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이런 '사람'이 있었다.
지금도 어느 곳에서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심지어 '감사하며 섬기'면서도 섬긴다는 의식조차 여읜 채로 행하는, 그러니까 삶과 실천이 따로이지 않은 이가 있을 테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 있을 테지.
걸음 내는 건 소수.
그 방향으로 여럿이 따라 밟아/가니 비로소 길로 닦이는 것.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달라진 것이라면, 그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을 집어삼키는 뻔뻔함의 증식 속도.
말은 태도를 외면하고, 태도는 말을 따돌린다.*
'곧은 소리'를 가리키는 내면의 오른손과 '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 현대를 활보 중인 표리부동. 외유내강을 전도시킨 외강내유의 '겉바속촉'. 자기를 구심으로 하여 펼치는 정저지와의 무수한 동심원. 만상萬象 간間 연대의 삼라森羅를 끊어버리는 아집我執들. 이로써 본래 걸리는 바 없이 나들던 마음이 고이게 된 것. 눈길, 손길, 발길. 마음 닿는 사방/육방/팔방으로 눈/손/발은 길을 내고 그리로 건너다니니 다만 마음일 뿐이건만. 이를 죄다, 오롯하다 착각하는(실은 욕망의 거처로 기능할 뿐인) 자기를 중심으로 뒤바꾼 것. 유동流動이 본질인 마음은 가두고, 부동자산 유동화에만 혈안(금융金融의 의미를 곱씹을 일), 금권金權의 하이패스 길 닦는 데에만 전심전력. 유리될 수 없다 여기던 '인간'과 '노동력'을, 기어코 분리해낸 인류. 인격을 대신하는 가격도 나름 파격인지 모르겠다만 '유연화'된 '노동'이 유동하는 건 돌이키기 힘든 현실.
삼라의 단절을 경험한 인류, 결여된 소속에서 이는 불안이 끊임없이 자본에로의 재영토화를 부추기는 형편. 아쉬운 건 개성個性/고유성을 주장하는 그 낱낱이야말로 실은 거푸집으로 어차피於此彼 피차彼此 일체一切 번들 bundle에 지나지 않건만, 불성佛性으로 이미 일체 一體 임은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그 외면外面/외양外樣 꾸밈에 골몰하며 서로가 서로를 거듭하여 외면外面한다.
제 중심, 거두어야[滅] 회복되는 길[道]. 사통팔달 행로를 틀어막은 건 다름 아닌 자아自我이다. 내내 괴로움[苦] 고일[集] 뿐인 건 당연하잖나. 결국 이 고해苦海의 매트릭스를 코딩 coding 중인 건 다름 아닌 자기 자신.
1인용으로 분양된 '자기 소외'가 내면에 자리하면서부터 삶은 이미 전장. '시작은 미약했으나' 쉼 없이 '창대해'지는 '자기 소외'. 부富를 전제한 행복이니 희망이니 따위의 유토피아를 기웃대며 좌고우면 연속인 이 각자도생의 격전지.
이따금 출현하니 다름 아닌 바로 그 '사람'. 정말이지 [in] visible이자 [人] visible.
다시 새기지 않을 기억은 의미 없다. '잊지 않겠다' 이르는 바[名]의 실체實體는 책임. 책임을 여읜 채 잊지 않겠노라 말, 거듭한들 그야말로 유명무실. 계속해서 출현하는 '사람'은 어쩌면, '못 다 굴린 덩이를' 다만 굴릴 뿐일지도. 만일 이 '사람'이 저마다의 속에서 소환되어 동시에 다발로 출현하면 힘겨움은 덜겠지만. 과연.
*한편 외면을 주도한 말은 따돌림을 앞장선 태도와 짝하고, 그로써 소외된 태도와 말이 서로 짝한다. 기묘하다면 기묘한 구도의 대립. 이것이 추동하는 변증.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인간이 이루는 역사. 어째 참 초라하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