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족이 되어줘_ep.1

시리즈 : 우리가 가족이 될 수 있을까?

by 네모

독립을 했다. 22살의 일이다. 경제적인 독립을 하기까지 긴 시간, 그리고 정서적 독립을 하기까지는 더욱 오랜 시간이 걸렸다. 독립을 하고 1년이 지난 후에야, 혼자의 감각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아늑한 자취방에서 깨는 아침과 잠드는 밤은 혼자여서, 고독해서 외롭지 않았다. 모순적이지만 말이다.


더 모순적이게도 독립을 했는데, 내가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처음 가족에게서 떨어진 나에게 방임은 방치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독립을 하면 가족으로 비롯된 모든 상처들이 다 나아질 거란 나의 치기어린 오만도 한 몫 했다.


절실히 가족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이야기가 어디에도 붙지 못하고 깊이깊이 가라앉아 세상에서 소멸당할 것만 같았다. 어디 기댈 곳이 없는 처지는 취약함을 극도로 무섭게 만든다. 혼자 아픈 것, 혼자 우는 것 같은 일. 혼자 행복해 하는 일 또한. 가족에서 벗어난 안전한 관계를 맺고 싶었고, 내가 선택한 공동체에 들어가고 싶었다. 또 다른 가족이 필요했다. 그런데...어디서 찾지?


엉엉 운다.

어디서.


감정이 넘쳐버린 사람은 이성에 매달리곤 한다. 주지화가 모든 일들을 바로잡아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쌓인 기록들을 찾아본다.


사전에 따르면 가족은 일단 친족의 단위이다. 혈연으로 맺어지거나, 사회적으로 계약을 맺는다. 서로의 가족이 되겠다고, 서로의 보호자가 되겠다는 것. 그렇다면 원가족은 하나도 사랑스럽지 않은 계약적인 관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순수하게 의지만으로 유지되는 관계가 더 소중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 이미 태어났더니 가족이 되어있는 혈연이 아니라면, 가족은 순전히 의지와 필요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다.


서로의 의지와 필요만 있다면 우리는 가족이 될 수 있다. 브루클린 99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어른의 장점 중 하나는, 가족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사실 그렇게 믿고 싶다. 나의 가족이 되어줘, 하면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마법처럼 다가온다.


그렇다면 그저 친한 관계와 가족은 무엇이 다를까? 가족은 서로를 양육하는 존재다. 양육이 끝난 성인에게도 양육과 재양육은 필요하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키워가는 과정에서, 결핍을 돌보거나 돌봄 당하는 것이 ‘유사 가족’의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유사 가족은 서로를 책임지고, 양육하는 공동체이다. 감정적이든, 재정적이든.


유사 가족에겐 ‘사랑’ 또한 필요하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사랑에 대한 j.piper의 정의를 가져와보자. ‘나는 당신이 있는 것이 참 좋습니다’ 즉, 새로운 가족은 서로의 양육의 필요를 채워주고, 함께하는 게 참 좋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서로를 충분히 알아야하나?’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가족 같은 사람들은 영영 타인일 수밖에 없다. 다만 같이 있을 때 나 같을 수 있고, 이해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만을 알 뿐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나의 전체를 이해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 예측 가능한 세상이 되는 것이면 충분하다.


내 가족이 되어줘, 라는 말은 낭만적이지 않다. 순수하게 계산적이고, 그래서 아름다운 행위다. 누군가의 가족이 된다는 일은 계약적이고 계산적이어서 아름다운 행위다. 서로가 서로의 결핍과 필요를 양육해주자는 암묵적인 약속이 유사 가족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이유는 사실 구인 모집이다. [가족 절찬리 모집중], 이 문구를 풀어 쓴 것이다. 내 예측 가능한 세상이 되어줘! 내 결핍을 채워줘!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아파하자! 나의 가족이 되어줘!







친한 친구가 옆 동으로 이사를 온다. 내 23살의 인생에서 그거면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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