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여행하는 법’을 강연했을 때 받았던 질문이다. 이 질문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혼자는 외롭다는 전제이다. 혼자라서 외롭다고 단정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학습된 프레임이 아닐까? 둘이면 안 외로울까? 인생이란 긴 여행에서 혼자라서 외로운 게 아니라 사람이라서 외로운 건 아닐까?
내 경우에는 오히려 온전히 혼자 시간을 보낼 때 생산적이 된다. 책을 읽거나 드라마나 영화를 보거나 운동을 하는 등 외로움을 채울 수단을 찾아서 반짝반짝하게 벼린다. 혼자라서 느끼는 외로움은 내가 얼마든지 통제하고 때로는 긍정적 자기계발을 추진하는 동력이 된다. 하지만 연애할 때 만나는 외로움은 전혀 다르다. 연애는 상대와 보폭을 맞추며 걷는 탓에 감정도 상대와 나우게 된다. 둘일 때 외로운 감정은 상대에게서 비롯될 경우가 많아서 감정이 나를 지배하곤 한다. 그러면 두 손 놓고 감정 자체를 곱씹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종종 무기력해진다. 상대의 마음과 기분에 따라 내 감정도 춤을 추는 바람에 아무것도 못하곤 한다.
연애는 ‘식집사’처럼 너그러운 사랑을 쏟는 재능을 요구한다. 식물은 말이 없다. 식집사는 이 대전제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반려 식물을 집에 들이면서 식물이 내 마음을 헤아려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식물은 침묵의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무한한 관심을 쏟겠다는 서약하는 셈이다. 잎이 마르면 부족한 게 정성은 아닌지 돌아본 후 생명을 키우는 성스러움에 더 가까이 가겠다고 다짐한다.
식물이 기분이 좋아서 잘 자라도록 물, 햇볕, 온도, 습도 등을 적절하게 만들어주며 세심하게 살핀다. 식물이 새로운 잎을 내놓고, 잎이 크고 건강하게 자라 어느 날 꽃을 피우면 보상받는다. 기쁨의 크기는 그동안 쏟은 정성의 크기에 비례한다. 이 맥락은 우리가 스스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말 없는 식물이 내보내는 미세한 신호를 찾아서 읽고 해석하며 교감한다. 여기에는 자의적 해석이 들어있다. 반려 식물과의 관계에서 식집사는 일방적 사랑 쏟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세계를 창조한 사람은, 바로 식집사 역할을 자처한 자기 자신이다.
연애는 식물을 돌보는 것처럼 상대를 향해 내 촉수를 뻗는 것이다.하지만 관심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을 기대하지 않는 식물 키우기와는 당연히 다르다. 연인은 말을 하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고유한 마음을 지니고, 그 마음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휘두르는 존재이다.
다른 누구와도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서 사랑에 빠지지만, 바로 대체 불가능해서 종종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연인은 듣기에 거북하거나 거슬리는 말을 하기도 하고,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할 때도 있다. 매번 마음에 차지 않는 점을 표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화가 솟구쳐도 누르고, 쏟아내고 싶은 말도 꿀꺽 삼킨다. 자의적 해석으로 가득한 늪에 점점 끌려들어 간다. 하지만 연인은 이 사실을 모를 때가 많아서 ‘오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린다. 가령 ‘미안해.’란 한마디가 듣고 싶어서 조금 투정 부리면 연인은 구구절절 이론적 논리로 자신의 행동을 설명, 아니 방어한다. 내 귀에는 변명처럼 들리고 급기야 빈정이 상한다.
이와 같은 해석 왜곡은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비슷하다. 인간관계는 상호작용의 결에 따라 깊어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인간관계에서 서로 관심의 크기가 다를 수밖에 없어서 적절한 거리 두기가 회자되곤 한다. 마음의 크기는 객관적 수치로 나타낼 수 없고 지극히 주관적이다. 알고 있지만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걸 잘 안다. 식물에게는 처음부터 아무 기대를 하지 않지만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그럴 수 없다. 연인이든, 친구든, 동료든, 내가 상대를 배려한 만큼 상대에게서 배려받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싹튼다. 싹이 일단 올라오면 보살피지 않고 내버려 두어도 무럭무럭 자라는 속성이 있다. 내가 쏟은 관심만큼 돌아오지 않으면 섭섭해서 상처받고 나아가 손절까지 상상하곤 한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맛보는 설렘과 즐거움은 무시할 수 없다. 즐거움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가꾸려는 의지와 ‘땀’이 만든 열매이다. 생각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을 수용하고 배려하는 태도는 인간 사회에서 기본이다. 이론적으로는 말이다. 실제는 내 마음은 나에게 속하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요물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르는 길’이란 말이 있듯이 말이다.
혼자 살려면 사람과 적절하게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 성인이 되면 학창시절 친구들과는 멀어져서 가끔 안부를 확인하고 만난다. 안부도 만남도 없는 긴 공백 시간이 필연이지만, 그 시간에도 친구들이 나를 대하는 마음이 변했을 거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함께 보냈던 시간을 마구잡이로 구겨서 휴지통으로 보내 삭제할 것이라고 상상하지 않는다. 다만 기억을 차곡차곡 접어서 깊숙이 넣어두었다고 믿는다. 철 지난 옷을 깨끗하게 정리해서 가지런히 접어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다고 다시 꺼내는 것처럼. 만나면 ‘그 시간’을 언제든 꺼내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말이다. 연락도 안부도 없는 ‘빈 시간’에 자기 자리에서 충실하게 살고 있다고, 서로 믿어준다.
친구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연인에게도 필요하지만 연인과 친구는 똑같지 않다. 애착 관계에 대한 태도를 조언하는 책이나 영상이 넘치는 이유는 거리를 두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연인 관계에 쏟은 시간과 정성을 꼭 보답받진 않는다. 이런 경우 당연히 시간과 마음을 바친 본전(?) 생각도 난다. 이럴 때 관계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으면 에너지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다. 이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보상과 다르다. 반드시 필요하고, 쏟은 시간만큼 뒤따라온다. 가령 책을 읽으면 좋은 글을 만나고, 시야가 넓어진다. 좋은 문장을 읽으면 글감이 떠오르고, 어느새 글쓰기 근육도 야금야금 붙는다. 또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일용할 양식이 마음에 가득하다. 현실에서 달아나고 싶지만, 두 손 두 발 현실에 꽁꽁 묶여있을 때 공수해 온 일용한 양식을 꺼내 먹는다. 여러 가지 경험은 단단한 내면을 만든다.
신경과학자 존 카시오포는 사람들이 외로움을 느끼도록 진화했다고 믿는다. 외로움을 느껴야 다른 이들과 함께 살고, 생존을 위해 다른 이들과 협동하며 함께 살아야 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외로움이 새로운 친구를 찾거나 사람들을 만나는 원동력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을 빌리면, 역으로 비혼은 인간관계에서 거리 두기를 할 수 있어서 사람 외에 관심을 쏟고 시간을 내어줄 것을 찾는다.
나 아닌 타자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은 살아가는데 분명히 커다란 기쁨이고 위안이다. 하지만 사람만이 위안이 될 때는 높은 탑에 혼자 갇히는 저주에 걸린다. 타인의 인정과 태도에 나를 내던지면 내면은 카드로 만든 집처럼 무너지기 쉽다.
사람 외에 다른 것에서 위안거리를 찾는 기술이 필요하다. 나에게 맞는 취미를 찾아내서 반짝반짝하게 가꾸는 시간을 사랑해야 한다. 인간관계가 주는 기쁨을 부식시키지 않고, 다른 것이 주는 기쁨도 놓치지 않는 법을 채집해야 한다.