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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May 17. 2021

시공간의 전복, 그 이름은 치매

<더 파더> 리뷰


엄마는 극 감정형이다. 나는 극 사고형이다. 서로 다른 감정 극단에 있는 엄마와 나는 종종 파국으로 치닫곤 한다. 공감하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말보다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내 화법 때문에 엄마는 버럭한다. 엄마는 극도로 화가 나면 일주일 이상씩 나와 말을 섞지 않는 방법으로 푼다. 나는 일 년에 두세 번쯤 크게 사고를 친다.


얼마 전에 엄마 왈, "너희들이 어릴 때는 너희가 무슨 말을 해도 아무렇지 않았어. 근데 이제 뭐라고 조금만 해도 내가 늙고 힘이 없어서 무시하는 거 같아."

"우리가 어릴 때는 엄마가 우리 보호자였으니까 이제 우리가 다 커서 엄마를 보호하려고 하는 건데 왜 자꾸 무시한다고 생각해?"

"몰라,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엄마는 인지력도, 판단력도 흐려지는 노화가 당황스럽다는 말을 엄마 식으로 했다. 나는 인정머리 없이 모른 척 대꾸한다. 기력이, 팔다리의 움직임이, 눈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을 혼자 겪고, 이를 위로받고 싶어 하는 엄마의 제스처를 본 척 만 척한다. 자식은 먼저 늙어가는 부모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의 이야기이다. 알츠하이머를 소재로 다루는 영화는 많다. 주로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과 가족과의 관계를 다룬다. 알츠하이머에 대한 몰이해로 가족이 냉담하게 환자를 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와 엄마의 입장 차이처럼. <더 파더>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노인의 시점으로 영화를 전개한다. 노인의 시점에서 보면 보살피려고 애쓰는 가장 가까운 식구도 공격자처럼 보인다. 원래 병은 지독히 개인적인 영역이다. 병에 걸렸을 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본인 이외에는 아무도 상상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세계는 병에 걸린 당사자만이 아는 세계이고, 고립의 세계이다. <더 파더>는 알츠하이머로 고립의 세계에 사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섬세하게 묘사한다.


영화에 의하면 알츠하이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선형적 시공간 개념을 전복한다. 안소니는 완전히 다른 시공간에 산다. 안소니는 간병인과 싸워서 혼자 지낼 수 없어 딸의 집에 살게 되었다. 이 단순한 과거 사실이 현재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문득 안소니는 사위 얼굴에서 낯선 사람의 얼굴을 보고 왜 자신의 집에 있는지 묻는다. 둘째 딸이 사고로 죽은 과거 이전으로 돌아가서 딸이 어디 있는지 묻는다. 안소니는 우리와 똑같은 현재에 살고 있지 않다. 안소니는 과거와 현재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틈만 나면 현재에 과거가 밀고 들어온다. 안소니는 딸의 얼굴에서 문득문득 다른 사람을 본다. 현재에 머물다 그만의 시공간에 들어갔다 나오는 순간이다. 심하면 그만의 시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는 유난히 손목시계에 집착한다. 그는 손목시계를 감추며 찾기를 반복한다. 이 반복된 행위에서 그가 질서정연한 시간을 되찾으려는 무의식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손목시계는 찾을 때마다 번번이 손목에 없다. 과거 시간이 뒤죽박죽 섞여서 적절하지 않을 때 한 조각씩 툭 튀어나온다. 심지어 집안에 늘 있던 물건의 위치도 갑자기 달라 보인다. 물건이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안소니의 시공간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도 혼동하게 된다. 안소니가 보는 것이, 이제 어느 시간에 속한 것인지, 우리도 모른다. 딸 앤을 비롯해서 사위, 간병인 모두 이 낯선 시간 체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도 이제 안소니의 시간 미로에서 헤맨다.


안소니가 과거를 현재로, 현재를 과거로 인식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요양원에 앉아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요양원은 그에게도 완전히 낯선 시간이고 공간이다. 안소니는 당혹스럽다. 익숙한 시공간에서 완전히 이탈한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난 누구지? 바람에 잎을 다 잃어버린 거 같아." 혼자만의 시간 세계에 갇힌 영혼이 흐느끼면서 한 마지막 말이다.

덧. 안소니가 혼자만의 시간 미로에서 헤맬 때, 자신이 미로에 있다는 사실을 잊게 도와주는 단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비제의 오페라 <진주조개잡이>의 아리아 '귀에 익은 그대 음성 Je crios entendre encore'이다. 안소니는 이 곡을 들을 때 과거도, 현재도 아닌 노래에만 집중할 수 있다. 영화 전반에 걸쳐 이 곡이 울려 퍼지는데 가사도 꼭 안소니의 마음처럼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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