함으로써 그 세계를 바꾸기 위해, 아는 자는 (…) 제 동료들을 허상과 예속 속에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 상승과 하강의 여행

_같은 책



20201130_152421.jpg 굴포,천변풍경(2020.11월30일)
발로 생각하는 사람들, 땅을 걸으며 동시에 영혼을 걷는 사람들. 이들에게는 성찰하기 위해 움직일 필요가, 생리적인 욕구가 있다. (…) 그렇다. 이것은 분명히 신체기관과 생리학의 문제다. 그렇다. 무거운 몸이 있고, 민첩한 몸이 있다. 그렇다. 그로부터 무거운 생각이, 또는 경쾌한 직관이 나온다. 그렇다. 움직이지 않는 내장에서 분비되는 생각들을 경계하고, 움직이는 근육에서 분출되는 생각들을 선호해야 한다. (…) 몸과 영혼을 구분하는 일을 그만두라는 것. 니체는 내장과 지성이 하나임을 칭송한다. 살아 있는 유기체는 모든 생각의 원천이다. 우리는 소화하듯이 명상하고, 걷듯이 소화한다. 고여서 꼼짝 않고 썩든지, 즐겁게 나아가든지 하는 것이다. 니체는 몸-영혼, 걷기-생각이 하나라는 진리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오직 발로써” 글을 쓴다. (…)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춤꾼은 자기 귀를 발가락에 갖다 댄다.” 다리의 떨림, 걸음의 경쾌함은 속이지 않는 지표들이다. “누구든 걸음걸이를 보면 그가 자기 길을 찾았는지 알 수 있다. 목표에 가까이 다다른 사람은 더 이상 걷는 게 아니라 춤을 춘다.”

_같은 책


물질적인 역사가 인간의 공동 작업과 무관하게 홀로 걷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 걷기는 여러 사람의 노력과 협력이 ‘결합된 힘’에서 비롯되지만 외부에서 모두에게 강요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이 현실은 지각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들이 하는 걸 보지 못한다. “분업이라는 조건으로 일하는 다양한 개인들의 협력에서 생겨나는 열 배로 증대된 생산력은 그들 밖에 자리한 낯선 힘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 힘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한다. 이제 그 힘은 거꾸로 인간의 걷기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일련의 특별한 발전 국면과 단계를 거치면서 사실상 인류의 걸음과 의지를 지휘한다.”

따라서 인류는 잘못된 표상에 갇힌 처지가 되고, 그 표상이 인류를 자기 의사와 반대로 걷게 내몬다. 어떻게 해야 거기서 해방될까? 인류는 자신의 힘을 다시 의식해야 하고, 역사의 걸음을 감내할 것이 아니라 그 걷기가 오직 자기 자신에게 달렸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자 해방은 명백히 걷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단지 역사의 위대한 걷기, 인류와 생산방식의 위대한 걷기가 아니다. 기계적이고 익명이며 비개인적인 걷기가 아니다. 문제는 인류가 걷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필요와 강제된 노동의 지배를 뛰어넘고 인류는 자기 자신을 재창조하며 어디로 갈지 생각해내야 한다. 그리고 세상 걸음의 톱니바퀴에 낀 채 외부에서 조종당하기를 멈추고 홀로 서서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_같은 책




그러고 보니 직립 인간의 이족보행과 사고思考의 변증 구도, 닮았어요. 그렇죠? 1과 0, 이진법을 바탕으로 연산하는 구조 곧 컴퓨터의 등장은 차라리 당연하다 싶을 정도. 전기가 타고 흐르는 도체이기도 또 흐름 막는 부도체이기도 한 반도체처럼 당초 인간이야말로 거칠게 구분하면 진리(이름이 무엇이든 간에)가 자리하는 출세간(통상 하늘에 비한다면)과 탐진치가 자리한 세간(땅에 해당하겠고) 사이의 존재랄 수 있겠어요. 출세간에 비접속인 상태로 세간에 물처럼 고였다 마르거나 아니면 접속 상태로 ‘상승과 하강의 여행’을 거듭하거나. 서점 인근 천변에서 풍경 바라보며 산보하다보면 절로 읽는 동안 머릿속에 어지른 것들이 마치 직소퍼즐마냥 마음 복판에서 착착 끼워 맞춰지니 신기합니다. 재밌어요.


→ 게다가 만상萬象의 총체인 사물事物이 삼라森羅로 엮여 이룬 풍경을 내 사유의 안뜰로 들여 사물私物처럼 여길 수 있다니. 事物이 私物 되는 데엔 필히 화폐를 수반하게 마련인데. 오왕~ 이런 경험이야말로 full-소유를 구가하면서도 실상 어떠한 데에도 걸리는 바 없이 무소유를 실천하는 형편이지 않나 싶어 홀로 뿌듯하기도 합니다. 전 그래서 걷습니다. 함께 걸어요~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퍼질 이 거리를~ 아, 굴포천을~ 우우~ 둘이, 아니 셋이, 아무렴 어때 모두, 걸어요~ 아, 걸어요~~ ♬

'_'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회갈등 잠금해제(로컬+독서공동체 구인회救人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