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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Dec 30. 2020

그녀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영화 <케빈에 대하여> 리뷰


초췌하고 불안하게 멍한 시선으로 등장하는 에바(틸다 스윈튼). 영화 전체는 피를 상징하는 붉은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첫 장면도 토마토 축제로 시작한다. 온몸에 붉은 토마토즙이 뿌려지고 에바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축제 참여자들의 손에서 손으로 누운 채 옮겨진다. 일상도 조각조각 드러난다. 그녀는 갑자기 지나가는 사람에게 뺨을 맞고 욕설을 듣고 당황하지만, 화를 내지도 저항하지도 않는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조차 그녀에게 무관심하거나 냉담하다.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린치 당하는 상황에서도 저항 한 번 없이 수동적일까. 집도 그녀에게는 휴식처가 아니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현재 사이에 악몽 같은 플래시백이 틈틈이 등장한다. 플래시백을 조각조각 맞추면서 에바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서서히 드러난다.      



에바는 여행작가였고, 아들 케빈을 낳았다. 모든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그렇듯, 엄마의 관심과 손길이 많이 필요하다. 에바는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우지만 계속 울어대는 케빈의 울음소리를 참을 수 없을 때가 있다. 하루는 케빈이 하루 종일 울어댈 때, 유모차에 앉아있을 때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에바가 유모차를 밀며 공사 중인 거리를 지나간 적이 있다. 공사장에서 기계가 돌아가는 굉음이 케빈의 울음소리를 뒤덮자 에바의 얼굴에는 잠시 미소가 피어난다. 아이를 사랑하는 건 사랑하는 거고, 힘든 건 힘든 거다. 사랑한다고 해서 안 힘들지 않다. 사랑하기 때문에 힘든 걸 견디는 거지.


케빈은 커가면서 유독 엄마에게 반항심을 보인다. 어쩌면 이 반항심은 케빈의 폭력성 시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바는 모성 신화의 틀에 갇혀있다. 자신이 케빈의 삐뚤어진 행동도 사랑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병원에서 생물학적으로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듣고 에바는 케빈의 폭력성을 자신의 탓으로만 돌리는 경향이 있다. 모성에는 이성이 없기도 하지만, 에바는 불완전한 모성을 인정하기 싫어서 아이의 폭력적 성향이 심각해지는 걸 간과한다. 부모는 아이의 폭력성이 치료가 필요한 단계라는 걸 인식하지 못한 채 그저 좀 난폭한 아이라고 여긴다. 자상한 남편과 에바는 아이를 키우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 한다.


케빈은 엄마와 관계가 좋지 않고, 케빈의 아빠는 활과 같은 무기가 될 수 있는 장난감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사준다. 케빈에게 내재된 폭력성이 폭발하는 계기는 부모의 지나친 사랑일까. 케빈은 엄마가 자신을 야단칠 수 없으며 미안해하는 걸 이용해서 폭력성을 키우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미국의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발생했던 총기 사건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영화들이 폭력과 아이의 고립이라는 관점에서 사건을 다룬다. 다른 영화들이 아이의 고립이 결국 사이코패스의 기괴한 행각으로 두드러지는데 초점을 맞추어 폭력을 소비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이코패스 아들을 둔 가족, 특히 모성/엄마에게 초점을 맞춘다. 아들이 사이코패스가 되어 학교에서 재미 삼아 친구들을 죽인 후 소년원에 들어가 있는 동안 남겨진 엄마는 어떤 삶을 살아갈까.      



소년원에 있는 아들을 찾아가 마주 앉아서 엄마는 묻는다.

-왜 그랬니?

아들은 대답한다.

-전에는 이유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케빈은 살인자지만 여전히 그녀의 아들이다. 에바는 가슴에 아들이라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다. 그녀는 동네 사람들, 특히 케빈의 행동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비난과 냉담을 언제까지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이 영화는 용서할 수 없는 폭력을 저지른 아이의 엄마에 대한 이야. 케빈이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을 저지른 것은 엄마 탓일까. 아이를 귀찮아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아이에 대해 무책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엄마였다. 에바는 엄마로서 완벽하지 않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아이를 키웠다. 그녀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 걸까. 그녀도 아들이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케빈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에바에게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손가락질받아야 할 일일까. 사람들이 마치 에바가 살인자인 것처럼 취급해도 에바는 한마디 불평 없이 아들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할 운명이다.       



희망 없는 아이와 그 아이를 지켜봐야 하는 엄마의 미래는 어떨까. 아이의 감정 없는 말은 앞으로 엄마의 삶도 가망 없다는 걸 암시한다. 끊을 수 없는 천륜으로 이어진 모자에게 우리는 어떤 시선을 던져야 할까. 그래서인지 제목이 ‘우리는 케빈에 대해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이다.


우리는 사이코패스를 한 개인의 문제, 특히 부모의 몫으로 쉽게 단정하고 비난을 퍼붓는다. 비난은 정의의 편에 서는 쉬운 방법 같지만 실은 상대의 고통을 타자화해 버려 또 다른 폭력을 재상산한다. 비난은 해결책이 아니라 폭력의 또 다른 이름이다.


아이의 죄에 대해 엄마가 어느 선까지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거리를 던지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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