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시사IN』은 “온라인에서 여성 혐오 담론에 공감하는 이들은 자신이 ‘약자를 짓누르는 쾌감’을 추구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미 여성 상위 시대가 왔는데도, 군 복무와 같은 의무를 남자만 지는 현실’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분노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특히 청년 남성들이 제 삶의 전망을 부정적으로 평가할수록 모험주의와 극단주의의 토양은 비옥해진다. 앞으로도 더 많은 ‘성재기 키즈’를 만날 각오를 해야 할지 모른다.” 이런 불길한 예측을 뒷받침하듯, 한국 사회는 ‘잉여 사회’로 접어들고 있었다. 2013년 9월 『잉여 사회』라는 책을 출간한 최태섭은 잉여 사회를 “수많은 잉여가 아귀다툼을 하고, 그중 몇몇이 이기지만 결국 착취당할 기회를 갖게 되는 종류의 사회”라고 정의했다. 그런 비극적인 잉여 사회는 남녀 모두에게 닥친 재앙이었고 여성에게 더 큰 타격을 주었건만, 가부장적 사회체제하에서 그걸 더 절박하게 느낀 남성들은 여성을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잉여화를 가중시킨 원인으로 이해하게 된다.
_강준만,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중
여성과 남성을 대립시키는 이원적 기계 속에서 포착되고, 형태에 의해 한정되고, 기관과 기능을 갖추고 있고, 주체로 규정된 여성이다. 그런데 여성-되기는 이러한 존재물을 모방하지도 않으며 나아가 그러한 존재물로 변형되지도 않는다. (…) 여성의 모습을 모방하거나 띠는 것이 아니라 운동과 정지의 관계로 또는 미시-여성성의 근방역으로 들어가는 입자들을 방출하는 것, 말하자면 우리 자신 안에서 분자적인 여성을 생산하고 분자적인 여성을 창조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창조가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남성이 여성이 되거나 또는 여성이 될 수 있으려면 그램분자적인 존재물로서의 여성은 여성-되기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성들이 제 나름의 유기체, 제 나름의 역사, 제 나름의 주체성을 쟁취하기 위해서 그램분자적인 정치를 이끌어 가는 것은 불가결한 일이다. 이 경우 “여성인 한에서 우리……”는 언표 행위의 주체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에만 만족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러한 주체는 원천을 고갈시키거나 흐름을 끊지 않고는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여성의 고유한 글쓰기에 관해 질문을 받은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으로서” 쓴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고 대답했다. 오히려 글쓰기는 여성-되기를, 즉 사회적 장 전체를 관통하고 침투하며, 남성들에게 전염시키고, 남성들도 여성-되기에 휘말려 들도록 만들 수 있는 여성성의 원자들을 생산해야만 한다. 매우 부드럽지만 또한 견고하고 끈질기고 환원 불가능하고 길들일 수 없는 입자들을.
_질 들뢰즈, 팰릭스 가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 『천 개의 고원』(새물결) 중 일부 발췌
육신으로 구별되는 성, 당연합니다. 다만 중하다 여기는 바가 그에 국한, 매몰되는 형편이면 진일보 불가이지요. 그러니까 당초 가부장제 그늘에서 신음하는 건 여성만이 아니잖아요. ‘남자다움에 대한 강박이 남자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지 않냐는 것이죠. 이 ‘존재의 불행’을 벗기 위한 몸부림으로써 ‘-되기’의 ‘생성’에 주목하기. stock인 기성의 합合이 아닌 flow ‘영구적 변증’, 본질이라 여기면 ‘갈之’자 행보도 너끈하잖나 싶어요. 그러면 어때서? 그래도 걷기를 포기 않고 꾸준히 걷는다는 게 중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