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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오름 Oct 02. 2024

나는 왜 양보만 해야 돼

착한아이 컴플렉스와 K-장녀 강박증 그 사이


“네가 누나니까 이해해. 알았지?”

“네가 제일 나이가 많잖아. 그러니까 동생들한테 양보하자.“

“너는 얘네보다 크니까 이 친구들 먼저하고 그 다음에 네가 하자.”

“너는 선생님이 다른 거 줄게, 그러니까 이 장난감은 친구 가지고 놀게 주고 우리는 다른 거 갖고 놀자.”

“친구가 이걸 너무 하고 싶다는데(갖고 싶다는데) 친구 위해서 우리 oo가 양보할 수 있을까?”

“엄마 아빠가 없으면 oo 네가 부모님 역할을 해야해. 그러니까 oo가 모범을 보여야 돼.”

“네가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동생들이 보고 배우지(친구들이 보고 배우지)”



어릴 때 심심찮게 들어왔던 이야기다.

지금이야 머리가 컸고 내면이 조금은 성장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려려니하고 이해하고 넘어갈 일이지만 어린 날의 나는 저 말을 전부 이해하기엔  마음이버거웠던 것 같다. 가끔씩 부모에게서 저 말을 들을 때도, 학원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선생님께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서운함과 서러움이 밀려왔던 것도 같다.

처음에야 ‘아, 그렇구나.’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하는 줄로 알았다.

나보다 남에게 양보하는게 먼저인줄로만 알았다.

그렇구나 이해하고 넘어갔던 것들이 어느순간부터인가 내 안에 강박으로, 스트레스로 다가왔던 것 같다.


나보다 어린 네 다섯살 아이들을 위해서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양보하고 흙놀이를 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던 일곱살의 나.

내가 먹고 싶은 고구마맛 과자 대신에 어린 동생이 먹기 싫다는 양파맛 과자를 집어들었던 나.

나는 흰쌀밥이 더 좋은데 콩밥이 좋다는 동생 때문에 시골집에 갈때면 늘 밥솥 안을 채우고 있던 까만 콩밥을 먹었던 나.

나도 미미인형 좋아하는데 옆에 우는 친구에게 양보하고 자동차 블럭을 가지고 놀았던 나.

학예회에서 분홍색 예쁜 원피스를 입고 싶었는데 공주 역할 아니면 안 하겠다고 떼쓰는 친구와 못이기는척 강아지 역할 가면을 맞바꿨던 나.


어쩌면 나는 착한아이 컴플렉스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컴플렉스는 내가 고등학교, 대학교를 가서도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사회초년생으로 직장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놀이공원에 가고 싶었던 어느 날, 나는 그렇게 누군가가 가보고 싶다던 동물원에 가야 했고

치킨을 정말 먹고 싶었던 어느 날의 저녁에는 생선구이를 먹어야 하기도 했고

곰인형을 가지고 놀고 싶었던 어린 날의 나는 학원 책상 구석에 앉아 동화책을 읽어야 했으며

엄마의 손을 잡고 걷고 싶었던 나는, 엄마에게 안겨있는 어린 동생이 부럽지만 씩씩하게 혼자 걸어야 했고

아빠에게 업히고 싶었던 나는 이미 잠든 동생을 업고 걷는 아빠의 등을 쳐다보며 뛰어야 했다.


사랑받지 못했고 관심받지 못했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어쩌면 조금 더 내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동생보다 나는 부모님께 더 많은 관심을 받았을 수도 있다.

내가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걸 알고있는데도 아주 가끔은 어린 날의 그런 기억들이 나를 순식간에 덮쳐 사방이 막힌 벽으로 일곱살의 나를 몰아넣는 기분이 든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걸 아는데도 그렇다.

분명 어떠한 의도가 있어서 그랬다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서운하고 서러운 건 어쩔수가 없다.

내 마음 안에 아직도 여섯 살, 일곱 살의 내가 살고 있어 그런걸까.

똑같은 학교 교실 안에서, 같은 나이의 친구들 사이에서, 똑같이 입사한 직장에서도 바뀌는 건 별로 없었다.

나는 대부분의 역할을 챙김받는쪽이 아닌 누군가를 챙기는 입장에서 살아왔다.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말하고 가져가기 전에 혹시 누군가가 이걸 가져가지 않을까, 나보다 더 원하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닐까 눈치를 봤다.

만약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나는 내가 하고싶은 일이든, 먹고싶은 음식이든 다른 누군가에게 양보했을테니까.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았으니까.



길을 걷다 어린 날의 내가 떠오르는 날이면,

가끔 나와 비슷한 친구들을 보게 되면

속에서 올라오는 울컥한 감정을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숙여본다. 괜찮아, 괜찮아.

치킨도 맛있어. 미미인형 아니어도 자동차 장난감도 멋지잖아.

미끄럼틀 내일 타면 되지 뭐.

혼자 동화책 읽는 거 말고 나도 선생님이랑 인형놀이 하고 싶은데.

아니야 그래도 괜찮아. 이것도 재밌어.

어린 날의 나를 위로하며 이제는 다 커버린 성인의 신발 코끝으로 모래바닥에 내 이름을 슥슥 문질러 새겨본다.

그러다보면 일곱 살의 내가, 여섯 살의 내가, 더 어린 날의 내가 가슴에서 자라난다.


모래 바닥이 깔려있는 놀이터. 그리고 그 안에 가장 큰 미끄럼틀에서 오르고 내려오기를 반복하는 친구들.

소꿉놀이 장난감을 바구니에 잔뜩 가지고 와 흙을 퍼담으며 놀던 친구들.

그네에 앉아 깔깔거리며 웃던 어린 아이들과 그런 딸, 아들, 친구들의 등을 밀어주던 키가 큰 어른들

시소를 타고 있던 같은 반 친구와 나보다 두살이 어렸던 내 동생


내가 하고 싶은 놀이, 그리고 내가 타고 싶던 기구는 자리가 없었다.

그러면 나는 이 놀이터 안에서 뭘하고 놀까? 우리 뭐하고 놀래? 나에게 물어본다.


그렇게 나 혼자 놀이터를 훑어보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아 외로운 철봉으로 가본다.

키가 다른 철 봉 세개.

첫번 째 칸은 너무 낮고, 세 번 째 칸은 너무 높아 중간 키를 가진 철봉 앞에 서 본다.

손을 머리 위로 만세하고 뻗으면 내 손에 잡히던 차가운 철봉. 그 철봉을 꽉 쥐어본다.

조심스럽게 두 발을 모래바닥에서 떼보기도 하고 점프를 해보기도 한다.

언제쯤 세번째 칸, 제일 높은 철봉에 내 손이 닿을 수 있을까.

나는 언제쯤이면 키가 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들이 몰려왔다.

저 멀리 부모님과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oo야, 친구들도 철봉놀이가 하고 싶대. 이제 그만 oo가 양보해주자.”

그러면 나는 아무말 하지 않고 손에 쥐고 있던 철봉을 놓고는 뚜벅뚜벅 걸었다.

이제 그럼 나도 미끄럼틀 타고 놀 수 있겠다. 시소도 타야지. 그리고 또 뭐하고 놀지?

그렇지만 아까까지 친구들로 붐비던 미끄럼틀과 시소, 그네를 쳐다봐도 이제는 아무도 없다.

다들 철봉 근처에서, 각자 다른 키를 가지고 이리저리 점프하고 만세를 부르며 새로운 놀이를 시작했다.

나는 갑자기 흥미를 잃었다.

지금이 아니라 아까 하고 싶었는데. 아까 놀고 싶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기분이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친구들이 신나게 소꿉놀이를 하던 모래바닥이 아닌 오래되어 페인트칠이 벗겨진 나무 벤치로 가서 앉아본다.


그제야 철봉 놀이를 하다 다치지는 않을까 동생을 쳐다보고 있던 엄마가 나를 돌아본다.

왜 더 놀지 않냐고 묻는다.

이제 노는게 재미가 없냐며 다 논 거냐며 이만 놀이터에서 나갈까 묻는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있잖아.


“엄마. 나는 왜 맨날 양보만 해야 돼?”


그 날의 내 모습은 내가 기억하는 게 아니다.

엄마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그 날 집으로 돌아가 엄마는 잠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하다고 했다.

나도 아직 어린 애라는 걸 까먹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걸 깨닫자마자 나에게 미안했다고 했다.

엄마도 서툴러서 몰랐다고 했다.

오죽하면 애가 마음 속에 쌓아놨다가 이런 말을 했을까 싶어 눈물을 훔쳤다고 했다.

사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그 때 엄마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한다.

엄마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평생을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문득

몇년 전에 엄마가 해줬던 그 말이 떠올랐다.


혹시 내가 나에게 그러고 있지는 않은가.

양보하라고.

내 순서가 아니라고.

너는 늦게 가도 괜찮다고, 다른 걸 해도 괜찮다고 내가 나를 막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도 내 안의 어린 아이는 흙놀이가 아닌 미끄럼틀을 타고 놀고 싶어 하는데

나는 아직도 나에게 그런 건 남들이 하는 거야, 나는 미미인형이 아닌 동화책을 읽어야해. 그렇게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제는 키가 큰 어른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두번 째 철봉 칸에서만 손을 뻗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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