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체왓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제주도

2020. 11. 15. 일

by 김남금

'머체왓'숲길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머체는 돌이 엉기성기 쌓이고 잡목이 우거진 곳, 왓은 밭이라는 제주도 말이다. 즉 돌밭 숲길이라는 뜻이다. 돌밭 옆에 울창한 편백나무, 삼나무 숲이 있다.


이게 바로 머체왓이다. 용암이 흘러내린 흔적이라고 한다. 화산의 위력을 느낄 수 있어서 무시무시했다. 날씨도 흐려서 회색빛의 무정형 모습은 많은 상상력을 자극했다. 우리는 숲길부터 보고 머체왓 전망대를 찾았다. 머체왓 전망대는 이 전경을 찍은 다리 위였다. 알고 나니 전망대를 수긍할 수 있었지만 전망대를 찾고 찾아서 전망대가 없다고 투덜거렸다. 우리는 전망대라는 기호에 지붕이 있고, 적어도 나무데크가 깔린 이미지를 부여한다. 머체왓 전망대는 이런 우리의 고정관념을 비웃었다. 전경이 다 보이는 그곳이 바로 전망대라고 환기시켜주었다.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기호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훈련되어 왔다. 그래서 기존의 기호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점을 발견하면 당황하고 낯설어한다.


여행은 필연적으로 당황과 낯섦을 가져다준다. 짧은 여행을 통해 고정된 틀 밖을 잠시라도 벗어나서 다른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깨닫는 것은 훌륭한 삶의 자산이다.



머체왓숲길 입구에 메밀밭이 펼쳐져 있다. 메밀밭이 노랗게 익어있는(?) 모습은 처음 봤다. 숲으로 들어가면 높은 나무들이 빼곡해서 하늘이 듬성듬성 보이고, 온도도 바깥보다 조금 낮았다. 삼나무와 편백나무는 너무 비슷하게 생겼다. 나뭇잎이 납작한 것이 편백나무라고 들었지만 실제로 둘을 구별하는데 조금 더 훈련이 필요하다.


쭉쭉 뻗은 높은 나무들을 고개 들어 올려다보면 이렇게 보이고, 낙엽이 바닥을 덮어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세상의 일상적 소음, 차 소리, 사람 말소리 등에서 차단되어 고요함이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왔다. 걷는 사람도 드물어서 걷기 친구들 말소리와 내 발소리만 들렸다. 이렇게 한산하고 고요한 숲 속을 걷고 있으면 루소의 말이 떠오른다.




오랫동안 걸으면 깊은 슬픔과 엄청난 불행, 그리고 질투와 원한이
씻은 듯 사라진다. 오래 묵은 증오가 다 헛되고 하찮게 느껴지는 것이다.

-프레데리크 그로,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중에서




그래서일까, 숲길 걷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욕심이 없어 보인다. 아니면 욕심 없는 사람들이 숲길 걷기를 즐기는 걸까. 일상의 소음이 제거된 비현실적 공간에서 고작 반나절밖에 안 보냈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등바등하는 게 하찮게 느껴졌다. 프레데리크 그로는 같은 책에서 "속도가 시간을 벌게 한다고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속도가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말했다. 시간을 벌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시간은 돈이라는 말은 미국의 서부개척 시대에 근면을 강조하는 시기에 탄생했다. 시간 많다고 하면 무언가 부족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 사회에서 살아서 그런지 걷는 것 역시 일처럼 치열하게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완주병', '인증병'은 때로는 집착처럼 보인다. 배지를 갖기 위해, 인증서를 소유하기 위해, 완주하는 일은 좀 지양했으면.... 완주병과 인증병에 빠진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입을 다물어 버린다. 걷는 동안 비우는 미학을 말해도 모를 것이며 내면의 변화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에 대한 열정은 내게는 과시로만 보인다. 틈나는 대로 즐길 수 있는 만큼만 걷고 즐기는 게 진정한 걷기의 즐거움이 아닐까.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며,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순간 모든 것이 풍성하게 주어진다.
현존의 힘, 그 자체가 주어지는 것이다.


프레데리크 그로,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걷기가 새로운 여가로서 지나가는 유행이 아니라 모두에게 '현존의 힘'이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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