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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Sep 22. 2022

타인을 안다는 착각

영화 <서치> 리뷰 


요즘 뉴스 기사보다 SNS를 더 자주 들여다보는 것 같다. SNS는 빠르고, 접근하기 쉽고, 몹시 주관적 매체이다. 모르는 사람의 일상을 구독하고 생각을 들여다본다. 우리는 왜 본 적도 없는 사람의 이야기에 매혹되어 이야기를 엿보는가? 인간에게는 스토리텔링 본능이 있다. 문자가 없었던 시대에도 동굴벽화를 남겼고, 그럴듯한 사연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 동시대는 물론 후대에 전파했다. 우리에게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칠 곳이 필요하다. SNS는 때로는 외침을 들어주는 대나무숲이고, 해우소이다.


하지만 SNS는 개인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편집할 수 있다. 가령 영화 이야기만 하는 SNS 이용자는 영화만 보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사람이 한 가지 활동만 하고 살 수 없는데 우리는 SNS에서 보는 것으로 그 사람을 정의하게 된다. 현실에서와 인터넷에서 정체성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다.




개인의 정체성이 편집되는 방식


영화 <서치>는 한 개인의 정체성이 편집되는 방식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딸 마고에게 부재중 전화 3통을 확인하지만, 그 후 딸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 아빠 데이비드는 사라진 딸을 찾기 시작한다. 막상 딸을 찾으려고 하자 아빠는 딸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걸 깨닫는다. 딸에게 꼬박꼬박 피아노 레슨비를 주었지만, 6개월 전에 피아노 레슨을 그만둔 사실을 알게 된다.


타인의 마음을 잘 안다고 가정하는 일은 가족 관계에서조차 경계해야 한다. 어떤 사람에 대해 안다는 가정은 그 사람이 내게 보여준 단면만 아는 거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고백하자면 이 사실을 인정하는 데 꽤 오래 걸렸다.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고 아는 것은 이 세상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가까운 관계일수록 잘 안다는 착각에 빠진다. 나중에 모르는 모습을 발견할 때, 우리는 상대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고 왜 그랬는지 추궁하고, 어떻게 니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니, 하고 반문한다. 아빠 데이비드 역시 딸의 물리적 실종으로 딸과 자신과의 사이에 싱크홀 같은 커다란 구멍을 발견한다.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지만, 딸을 찾아야 하는 목표에 다가가면서 딸의 진짜 모습에 다가간다. 딸이 피아노만 보면 엄마 생각이 나서 괴로워서 피아노 레슨을 그만두었고, 친구 없이 늘 혼자 점심을 먹고, 어느 호숫가에 혼자 앉아 마음의 평화를 찾은 사실을 알게 된다. 16세가 되어가는 딸은 세상과 점차 고립되어 외톨이로 살아가고 있었다. 딸의 고민과 소외감을 딸이 없어진 후에 알게 된다. 안타깝지만 애착 대상이 부재 후에나 성찰적 태도를 지니게 되는 건, 사람의 속성이 아닐까.


아빠가 딸의 본 모습에 한 발씩 가까워지는 통로는 바로 SNS 서치를 통해서다. 딸의 각종 SNS 계정, 페이스북부터 텀블러, 인스타그램, 유캐스에 로그인하자 딸이 살았던 ‘리얼’ 세계가 쭉 펼쳐진다. 딸은 현실 세계보다 넷의 세계에서 더 진지하고, 진정한 자신으로 살았다. 문득 무서웠다. 누군가 내 블로그나 SNS 계정을 추적하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물론 특정 목적으로 나를 추적하는 누군가가 있을 리 없을 테지만. 어느 날에는 방문객 유입 기록과 수상한(?) 유입 경로를 보면 누군가에게 염탐당하는 건 아닌지, 망상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가상세계의 편집자는 계정 주인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내가 보이고 싶은 모습만 쓱싹 잘라서 올리고, 영화 속 마고처럼 외톨이로서 진짜 자신을 노출할 수도 있다. 완전한 거짓 세계도 아니지만, 진정한 진실만으로 이루어진 세계도 아니다. 편집된 정보를 진실로 받아들일지 혹은 거짓으로 받아들일지는 보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진다. 아빠는 딸이 견고하게 구축한 가상세계에서 진실을 본다.


영화에서는 SNS가 딸의 행방을 추적하는 데 긍정적으로 기능하지만, SNS의 한없이 가볍고 속이기 쉬운 속성도 집단 심리를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 데이비드가 딸의 행방을 묻느라 2백 명이 넘는 친구들에게 전화했을 때, 모두 딸과 안 친하고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딸의 실종이 미디어에 공개수사로 노출되자 상황은 달라진다. SNS에는 딸을 그리워하는 친구들의 피드가 올라오고 댓글과 감정 이모티콘들이 쌓인다. 사람이 사라져 생사를 모르는 데도 손가락으로 ‘슬퍼요’를 누르고, ‘보고 싶어’ 같은 친절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손가락만 누르면 감정을 표현하는 간단한 방법에 진심의 깊이가 담길 수 있을까? 슬퍼요, 보고 싶어, 댓글을 달지 않으면 걱정하지 않는 걸까? 현실 세계에서 무관심으로 받아들여졌던 일이 넷에서 군중심리와 만나면 과장되고 왜곡된다. 가상세계에서는 감정이 인스턴트이다. 쉽게 표현되고, 쉽게 잊힌다.


마고의 실종을 수사하는 담당 수사관은 아들을 키우는 엄마다. 실종된 딸과 아빠의 관계와 대립 항으로 볼 수 있다. 엄마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가정에 빠진다. 그녀는 아들을 잘 안다고 확신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아들이 예민해서 사회에 조금 적응하지 못한다고 단정한다. 이 단정 탓에 모성을 지나치게 발휘한다. 엄마의 적극적 개입이 없었더라면 아들은 어땠을까?


타인을 잘 안다고 단정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주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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