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TV에서 미국 서부영화를 보면서 자랐다. 그때는 방송국에서 서부영화를 줄기차게 내보내는 이유를 몰랐다. TV를 틀면 영화가 나오고 재미있으니까 많이 봤다. 그중 인상적이었던 미드 <초원의 집>이 있다. 작은 농촌 마을에서 한 대가족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을 이야기한다. 우리로 치면 <전원일기>쯤 되려나. 매회 가족에게는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있었다. 드라마는 가족이 결국에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훈훈하게 끝나서 다음 회가 기다려지는 드라마였다. 어린 눈에 넓은 초원도 신기했고, 아저씨가 입은 멜빵바지도 신기했고, 대가족 중심 문화도 신기했다. 이 시기의 서부영화는 아메리칸드림을 선전했다. 땀 흘린 만큼 보상을 받는 아메리카로 이민자들은 끊임없이 갔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로 서부 개척시대에 실제로 농사를 짓거나 금을 채굴해서 부를 일구는 사람도 많았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사회여서 무법자도 많았다. 이런 무법자를 영웅처럼 다루는 영화도 많았다. 아무튼 당시 미국은 꿈의 나라였고 실제로 아메리칸드림을 찾아 한국인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많이 갔다. 그때 이주한 사람들이 이민 1세대일 것이다. 미국은 정말 꿈의 나라였을까?
15년 전쯤에 뉴욕에서 요즘 말로 하면, 한 달 살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매일 뉴욕 골목을 헤집고 다니면서 궁금한 점이 있었다. 이민자의 관문답게 거리의 절반 이상이 아시아계 이민자들이었다. 작은 마트, 식당, 카페테리아에 들어가면 주인은 거의 한국인처럼 보였다. 그들은 대체로 마르고, 무표정하거나 지쳐 보였고, 기계적으로 손님을 맞이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늦게까지 일하는 삶을 찾아 이주한 것일까? 고단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상상했을까? 그들이 꾸었던 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물질적 풍요? 당시 한국은 더 살기 힘든 곳이었겠지만 오로지 2세 교육을 위해 한국에서 편한 삶을 포기한 이민자들도 많았고, 이슈가 되기도 했다. 아이들의 교육에 자신의 인생을 다 걸었던 사람들은 지금 행복할까? 아메리칸드림은 처음부터 없었고, 있더라도 소수만 이룰 수 있는 것을 깨닫더라도 자리 잡은 생활 터전을 떠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터전이 만족스럽든 아니든.
영화 <미나리>는 이런 이야기를 다룬다. 이민 2세대인 꼬마 데이비드가 이민 1세대인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외할머니를 한국계 미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뉴욕에서 내가 표면적으로 본 이민자들의 이미지는 지나친 노동 시간에 압도당해 생기를 잃은 사람들이었다. 더 깊숙이 들어가면 이민 1세대와 이민 2세대 간에 문화적 차이로 갈등을 넘어서 소통이 부재했을 것이다. 영화는 감정을 거의 넣지 않고 건조한 시선으로 이 갈등과 피로를 담는다.
서로에게 구원이 되기 위해 새로운 땅에 정착한 부부는 병아리 감별사다. 캘리포니아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아칸소주로 이사해서 트레일러에 산다. 토네이도가 오면 날아갈 수 있는 트레일러 집은 저소득 노동자의 상징이다. 쉬지 않고 부부가 일해도 빚은 늘어갔다. 제이콥은 한국 농작물을 길러 판매를 해서 아메리칸드림을 이루려고 계획한다. 부모가 일하러 간 사이에 심장이 안 좋은 데이비드를 돌봐줄 할머니가 한국에서 온다. 미국인 손자는 한국인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다. 쿠키도 못 만들고 텔레비전 보면서 혼잣말을 하고, 데이비드가 오줌 싸면 고추가 고장 났다고 놀린다. 손자와 할머니 사이에 이질감은 극복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한집에 살아야 하는 가족이다.
미국은 한국 못지않게 가족 서사, 특히 아버지의 서사를 강조하는 나라이다. 문화가 다른 이민자들 한가운데 아버지 서사의 원형인 교회가 있다. 교회는 해서는 안 될 것들을 가르친다. 가장 좋은 옷을 차려 입고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가는 의례는 중요하다. 신은 자비롭지 않다. 신은 자신의 말에 따를 것을 강요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할 때 벌을 주고, 신의 마음에 들 때 상을 준다. 상벌 개념은 아버지의 서사에 녹아있고, 이 원리에 따라 미국이라는 나라가 움직인다. 국가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 역시 상벌 개념에 복종한다. 땀 흘리는 자에게 부가 따라온다고 믿는다. 아버지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권위를 부여받는다. 부와 가나는 사회 구조적 문제보다는 한 개인 나아가 한 가족 집단의 책임으로 전가된다.
가족은 어려움이 닥치면 싸우면서도 의지한다. 할머니의 실수로 팔려는 농작물을 보관한 창고에 불이 나서 다 타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마음의 상처가 있을 때 무조건적 사랑을 주는 것은 할머니들의 특기이다. 데이비드는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할머니가 데이비드에게 보내는 무조건적 지지와 사랑을 어렴풋이 느낀다. 데이비드 가족은 다 타버린 농작물 창고 때문에 다시 빚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희망이었던 것이 잿더미로 변하면서 영화가 끝난다. 과거 서부 개척사를 홍보했던 훈훈한 결말로 끝나는 드라마와는 완전히 다른 결말이다. 현실은 데이비드 가족에 더 가까울 것이다.
영화는 미국 땅에서 살아가는 한국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이지만 공간을 초월해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노동자 가족의 이야기이다. 이는 구조적 문제가 있는 현대의 물질문명사회에서 고군분투하는 가족의 초상이다. 소비사회에서 낮은 구매력을 가진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원래 잘 살았던 사람이 더 잘 사는 시대이다. 데이비드 가족은 어디에 속할까? 결국 가족만이 답이라는 미국식 세계관은 폐쇄적이고 진부해 보인다. <미나리>를 보고 난 후 나는 한국 배우가 출연한 미국 영화로 느꼈다. 다행히도 한국은 소득 재분배 담론기로 들어선 것 같다. 미국과 다르게 가족이, 아버지가 모든 걸 책임지는 시대를 조금 벗어난 것 같은데. 십 년이나 이십 년 쯤후에야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겠지?
덧. 그제께 일 끝난 후 영화관에 갔다. 코로나 시국 이후 처음 영화관에 갔으니까 거의 일 년 만이다. 영화를 안 보고도 살 수 있구나. 사람도, 사물도, 절대적인 건 없다. 내 첫사랑이 했던 말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잊힌 사람이라고. 당시에는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런저런 경험이 쌓이면서 이 말이 가끔 떠오른다. 사람도 잊는데 허구인 영화를 잊는 게 뭐 대수인가. 어른의 삶은 잔인하다. 다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게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