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글자로 환원될 수 없는 우리를 위해서.
언젠가 계속되는 실패에 지쳤을 때 만들어낸 나의 명제이다. 나는 꽤 정답에 집착하는 편이다. 올바른 행동, 알맞은 표정, 적절한 지식, 뭐 그런 것들. 그러나 첫 시도엔 애석하게도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은 정답보단 오류에 가깝다. 그래서 세운 나의 명제. 첫 시도는 오류일 수밖에 없다. 이 명제가 항상 참이라면, 사실 우리의 모든 실수와 처음은 정답이 아닐까?
살면서 꽤 많은 오류를 만들었다. 타자화에 대해 고민하며 무심코 뱉는 혐오적인 말들, 누군가를 배려한답시고 무심코 상처를 주는 행동까지.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가장 중요한 건 ‘앞으로’의 문제다. 첫 시도가 오류인 것은 어쩔 수 없고, 나는 언제나 실수할 것이고, 그건 필연적인 문제다. 하지만 그 오류에 부끄러워하고 머무르지만 말자고 생각을 한다. 나의 오류에 누군가가 상처를 받았다면 사과하고,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그 오류를 어떻게 고쳐 나갈지이지, 오류 그 자체가 아니니까. 그럼, 그 앞으로의 문제가 남아있다.
누구나 자기를 일정 부분 혐오한다. 화가 장욱진의 말처럼 사람은 자기 자신의 저항 속에서 살며 이 저항이야말로 자기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일은 가끔 당황스러울 정도로 버겁다. 내 저항은 다른 사람보다 더 강렬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가끔 우리의 비극은 선택의 결과고, 그 결과는 결코 선택이 아니기에. 그래서 그 불행의 구더기에 한껏 앉아서, 오래오래 머무르겠다는 그런 마음들이 존재한다. 영화 <더 웨일>의 주인공 찰리처럼 말이다. 그는 자기의 잘못과 그로 인해 망가진 자기 자신에게서 끝까지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만든 수많은 오류들이 너무나 커다래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나기도 싫은 마음이 너무 공감이 간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의 비극에서 멀리 도망쳐 나올 힘이 필요하다. 이것 또한 ‘앞으로’의 문제이다.
나는 스스로 한 경험에서 쌓은 자신감, 내가 잘못해도 다시 고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오는 자신감이 자기연민과 자기혐오에서부터 달아날 수 있는 다리가 되어주리라 믿는다. 이는 내가 변화할 수 있는 사람임을 믿는다는 문장과 동일하다. 그러니 나의 잘못을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은 역시나 변화에서 나온다. 그래서 종종 탈피하는 파충류처럼 산산이 부서진 후 다시 더 튼튼한 가치관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본질은 끝나지 않은 질문이기에,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계속적으로 답하는 답변이기에 완전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성되지 않은(unfinished person)으로 살아가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 내가 계속해서 변화하고 흐를 수 있는 가장 쉬운 도구가 공부라고. 지식은 새로운 것을 가장 쉽게 조우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만날 때 가장 나다워진다. 원래 존재했던, 나의 어쩌면 취약하고, 때론 강인한 새로운 면이 노출된다고나 할까. 그러니 우리는 완성되지 않은 사람이기에, 변화해야지 제대로 된 나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성실하게 변화해야 한다. 자연의 바람에 따라서.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고정된 자세로 수십 년을 지내지 말자는 다짐을 한다.
노인과 바다처럼.“나는 그 아이한테 내가 별난 늙은이라고 말했지. 지금이야말로 그 말을 입증해 보일 때야.” 그가 말했다. 지금까지 그는 그런 입증을 수천 번이나 해 보였지만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지금 또다시 그것을 입증해 보이려고 하고 있었다. 매 순간이 새로운 순간이었고, 그것을 입증할 때 그는 과거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헤밍웨이, E. (1952). 노인과 바다 중)
자신을 입증하려고 노력하는 그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 인간답기 때문에. 도돌이표이다. 그냥 그렇게 매 순간 새로운 나를 입증하려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