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독일 여행 중 가장 기대했던 곳이 베를린이었다. 3박 4일 머무는 동안 잔뜩 흐렸다. 오후 두세 시면 어둑해져서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돔이나 박물관 개관시간을 미리 확인 안 한 내 탓도 있지만, 다른 도시에 비해 관람 시간이 유독 안 맞았다. 첫날 오전에는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햇살을 받으며 브란덴부르크문부터 체크포인트 찰리로 걸어갔다. 잠시 동행한 후배가 오후에 프라하로 넘어가서 마음이 분주했다. 망명을 원한 사람들이 망명이 미뤄질까봐 조급해하는 것처럼 후배의 기차 시간을 챙기는 게 조금 버거웠다.
베를린은 과거 전쟁과 분단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흔적들을 곳곳에 보존하고 있다. 동독에서 서독의 경계인 체크포인트 찰리는 지금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분단의 역사가 마그넷, 열쇠고리 등에 박제되어 있었다. 기념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분단은 아주 하찮게 보였다.
사실 한계선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이 자신의 입장에 따라 정해 놓은 기호에 불과할 뿐이다. 그 무거운 선을 넘으려고 목숨도 걸고, 가진 걸 다 걸었던 시절이 있었다. 무거움과 가벼움은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은 항상 옳다.
브란덴부르크문에서 체크포인트 찰리까지 걸어가는 길에 만난 거리는 군더더기 없이 네모 반듯했다. 건물들은 장식 없이 실용 기능에 무게를 두어 마치 임시 세트장 같았다.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스파이 영화에서 많이 봤던 풍경이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도로 한가운데 있고, 양 옆으로 상점가이다. 체크포인트 찰리가 없다면 이 거리는 과거가 없는 장소가 되어 버릴 것이다.
동독과 서독의 경계를 이루는 장벽은 무너졌지만, 공원으로 보존되어 있다. 장벽 공원은 베를린 장벽을 따라 베를린 시내 곳곳에 있다. 이 공원들은 피의 역사다. 장벽을 넘다가 죽은 이들을 기념하고, 어떤 공원은 평화를 기념하는 그라피티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면 사람의 생명도 후순위에 두는 망상가 되어 버린다. 이념, 신념은 필요하지만 때로는 버릴 줄도 알아야 하는데...이념이나 신념에 집착하면 어느 순간에 실체는 없고, 고집처럼 보일 수 있다. 베를린의 과거, 우리의 현재를 보면서 신념이나 이념이 고집이 될 때를 경계하고, 각성해야지.
이런 공간을, 우리라면 개발한다고 건물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을까. 독일인들은 늘 참회하는 마음일 것 같다. 매일 보면 생각이 달라지려나...
"우리 사랑의 다리가 너희 증오의 벽보다 더 강하다."라는 문장이 마음 깊이 와 닿는다. 증오보다 사랑이 강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증오심에 굴복할 때가 훨씬 더 많다.
우리로 치면 가로수길이나 청담동 같은 쿠담 거리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전쟁의 폭격받아 파괴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아름다운 교회가 파괴된 채 있는 전시하고, 절대로 전쟁은 안 된다는 메시지를 시내 곳곳에서 내보낸다. 가로수길처럼 시크한 거리에 전쟁의 흔적을 보존해 평화를 체화하려는 독일인의 정서를 가만히 받아들였다.
카이저 빌헬름 원래 건물은 전쟁박물관처럼 전시관이고, 실제 예배는 새로 지은 건물에서 이루어진다. 고딕, 바로크 건축물이 많은 곳에서 신축 예배당 내부는 단순하면서도 화려하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거리에, 교회가 있다. 내부에서 오르간 연주곡이 흘러나와서 공간 전체를 지배한다. 신을 찬양하는 연주곡에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지친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눈을 감으라는 계시처럼 다가왔다. 눈을 감고, 가만히 음악 소리에 귀를 내어주자 여행자의 긴장이 풀리면서 편안해졌다.
파괴된 부분에 유리창을 만들었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파괴된 교회라는 것을 잊을 수 없게.
예배당 건물 2층에 큰 오르간이 있고, 시간 잘 맞추면 연주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스테인드글라스 위에 작은 격자무니 창에 모던한 예수상과 제단. 현대적 블링블링함 속에 웅장함이 있어서 무척 인상적이었다.
11월 베를린은 흐린 하늘과 축축한 공기 탓에 우수로 가득 차 있다. 우수어린 베를린을 본 건 행운이지만 햇살 좋은 계절, 베를린 영상을 보니 내가 본 베를린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한 도시에 잠시 머물고 그곳에 다녀왔다 혹은 그 도시를 안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적어도 사계절을 다 봐야 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1월 박물관섬은 아쉬움 그 자체였다. 관람시간도 안 맞고, 슈프레 강은 안개가 짙어서 외투 깃을 여미고, 고개를 숙이고 걷게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무기력과 어깨동무를 했다. 돔만 내부만 다녀왔다. 박물관 섬은 베를린 구시가의 핵심인데 이 핵심을 겉에서만 보고 왔더니 콜라 없이 피자 먹은 기분이다. 그래도 풍경은 근사하다. 햇볕, 안개, 어스름, 바람이 들어간 거리는 내 최애 풍경.
이런 구 리 구 리 한 날씨에도 조깅하는 베를리너에게 리스펙트.
베를린을 떠나기 전날에는 다행히 비는 안 왔지만 어둑해서 오후 2시가 되니까 깜깜했다. 여행자에게 날씨는 없던 희망도 품게 하고, 있던 희망도 꺾어 절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여행지에 있는 그 순간, 나중에 이런 걸 그리워할 걸 알면서도 절망에 빠졌다. 어디를 가야 할지, 길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박물관섬을 빠져나와서 훔볼트 대학가 쪽으로 걸었다. 아무 의욕이 없던 순간이다. 사진 찍기도 싫었고. 지금 사진을 보면서 후회한다. 사진 좀 더 열심히 찍을 걸. 쓸데없는 후회다. 사진을 보면 그날의 기분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흥겨운 것도 좋지만 난 우울한 정서가 있는지, 자포자기했던 순간들을 특히 애정 한다. 자포자기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다른 곳에 가서 자포자기를 극복하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