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14. 토
둘째 날은 올레길 15-B코스를 걸었다. 한림항에서 시작해서 애월까지 이어지는 해안로이다. 주로 차로만 다녔던 길인데 이번에 걸으며 둘러보았더니 나만 아는 제주의 비밀이 생긴 것 같다. 바닷가에 도착하니까 제주도에 있는 게 느껴졌다. 제주도를 연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한림항에서 애월까지 해안도로 풍경이다. 차로 해안로를 지나칠 때는 차의 속도에 시선이 맞춰진다. 바다도 건물도 파도도 휙휙 지나간다. 차창으로 부는 바람을 보고 바람의 세기를 짐작할 뿐이다.
걸으면서 보는 길은 전혀 다르다. 차가 다니지 못하는 길을 두 발로 걸으면 시선은 두 발의 속도를 따라간다. 아니 두 발보다 시선은 더 느리고 정교하다. 발걸음을 내딛기 전에 시선은 멀리 갔다가 가까이 온다. 시선은 마음대로 가고 싶은 곳에 머문다.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고개를 돌려 해안가를 따라 있는 집들을 구경하고, 바닷가에 자리잡은 카페를 지났다. 바닷가라 바람이 옷자락에 세게 부딪치고 옷을 잡아당겼지만 햇볕은 포근했다. 옷깃을 여미게 하는 바람이 아니라 옷깃을 풀게하는 바람과 동행했다.
장기간 매일 걷는 사람들은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프랑스 시인 랭보는 '바람구두'라는 유명한 별명이 있다. 유럽 대륙을 몇 번이나 걷고 또 걸었다고 한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걷지 않으면 못 견디는 충동으로 내몰았을까. 걷기에는 중독성이 있다는 건 알려진 바이다. 걸으면 도파민, 세로토닌 등의 신경물질이 나온다. 일명 기분을 좋게 하는 신경물질이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걷기에 중독되어 걷기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해가 뉘엿해질 무렵에 애월 카페촌에 도착. 카페 봄날, 지디 카페라는 곳이 있는 곳.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차로 다니면 얼마나 시선이 제한되어 있는지... 걸으면 시작 지점과 끝만이 있다. 특정한 목적지를 딱히 설정하지 않는다. 두 다리가 아프면 바닷가에 널린 정자에 앉아서 쉬었다 다시 걷는다. 목이 마르거나 카페인이 필요하면 끌리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잠시 목을 축인다. 반면에 차로 다니면 네비에 '목적지' 설정은 필수이다. 내 좌표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네비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경로를 이탈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네비 탓에 늘 가던 길이 아닌 길로 가기 힘들다. 네비는 누구나 갔던 길, 편안한 길로 이끈다.
두 다리를 이용하면 경로 이탈은 필수이다. 걷다 보면 막다른 길을 종종 만난다. 네비에 안 나오는 길도 발견한다. 길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기 위해 낯선 곳을 저벅저벅 들어간다. 길이 없으면 되돌아 나오면 되니까. 최종 목적지는 어느 순간 잊고 과정을 즐기게 된다. 예상치 못한 가게도 만나고 예상치 못한 풍경도 만난다. 마을 풍경은 자연과 더불어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식당도 카페도 집도 바닷가에 어우러져 있다. 걷다가 밥도 맛있어 보이는 곳에서 먹고, 차도 마시고 싶은 곳에서 마신다. 걷기 여행은 계획을 잊고 즉흥성을 극대화하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즐기는 법을 가르쳐준다. 걷기 여행은 목적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목적지에 이르는 길에서 보고 겪은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