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가 갖는 의미

죽음과 고통의 종교심리학

by 네모

종교학 수업에서 읽고 배운 내용을 작성해봅니다.


David K Switzer의 책 <모든 상실에 대한 치유, 애도> 책을 읽었다. 이 책은 크게 7개의 파트로 나뉘어져있는데 애도의 역설, 애도의 개념, 불안과 자아의 대인관계적 특성, 애도에서의 분리 불안, 죄의식 적개심과 애도, 애도에서의 존재론적 불안, 그리고 마지막으로 애도의 치유로 나뉘어져있다.

이 책에서는 많은 학자들과 심리학에서도 금기로 여겨지는 ‘죽음’ 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서 애도에 대해서 명확히 분석되지 않았다는 역설에 대해 다룬다. 또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통해 공통적으로 애도에 대해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 객관적인 시선을 함양하고자 하였다는 점을 밝힌다. 애도는 타인을 투사하여 만들어진 자기 자신의 소멸에 대한 불안으로 정의할 수 있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말처럼, 자아의 확립은 타인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언어를 통해서 사회화되었다. 결국 타인에게 내가 부과했던 의미, 또는 상호작용의 상실로 인해 자기의 자아의 소멸에 대한 공포와 좌절, 무력감이 애도인 것이다. 흥미로웠던 점은 애도를 대부분의 학자들이 ‘불안’이라고 정의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애도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죄의식과 적개심 등은 모두 불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적개심이 나를 향하면 우울증으로도 발전 가능성이 있으며 상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양가적일수록 더욱 복잡한 애도가 나타난다.

애도를 바라보는 흥미로운 관점 중 하나는, 애도가 결국 모든 것은 무(無)라는 점을 일깨워 불안하다는 관점이었다.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간단하지만 어려운 진실을 타인의 죽음을 통해 일깨움 받기 때문에, 애도는 타인과 분리된다는 불안과 함께 결국 모든 것은 죽는다는 허무함을 안겨주기에 불안하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비껴갈 수 없는 사실의 망각에서 깨어난 상태가 애도의 불안인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이 말하는 것은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기에 애도 또한 피해갈 수 없다는 점이다. 모든 애도는 치유의 과정이기에 이 책을 통해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접하며 애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다.

<모든 상실에 대한 치유, 애도>를 읽으면서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침묵은, 개인을 사회로부터 단절시키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개인의 고독은 더 심해진다”였다. 인간의 자아는 대인관계를 통해서 생성되고 유지된다. 타인과의 역동적인 관계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격리된 개체에 대한 바람은 자기모순이라고도 언급된다. 사실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상이 내게는 가장 바람직한 사람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 책의 내용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타인의 온정과 도움을 바라는 것은 약한 일이고 나에게 직면한 문제들을 혼자서 해결해나가는 사람이 가장 강하고 인격적으로 성장한 사람이라는 환상이 있었다. 일상에서 내게 닥친 힘든 일을 이해 받지 못하는 경험의 반복으로 인해 이런 공상적인 이상을 쫒았을 수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인이 필요하다는 이 책의 내용을 통해 내 생각이 산산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애도를 자기 자신의 소멸에 대한 불안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가장 외로웠던 시기는 나의 아픔을, 나의 본질적인 자아를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했을 때이다. 정확히 말하면 상담이 끝났던 시기이기도 했다. 상담이 끝날 당시 내가 작성했던 일기는 대략 이런 류의 내용이었다.


“외롭다고 표현하는 것은 참으로 단면적인 표현이에요. 단어는 상황을 담지 못합니다. 그저 읽는 사람이 짐작할 뿐이죠. 저는 고독했어요. 태풍 속 홀로 바람을 맞이하는 나무처럼 시리고 시려서 동상이 걸려버렸어요. 누군가가 저를 찾아오는 느낌이 너무 아파서 긁어내도 없어지지 않는 간지러움에 혼자 있겠다고 미련스럽게 버텼답니다. 내던져진 기분이다. 내게 피난처가 있었는데. 000이라는 피난처가 있었는데. 나의 고난과 슬픔을 반짝반짝한 눈으로 바라봐주는 그런 선생님이 계셨는데. 주저리 내 말을 하는 그 시간이면 조금은 영화를 찍는 것 같았는데. 내게 조금의 현실이었다는 뜻이다. 붕 떠서 살아가는 모든 시간 중에 고루하지 않은 현실은 그 시간뿐이었는데. 이제는 처절한 싸움을 해야지. 그 사람의 죽은 문장들을 붙잡고 말이다.”


책의 6번째 파트 ‘애도에서의 존재론적 불안’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필수적이며, 죽음은 우리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한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 인생에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필연적 무(無) 앞에서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생각할 수 있다. 타인의 죽음을 목도하는 일은 죽음을 깨우쳐준다는 의미를 갖기도 하는 것이다. 죽음은 현대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소재 중 하나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라는 것도 내게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아이디어처럼 느껴졌다.

‘죽음과 고통의 종교심리학’ 수업에서 들었던 문장 중 가장 좋아하는 문장은 ‘메멘토 모리’이다. 라틴어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이 문장은 내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길을 잃을 때마다 꺼내보는 문장이 되어버렸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새내기 시절까지 우울증과 자기혐오, 무기력증 등으로 힘들어했었다. 상담을 받으며 내안에 어떤 억제와 회피 작용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깨달으며 좋아지기도 했지만, 다시 정상적인 삶의 궤도 안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한 번 죽었다고 생각하며 매번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며 살아갔던 기억이 있다. 사람은 언젠간 죽는다는 것이 나에겐 큰 위안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애도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어 인상 깊다. 언어로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표현해야한다는 점도, 애도는 결국 인간이 혼자 살지 못하기 때문에 이루어진다는 점도 좋다. 그런 의미에서 애도와 죽음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은, 인간에 대해서 처절하게 배운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자연스럽게 예전에 읽은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가 생각이 났다. <애도 일기>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밤부터 (1977.10.26.) 작가가 작성한 일기를 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어머니가 사라졌다는 것, 더 이상 같은 공간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하는 단계에서 변덕스러운 슬픔의 단계를 지나 애도를 하는 과정의 문장들을 볼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간접적으로나마 죽음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는데, <모든 상실에 대한 치유, 애도>에서 묘사하고 있는 애도의 과정과 심리가 <애도 일기>에 정확히 나와 인상 깊었다. 애도의 슬픔은 내가 일상적으로 마주했던 슬픔과는 조금 더 근원적인 슬픔의 감정이다.

<모든 상실에 대한 치유, 애도>에서 애도 과정에서는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는 무기력과 우울증과 비슷한 감정이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롤랑 바르트는 그 과정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다른 사람들, 그들이 보여주는 생의 의지, 그들의 세계를 나는 견뎌낼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리 있어야 한다는, 숨어 지내야 한다는 결심이 자꾸만 강해진다.(애도 일기, 56)” 죽음의 목전의 있는 사람은 생의 영역의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공간에 서 있는 것이다. 다른 교차로에 서 있는 것이다. 애도하고 있는 사람은 일시적으로 삶을 감당하지 못한다. “나의 세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세계. 그 안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울림을 낳지 못한다 – 그 어떤 것도 형상을 갖지 못한다.(애도일기,98)” 애도하는 사람은 무의 세계, 아니 너무나 많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무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이 두 책에서는 공통적으로 애도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폴랑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이런 애도(지금 내가 겪고 있는 애도)의 슬픔은 래디컬하게 그러니까 새로운 방식으로 죽음을 길들이는 일이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의식이 예전에는 그저 남에게 빌려온 (졸렬한, 다른 사람들에게서, 철학에서 얻어낸) 것이었다면, 지금 그것은 나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고통스러운 건 죽음의 의식 때문이 아니다. 그건 나의 애도 때문이다.(애도일기, 101)” 애도를 하는 것은 자신의 죽음에 익숙해지는 과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애도는, 나의 죽음을 생각하면 나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하나? 나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죽음과 애도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삶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같은 문장이기 때문이다. 책에 나온 것처럼 불안은 우리 삶을 구석구석 탐색하며 원동력을 준다는 말처럼 애도의 불안은 역설적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생명은 단지 물리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람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단지 물리적으로 살아있는 것이 생명이 아닌 것이다. 독자적인 인간으로 적극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 생각해봐야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너는 나의 생명”이라는 낭만적인 말은 “너는 나를 살게 해”라는 말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시는 수녀님들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죽음은 삶을 비추는 거울(죽음 앞에 서보면 내 인생을 비추어볼 수 있음). 내 인생에서 어떤 것을 원하는지, 결국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진실을 알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유로운 마음으로 가볍게 즐기면서 마지막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 내게는 깊은 울림을 주었다. 이 말을 듣고 난 후 삶은 아름다움의 문제로 내게 생각되었다. 플라톤은 아름다움을 ‘절대미’로 정의했다. 구체적인 사물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움이 각기 다르더라도 이러한 속성의 근원이 되는 절대미가 존재하며, 개념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에게 아름다움은 올바름과 정의 같은 이데아적 형상이기에 지각을 발달시킴으로 향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죽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 사랑, 믿음, 화해, 온정과 같은 문제들로 말이다. 나는 이런 말들 없이는 살아갈 수 없구나. 친절함으로 살아가는 게, 어리석더라도 내게 필요했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의 요약본에는 아름다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는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 바다조각이 바다로 들어가는 것. 이것만큼 간단한 일이다. 왜 어두운 바다에서 맞는 죽음은 차갑고 아픈 아름다움같이 느껴질까. 아름다우면서 처절하게 고독하다. 그럼에도 바다 끝을 걸어가보고 싶은 그 마음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내 마음이 어두움을 닮았나보다. 삶이 아름다운 것이면 죽음 또한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고민을 했던 적도 있었다. ‘죽음과 고통의 종교심리학’에서 ‘원하는 죽음을 가지려면 원하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말과 동일한 뜻한 것 같다. 아름다운 죽음을 원한다면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하고, 결국 내 죽음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한용운의 <고적한 밤>이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주는 죽음인가요. 인생은 눈물인가요. 인생이 눈물이면 죽음은 사랑인가요.” 결국 우리의 인생과 죽음을 떼어놓기엔 불가능하다는 말로 내게는 해석되었다.

어떻게 살아야할까라는 고민이 들 때 생각나는 문장이 하나 있다. 장욱진의 인생 모토인 ‘나는 심플하다’이다. ‘덜어내야 하는 것을 덜어내고, 채워야하는 것들로 삶을 채우는 것이 그의 철학이지 않았을까’ 하고 저 짧은 문장을 계속 생각하게 된다. 내게 중요한 것들만 남겨놓아야지. 아름다운 사람들과 아름다운 시간들, 정말 중요한 무언가에 기여하는 모든 것들만을 남겨놓아야지. 사실 내게 모든 것들(성공, 명예, 학위 등)이 필요하지 않는다. 내 삶에서 덜어낼 것, 채울 것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책을 읽는 것은 끊임없이 나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고, 인간이기에 이런 글이 써지는 거라고, 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행위이다. <모든 상실에 대한 치유, 애도>도 내가 인간이기에 상실에 아픔을 느끼고, 외로움을 느낀다는 점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삶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된다.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나의 애도에 대한 치유이자 나의 결론이다.


작가의 이전글죽음의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