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계단 지옥, 금오산

2021. 3. 13. 토

by 김남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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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행동을 추진하는 강력한 동기 중에서 모방 동기가 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을 탐닉한 후 모험심으로 불탄다.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을 욕망한 것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 기사도 정신을 실현하려는 강한 모방 동기를 갖는다. 모방 대상은 시대마다 바뀐다. 17세기에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이었다면 현재는 단연코 유튜브와 각종 SNS가 우리 곁에 있다. 야채를 오븐에 굽는 법, 집에서 패딩과 울 세탁하는 법, 어깨와 등 스트레칭, 타로점 등등 내가 즐겨 보는 유튜브 콘텐츠이다. 최근 친구 때문에 산에 가기 전에 등산 유튜브도 가끔 본다. 금오산에 가게 된 동기는 전적으로 유튜브 때문이다.


한 번도 가 볼 이유가 없었던 거리도 멀고, 심리적으로도 머나먼 구미. 등산 유튜브 콘텐츠를 애독하는 친구가 어느 날, 구미 금오산에 있는 약사암에 가고 싶다 말했다. 유튜버들의 전문 촬영 장비가 환상을 키우는 데 한몫했다는걸, 실제로 가 본 후에 알게 된다. 원래 여행지를 정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공상에서 시작한다. 친구는 금오산 정상인 현월봉에서 약사암을 내려다보는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상상을 실현하려 했다. 나는야 이제 제법 산에 다녀 본 사람. 금오산행에 따라나섰다.


금오산은 한마디로 욕 나오는 산이다.-.-내가 폭신하고 부드러운 산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금오산은 산 자체가 화강암반으로된 땅속까지 돌산이다. 많은 산의 등산로가 해발 몇 백 미터 올라가서 시작하는 편인데 금오산은 정직하게 지면에서 시작해서 해발 1천 미터 가까이 되는 고도까지 내 두 발로 올라야 한다. 정상인 현월봉(975미터)까지 거의 돌계단 지옥이다. 이런 산은 처음이다. 정상까지는 3.4km로 짧다. 즉 미친 듯이 가파르단 말이다. 평지에서 3.4km를 걷는데 1시간이 채 안 걸린다. 하지만 가파른 산에서 1미터는 체감 평지에서 1킬로미터보다 더 힘들다. 올라가는데 4시간도 넘게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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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을 기다리면서 이름 모르는 나뭇가지에 달린 마지막 겨울 낙엽과 새순과 대화(응?). 겨울에 낙엽이 안 떨어지고 나뭇가지에 달린 낙엽은 새순의 옷이라고 한다. 낙엽이 새순을 따뜻하게 보호하다가 봄에 기온이 올라가면 떨어진다네. 지혜로운 자연이다. 나무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 다른 점에 감탄한다. 바람에 스며있는 찬 기운에도 봄을 알리는 나무의 신호를 찾는 재미. 양지바른 곳에는 벌써 꽃이 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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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도 뭐 이런저런 포즈로 인증 사진 찍느라 폭포 앞에서 한참 시간을 보낸 후 구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오형돌탑으로. 금오산은 암반층으로 이루어진 산이라 사방에 돌천지이다. 산세가 깊어서 그런지 바위와 바위 틈에 기원한 흔적이 많다. 아마도 새벽에 간절함을 가슴에 품고 산에 올라 소원을 빌면서 만들었을 작은 돌제단과 기원탑이 곳곳에 숨어있다. 하산길에 오형탑에서 백패킹을 하러 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텐트며 침낭, 끼니 거리가 든 어마 무시한 배낭을 메고 오르는 이들은 어떤 보람을 찾아서 기꺼이 시시포스 바위를 어깨에 메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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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에도 아직 곱게 살아남은 마애여래부조를 지나서 친구가 오매불망하던 약사암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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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산은 대부분 '기암괴석'이다. 기암괴석은 기이하게 생긴 바위와 괴상하게 생긴 돌이란 뜻이다. 돌의 생김새만이 아니라 돌에 만들어진 주름도 다 달라 잠시 아재 등산 블로거로 빙의했다. 가끔 검색하다 보면 아재 등산 블로그인 것처럼 보이는 블로그를 만난다. 산에 안 가는 사람에게는 지루한 돌 사진 폭탄인 블로그이다. 비슷비슷한 돌 사진만 잔뜩 올려놓은 블로그라고 생각했는데 산에 다녀 보니 바위의 얼굴이 다 달라 나도 바위 사진 폭탄 투하하고 있다.-.-;; 정상인 금오산까지 또 계단 지옥이라 약사암에서 친구들 기다리면서 바위를 관찰하고 바위 틈을 발견하고 사진을. 기암괴석이 약사암을 삼키려고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높은 곳까지 건축 자재를 가져가서 절을 지은 사람들에게 무한 존경을 보낸다.


하산은 더 짧은 길인 법성사로 내려왔다. 해발 900미터쯤에서 거리 2.4km만에 땅에 내려오는 신공을 발휘했다. 가파르고 등산객이 적은 길이라 신선한(?) 낙엽이 수북해서 바닥이 보이지 않았고, 평소처럼 잰 보폭이 아니라 성큼 발을 내딛다 발이 땅에 안 닿아 한 번 크게 미끄러졌지만 다행히 배낭이 완충 작용을 해서 무탈하게 내려왔다. 하루 종일 단단하고 뾰족한 바위를 디뎠던 발바닥에 땅이 닿자 폭신한 카펫 위를 걷는 느낌이었다. 처한 환경은 개인의 감상이나 느낌에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금오산은 뼛속까지 공대생 같은 산이다. 금오산, 몰랐으니 다녀왔지만 다시는 안 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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